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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공부 - 똑바로 볼수록 더 환해지는 삶에 대하여
박광우 지음 / 흐름출판 / 2024년 12월
평점 :
오늘은 도저히 뭔가를 쓸 기운이 나질 않지만 지금 이 마음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를 모르겠기에 우선 써보기로 한다. 언제까지 미뤄둘 수는 없을 테니까. 죽음은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줄 알았으나 실상 죽음은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직간접적으로 죽음을 느껴본 이들의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최근에 죽음이 주제였던 간호사 수기를 한 편 읽는 것 같았던 오은경 간호사의 <언젠가 사라질 날들을 위하여>를 읽고 이번엔 말기 암, 파킨슨병에서 명의라 불리는 박광우 교수의 <죽음 공부>를 읽었다.
사실 죽음을 바탕에 깔아둔 두 편의 책을 연달아 읽는 게 조금 힘들었다. 하지만 두 권의 책 모두 생각할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에 두 책 모두 추천한다. 다만 어떤 책을 먼저 읽더라도 텀을 두고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둘의 공통점은 웰다잉을 얘기하고 있었는데, 웰빙은 곧 웰다잉을 뜻한다. 잘 산다. 잘 죽는다.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 책을 오늘에야 다 읽게 되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난 원래 몇 년 전 갑상선암을 진단받았을 때의 일을 말하려고 했다. 착한 암이라고 말하던 사람들, 그거 별거 아니라는 사람들이 생각났고 그들의 말은 미웠지만 수술 후에는 한동안 그것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체력이 조금 더 떨어졌다 뿐이지, 수술 후에 이전과 다르지 않는 생활들을 하고 있으니까.
나는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암의 크기가 0.5cm였고 왼쪽에만 있어서 반절제가 가능했으며 다행히 최소침습이 가능한 교수님이라서 흉터 역시 작았다. 임파선이나 폐로 전이된 케이스도 아니었기에 방사선치료나 항암치료도 필요하지 않았다. 흉터에 예민하지 않아서 수술 부위에 레이저 시술을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살성이 좋아서 지금은 굳이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지금으로부터 2년 후에도 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고 지금처럼 유지한다면 완치 판정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예로 회사에서 안전 교육을 할 때에도 반장님들이 잘 해서 살아있다기보다 운이 좋아서 아직까지 사고가 났더라도 살아있는 것이라 얘기하곤 했다. 그렇게 나는 이전까지 산다는 것을, 살아있다는 것을 ‘운이 좋았다’라는 말로 퉁치곤 했는데 삶과 죽음을 단순히 ‘운’으로 치부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깊은 어둠으로 나를 몰아넣는다.
52. 죽음은 생과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대부분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는 죽음을 생각하지만, 그렇지 못한 죽음이 훨씬 많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슬픔에 빠뜨린다. 그게 내가 될 수도 있고,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몇 개월 전에 아빠를 잃을 뻔했을 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얼어붙고 만다. 아빠가 쓰러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주변의 공기, 피부에 닿는 바람, 초여름이었는데도 덜덜 떨리던 몸의 진동까지 모두 기억이 난다.
147. 환자의 상태는 당장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좋지 않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그녀의 생명을 붙잡아두려 했다. 인공호흡기가 아니면 숨을 쉬지 못하고, 강심제가 아니면 심장이 뛰지 않는 환자의 생명을 붙잡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뇌사 상태를 유지하기만 하는 것이 무슨 치료냐고 누군가 비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환자가 단지 숨을 쉬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죽지 않았다는 사실만이라도) 삶의 위안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나는 이러한 치료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웰다잉은 비단 환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환자를 생각하고 기억하는 모든 보호자들이 이렇게 생을 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또 다른 의미의 웰다잉이다.
조금씩 꺼져가는 생명을 겨우 붙잡아둔 내가 할 수 있는 다음 일은 보호자들을 위해 더욱 자주 면담을 하고 환자를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넋두리를 자주 들어주고,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고, 면회를 허락해주고, 그 과정에서 가족들이 환자에 대한 마음 정리를 하도록 도와주는 것. 그게 의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이 글은 이전에 읽었던, 자가호흡을 하지 않는 환자에게 의료기기를 달고 있게 하는 것이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는 것이기에 의료연명결정에 대해 찬성하는 책과는 조금 다른 맥락으로 다가오는 책이다. 의사와 간호사의 차이일 수도 있고, 가치관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박광우 교수는 환자뿐만 아니라 보호자도 생각했기 때문에 ‘잘 간병할 것’이 아니라 ‘잘 헤어질 것’을 조언하는 의사였다.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그때는 미처 몰랐던 감사를 느끼게 되었다. 병원이 진료를 하는 시간에는 얼마든지 면담은 가능하다며 매번 희망을 가지고 묻는 똑같은 질문에도(아빠가 깨어날 수 있을까요, 아빠의 초점이 돌아올 수 있을까요, 아빠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아빠가 걸을 수 있을까요, 아빠가, 아빠가, 아빠가...) 물론 희망적이지는 않았지만 짜증 한번 내지 않고 들어주고 차근차근 설명해주기도 했던 아빠가 처음에 입원했던 병원의 주치의와 지금 재활병원의 주치의에게.
지금 나는 아빠의 산업재해를 신청하고 서류를 취합하는 과정에서 아빠의 행적을 함께 걷고 있다. 아빠가 쓰러진 전날까지 한 일에 대해 전부 정리가 되어있고 일 처리가 되어있는 것을 보면서, 아빠는 이럴 줄 알았을까. 몰랐겠지. 다음날이 되면 얼굴을 맨손으로 부빈 후 피곤한 얼굴로 집을 나섰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하면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엉엉 울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포스팅을 하는 오늘 오전에 무안공항에 착륙하려던 비행기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이유들로) 동체 착륙 후에 폭발하여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다. 우연히 탑승객 명단을 보게 되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어떤 사고를 접하고 눈물이 난 건 처음이었다. 연말이다. 2024년의 끝은 어떻게 보낼 것인지, 다가오는 2025년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하다못해 집에 갈 때 차가 많이 막히겠네, 내일 출근하기 싫다, 오늘 저녁은 뭘 먹지-를 생각했을 그들이었을 테다. 그들의 여행 기록은 핸드폰과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긴 채 영원히 봉인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사고가 잘 수습되고 실종자도 모두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