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요양원으로 출근합니다
김혜숙 지음 / 피톤치드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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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은 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요양원이라는 곳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가 작년에 요양원이라는 곳에 처음으로 직접적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쓰러진 뒤에 중환자실에서 나와 일반 병동에 있으면서 내과적 안정이 되면 가야하는 곳을 알아보던 중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당연히 재활병원으로 가야했지만 내과적 안정이 됐다하더라도 무의식의 와상환자를 받아줄 재활병원은 거의 없었고 병원에서만 뭉개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알아봤었는데 재활병원 외에 요양병원, 요양원이라는 선택지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서는 적극적인 재활이 불가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포기했었다. 뿐만 아니라,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이라는 단어가 주는 거부감은 어마어마했고, 찾아볼수록 부정적인 면에 몸을 떨었다. 사회적 약자를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는 구조가 있다면 그건 바로 요양원이라는 확신을 그때 가졌다. 그렇다고 재활병원이 믿을만했냐, 그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사방팔방 알아보고 여기저기 구걸한 결과, 아버지는 회복기 재활병원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흔히들 재활병원에서 더 나아지지 않으면 가정간병을 하거나 요양병원, 요양원으로 옮길 수밖에 없다고 한다.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시간이라는 것이 있고, 아버지는 점점 더 나아지고 (믿고) 있으니 조금 더 파이팅을 외쳐보고 있다. 사실 걱정이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에 안절부절하지 않으려고 무진장 노력을 하고 있다. (물론 잘 안되어서 재활의지가 약한 아빠가 미워질 때도 많지만) 하지만 한편으로는 100%의 회복을 바라는 게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30%만이라도 올라온다면 퇴원을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그만큼이라도 따라와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여전히 요양원이라는 곳이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싶으면서도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요양원에도 따듯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싶어서였다. 요양원에 대한 기사나 영상을 보면 정말 저게 사람 대 사람으로 저런 짓을 해도 되는지,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저러한 대우를 받는 것이 마땅한지에 대해 분노를 하게 만드는 일들이 정말 많았다. 그래서 요양원이라고 했을 때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요소는 전혀 없었다. 그런 요양원에 매일 출근한다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일들이 있는지가 궁금했다.



책의 저자는 인천에 새소망요양원과 클래상스요양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혜숙 씨였다. 요양원에서의 일상이 잔잔하게 쓰여있는 것들을 보면서 정말 이런 요양원이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고, 이게 진실이라면 그 요양원에 있는 어르신들은 웃음이 가득할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그러다가 뒤로 갈수록 종교적인 부분이 깊게 관여가 되면서 책이 마무리되는데 자칫 그게 부담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요양원을 시작한 계기로 접근한다면 크게 개의치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63. 이름을 부르는 일은 사람을 구별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름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지표이고 그 사람의 존재감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을 존중해 주고, 그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일이다. 그 사람과의 관계를 구체화하고 서로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특별함을 느낀다. 이름을 부르면서 관계의 질이 높아지고 서로가 더욱 가까워지게 된다. 또 이름을 자주 부르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 그 사람의 변화나 감정에도 더 민감해진다. 이름을 불러주는 사소한 일로 관계의 본질을 다질 수 있다.


아버지는 재활병원으로 옮기기 전의 짧은 시간 동안 총 네 명의 간병인이 바뀌었다. 그중 세 번째 간병인이 아버지를 어르신이라 하지 않고 꼭 “필수 씨”라고 불렀다. 비록 무의식 와상이었지만 그분께 케어를 받을 때의 아버지는 한결 편안해보였다. 그래서 그분을 오래도록 쓰고 싶었지만 개인 간병인 탓에 만만찮은 간병비용에 고민 중이기도 했고, 당시 환자 3-4명을 담당하지만 꼼꼼하게 해주는 공동간병인 자리가 어렵사리 비어 그 간병인과의 작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불러주던 그분의 음성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아마 그분도 이름을 불러주는 것에 대한 효과를 잘 알고 있던 분이 아니었을까.



시대상의 반영과 동시에 아버지의 일로 노인복지에 대한 관심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나 역시도,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공부해보고 싶은 분야로 떠올라서 관심이 많아졌다. 노인복지, 많이 힘든 일이겠지만 따뜻한 마음들로 인해 외롭고 아픈 노인들의 마음의 씨앗에 새싹이 돋기를 간절히 바란다.





책 속의 밑줄


61.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내 삶의 중심은 크게 바뀌었다. 물질과 거트로 보이는 것을 쫓던 삶을 돌아보며 진정한 가치는 보이지 않는 곳에 더 있음을 깨달았다.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단순하지만, 소중한 루틴을 지켜나간다. 나이 듦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오지만, 그 방식을 선택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나는 나만의 루틴으로 매일의 삶을 다듬고 있다.

작고 소박한 루틴 속에서 나는 행복을 발견한다. 나누는 기쁨과 어르신들과의 교감, 기도로 이어진 하루는 나의 삶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는다. 내 하루는 단조롭지만, 그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112. 죽음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중요한 과정이다. 그래서 나는 이 요양원이 단순히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가 아니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존중받고, 겸허히 그 순간을 맞이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122-123. 아직도 우리나라는 돌봄을 비생산적인 일, 허드렛일, 여자가 집에서 공짜로 하는 일로 취급하는 게 일반적이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그의 취약한 부분을 바라보고, 삶의 방식을 응원하며, 때로는 삶의 끝을 배웅하는 일이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그의 기분을 살피고, 몸을 살피고, 하루를 살피는 일이다. 돌봄은 아이나 노인, 아픈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누구나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기꺼이 누군가를 돌보고 있고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고 있다.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이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스승이다.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떠나는 분들이 두렵지 않도록 도우며 우리 삶의 가치를 알게 해주는, 참된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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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공부의 힘 - 짠테크, 부업, 자본소득으로 벗어난 경제 지옥 탈출기
인생업(임승현) 지음 / 성안당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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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은 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나는 너무 당연하게도 돈에 대한 욕심이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돈은 많으면 좋지, 하지만 지금도 괜찮아.”라고 말해왔으니까. 그것은 착각이었다. 내가 어딘가에 소속되어 근무를 하고 있고 약속된 날짜에 급여가 입금되기 때문에 크게 느끼지 못했던 것뿐이었던 것이다. 근로계약서를 쓸 때마다 PJT를 고집했고 만료가 되면 (내가 거주하는 지역에 현장이 없기도 했지만) 더 이상 연장하지 않고 실업급여를 받으며 당분간 휴식을 취했다. 그래서 어떤 명목이든 다달이 ‘나를 위한 급여’는 꼬박꼬박 입금되었다. 어차피 내 급여에서 지출되는 것은 용돈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저축이었기에 돈의 액수는 상관이 없었다. 계약만료 후 몇 번의 실업급여를 받기는 했지만 그것을 달에 꽉 맞춰서 받아본 적은 한번도 없을 정도로 나는 구직에 열정적이었고 때마다 이직을 했었다. 


그러다 문득 좀 다르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현재 내가 몸담고 있는 건설경기는 연쇄 도산을 하게 되며 침체되었고 내년까지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2008년에 건설경기가 어려워질 거라는 전망에 다니던 학교를 휴학했었는데 그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 같아서 스스로 위축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 달에 꼬박 들어오던 월급이 없어진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작년부터 고민해왔던 주제였다. 다른 파이프라인을 만들자!였는데, 무엇을 해야할지 막연했다.


나는 30대 후반 여성치고는 급여가 많은 편에 속한다. 그래서 불과 1-2년 전 한국어교원자격증이나 독서논술지도사를 이용해서 직업을 바꾸려고 시도했을 때, 급여가 ¼-⅓로 줄어드는 걸 보면서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몸값이 올라간 지금, 다른 경로로 틀어버린다는 것 자체가 모험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 나는 좀 더 지금에 집중하기로 했다. 바운더리를 넓히기 위해 다른 기사자격증을 취득하기로 하고 그 목표를 이루면서 이제는 다른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 혹시라도 내가 가진 자격으로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생길 때, 망설임 없이 다른 직업으로 전향할 수 있는 발판을 갖추기 위해서.



책의 저자는 내가 막연하게 두렵다고 느꼈던 일을 실제로 겪었다. 후배가 의도적으로 접근한 일에 휘말리게 되었고 못 본 척 눈을 감을 수도 있었지만 빚을 떠안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회사에는 권고사직의 바람이 불어닥쳤는데 저자는 살아남았지만 미래가 불투명해진 상태가 되다보니 돈에 대한 깊은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퇴근 후 3시간을 자기 계발을 위해 사용했다는데 이 부분에 굉장한 경외심을 느꼈다. 이직 후 어느덧 3달째가 되었지만, 퇴근과 동시에 체력이 바닥이 나서 비실비실 말라비틀어진 나를 마주할 때면 한숨이 폭폭 쉬어져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영양제를 쑤셔넣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는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아서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한다.


책에서 저자는 재테크의 시작은 나의 재정 상태를 아는 것과 소비 패턴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들이지만, 가장 기본적인 이것들을 파악하고 접근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게 사실이다. 한 예로 나의 직장동료 중 20대 중반의 남성은, “명품시계를 차고 벤츠를 타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그는 이전에 몇 백을 잃은 뒤로 이제는 코인을 하지 않고 주식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코인이나 주식으로 돈을 번 사람들을 매우*α 부러워한다. 그의 주변에는 코인이나 주식으로 인한 한방을 노리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도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이 책을 그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도 드는데, 이게 어떤 의도로 다가갈지 몰라 조금 망설여지기도 한다.


그외에 저자는 확실한 나만의 콘텐츠가 있어야한다고 말하면서 그것들을 한껏 발휘해야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아무리 고민해도 자신 있는 콘텐츠가 없다면, 한 분야를 단기간에 집중해서 배우고 익혀 중급자가 되어보라고 한다. 중급자가 되기까지는 3-4개월이면 충분한데, 그정도는 자신에게 투자할 가치가 있지 않느냐면서. 무척 공감되는 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문장은 내가 좋아하게 된 문장이다. 무언가를 지향한다면 스스로를 일으켜 뭐라도 해야한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과 해야하는 일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나의 가치를 높이는 동시에,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알아줄 필요도 없는 ‘쓸모없지만 하고 싶은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도 시간을 써야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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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보기 부끄러워 묻지 못한 생활 속 소송상식 - 소송의 기초부터 실제 사건 대처법까지 누구나 알아야 하는 소송상식 A to Z
추헌재 지음 / 새로운제안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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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이제는 웬만해서는 말할 수 없다. 혹자는 법에 저촉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하는 이도 있겠지만, 우리는 대부분 법에 저촉될 수밖에 없는 상태로 살고 있다. 무단횡단을 하는 것도, 불법주정차도, 누군가에게 공개적으로 욕을 하거나 험담을 하는 것도, 누군가의 동의 없이 함부로 전화번호 등 개인정보를 알려주는 행위 또한 모두 법에 위반되는 상태임을 모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법을 처음 알게 되었던 때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고등학교 1학년, 자리에서 일어나 대한민국헌법을 강제로 외워야만 했던 때가 생각난다. 그리고 법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고 살다가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법에 대해 알아야하는 순간들도 있었다. 늘 다른 법을 살펴봐야 했지만 법을 찾아보는 순간들은 한 번도 빠짐없이 부정적인 상태에 놓여있을 때였다. 민사든 형사든 법적 분쟁이 일어나게 되면 일단 긴장을 하게 된다.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있느냐, 그리고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천차만별로 달라지니까.

책에서는 우리가 경험해보기 전에 일상에서는 제대로 구별하지 못할 수 있는 법률용어들, 이를테면 신분이나 상태를 나타낼 수 있는 피고소인, 용의자, 피의자, 피고인 등을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또 소송의 종류에는 민사와 형사를 구분하고 조금 더 세밀하게 알려주고 있다.

초반에 내용증명에 관한 내용이 나왔다. 나는 이제껏 총 세 번의 내용증명을 보내봤다. 내용증명은 소송 전 최후통첩으로 보내는 것인데, 내용증명 자체로는 대단한 것은 아니다. 내 의사를 상대방에게 정확히 전달하고 이후에 확인받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지금에 와서는 카카오톡이나 이메일로 동일한 내용을 보내더라도 발신인이나 수신인, 내용, 발송일이 명확하기 때문에 같은 효력을 지닌다고 한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내용증명을 우선시했다. 까닭은 심리적 압박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 책에서는 내용증명의 예시를 보기 쉽고 깔끔하게 정리해두었기 때문에 참고해도 좋을 것 같다.

뒤로 넘어갈수록 기본적인 소송지식과 절차에 대해 알려주고 지급명령, 합의, 조정 등처럼 딱딱한 이야기들은 쉽게 풀어써내어 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이해하기 쉽게 쓰여서 부담없이 술술 읽을 수 있다. 그밖에 합의 시에 알면 좋을 팁이라든지, 상대가 돈을 안 받으려고 할 때 어떤 방법이 있는지, 현직 변호사가 알려주는 변호사 선임법 등 팁을 쏙쏙 알려주기 때문에 정말 필요할 때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나는 앞으로도 법에 대해 알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은 책임을 전제로 하고 있고 나의 자유만이 자유가 아니기에 어느 한 국가의 국민인 이상에야 법에서 떨어질 수가 없다. 또한 현재 법과 관련된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보니 전부를 알 수는 없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있을 법한 법은 알고 있으면 좋겠다는 판단이 들어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물어보기 부끄러워 묻지 못한 생활 속 소송상식>이 아니라 당연히 우리가 조금씩은 알고 있어야하는 그런 소송상식을 알려주고 있으니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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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공부 - 똑바로 볼수록 더 환해지는 삶에 대하여
박광우 지음 / 흐름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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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도저히 뭔가를 쓸 기운이 나질 않지만 지금 이 마음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를 모르겠기에 우선 써보기로 한다. 언제까지 미뤄둘 수는 없을 테니까. 죽음은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줄 알았으나 실상 죽음은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직간접적으로 죽음을 느껴본 이들의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최근에 죽음이 주제였던 간호사 수기를 한 편 읽는 것 같았던 오은경 간호사의 <언젠가 사라질 날들을 위하여>를 읽고 이번엔 말기 암, 파킨슨병에서 명의라 불리는 박광우 교수의 <죽음 공부>를 읽었다.


사실 죽음을 바탕에 깔아둔 두 편의 책을 연달아 읽는 게 조금 힘들었다. 하지만 두 권의 책 모두 생각할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에 두 책 모두 추천한다. 다만 어떤 책을 먼저 읽더라도 텀을 두고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둘의 공통점은 웰다잉을 얘기하고 있었는데, 웰빙은 곧 웰다잉을 뜻한다. 잘 산다. 잘 죽는다.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 책을 오늘에야 다 읽게 되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난 원래 몇 년 전 갑상선암을 진단받았을 때의 일을 말하려고 했다. 착한 암이라고 말하던 사람들, 그거 별거 아니라는 사람들이 생각났고 그들의 말은 미웠지만 수술 후에는 한동안 그것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체력이 조금 더 떨어졌다 뿐이지, 수술 후에 이전과 다르지 않는 생활들을 하고 있으니까.

나는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암의 크기가 0.5cm였고 왼쪽에만 있어서 반절제가 가능했으며 다행히 최소침습이 가능한 교수님이라서 흉터 역시 작았다. 임파선이나 폐로 전이된 케이스도 아니었기에 방사선치료나 항암치료도 필요하지 않았다. 흉터에 예민하지 않아서 수술 부위에 레이저 시술을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살성이 좋아서 지금은 굳이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지금으로부터 2년 후에도 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고 지금처럼 유지한다면 완치 판정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예로 회사에서 안전 교육을 할 때에도 반장님들이 잘 해서 살아있다기보다 운이 좋아서 아직까지 사고가 났더라도 살아있는 것이라 얘기하곤 했다. 그렇게 나는 이전까지 산다는 것을, 살아있다는 것을 ‘운이 좋았다’라는 말로 퉁치곤 했는데 삶과 죽음을 단순히 ‘운’으로 치부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깊은 어둠으로 나를 몰아넣는다.



52. 죽음은 생과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대부분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는 죽음을 생각하지만, 그렇지 못한 죽음이 훨씬 많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슬픔에 빠뜨린다. 그게 내가 될 수도 있고,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몇 개월 전에 아빠를 잃을 뻔했을 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얼어붙고 만다. 아빠가 쓰러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주변의 공기, 피부에 닿는 바람, 초여름이었는데도 덜덜 떨리던 몸의 진동까지 모두 기억이 난다.



147. 환자의 상태는 당장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좋지 않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그녀의 생명을 붙잡아두려 했다. 인공호흡기가 아니면 숨을 쉬지 못하고, 강심제가 아니면 심장이 뛰지 않는 환자의 생명을 붙잡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뇌사 상태를 유지하기만 하는 것이 무슨 치료냐고 누군가 비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환자가 단지 숨을 쉬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죽지 않았다는 사실만이라도) 삶의 위안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나는 이러한 치료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웰다잉은 비단 환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환자를 생각하고 기억하는 모든 보호자들이 이렇게 생을 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또 다른 의미의 웰다잉이다.

조금씩 꺼져가는 생명을 겨우 붙잡아둔 내가 할 수 있는 다음 일은 보호자들을 위해 더욱 자주 면담을 하고 환자를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넋두리를 자주 들어주고,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고, 면회를 허락해주고, 그 과정에서 가족들이 환자에 대한 마음 정리를 하도록 도와주는 것. 그게 의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이 글은 이전에 읽었던, 자가호흡을 하지 않는 환자에게 의료기기를 달고 있게 하는 것이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는 것이기에 의료연명결정에 대해 찬성하는 책과는 조금 다른 맥락으로 다가오는 책이다. 의사와 간호사의 차이일 수도 있고, 가치관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박광우 교수는 환자뿐만 아니라 보호자도 생각했기 때문에 ‘잘 간병할 것’이 아니라 ‘잘 헤어질 것’을 조언하는 의사였다.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그때는 미처 몰랐던 감사를 느끼게 되었다. 병원이 진료를 하는 시간에는 얼마든지 면담은 가능하다며 매번 희망을 가지고 묻는 똑같은 질문에도(아빠가 깨어날 수 있을까요, 아빠의 초점이 돌아올 수 있을까요, 아빠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아빠가 걸을 수 있을까요, 아빠가, 아빠가, 아빠가...) 물론 희망적이지는 않았지만 짜증 한번 내지 않고 들어주고 차근차근 설명해주기도 했던 아빠가 처음에 입원했던 병원의 주치의와 지금 재활병원의 주치의에게.


지금 나는 아빠의 산업재해를 신청하고 서류를 취합하는 과정에서 아빠의 행적을 함께 걷고 있다. 아빠가 쓰러진 전날까지 한 일에 대해 전부 정리가 되어있고 일 처리가 되어있는 것을 보면서, 아빠는 이럴 줄 알았을까. 몰랐겠지. 다음날이 되면 얼굴을 맨손으로 부빈 후 피곤한 얼굴로 집을 나섰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하면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엉엉 울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포스팅을 하는 오늘 오전에 무안공항에 착륙하려던 비행기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이유들로) 동체 착륙 후에 폭발하여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다. 우연히 탑승객 명단을 보게 되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어떤 사고를 접하고 눈물이 난 건 처음이었다. 연말이다. 2024년의 끝은 어떻게 보낼 것인지, 다가오는 2025년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하다못해 집에 갈 때 차가 많이 막히겠네, 내일 출근하기 싫다, 오늘 저녁은 뭘 먹지-를 생각했을 그들이었을 테다. 그들의 여행 기록은 핸드폰과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긴 채 영원히 봉인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사고가 잘 수습되고 실종자도 모두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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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사라질 날들을 위하여 - 수만 가지 죽음에서 배운 삶의 가치
오은경 지음 / 흐름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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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올해 ‘죽음’에 대해 좀 더 집중했다. 나는 이전까지 준비된 죽음을 생각해왔지만, 세상에 준비된 죽음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재작년에 외할아버지를, 작년에는 외할머니와 시외할아버지를 여의었다. 세 분 모두 각별히 좋아하던 분들이었기에 그 상실감으로 몇 날 며칠을 힘겨워했었는데, 올해 아빠를 잃을 뻔했던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어릴 적부터 엄마를 잃는 꿈을 많이 꾸었다. 엄마가 집을 나가거나 엄마가 없어지거나 엄마가 세상에 없는 그런 꿈들. 그런 꿈을 꾸면 자다 일어나서 엉엉 울면서 엄마를 찾아 엄마에게 파고들어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다 잠이 들었다.


내가 꿈에서 잃는 대상이 아빠는 아니었다. 그것도 그렇게 갑자기. 주치의로부터 아빠가 깨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아빠의 눈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멈추어버릴 것 같은 순간들을 지나왔다. 아빠는 깨어났고, 오랜 시간 동안 초점이 맞지 않았던 눈도 돌아왔고, 지금은 우리를 보며 웃고 인사도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아빠가 말을 못 할 수도 있다는, 아빠가 걷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어도 전처럼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아빠가 언젠가는 해낼 것을 알고 있고 아빠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빠는 조금 많이 느리고 더딘 것뿐이지, 분명히 갈 때마다 아빠의 발전된 모습들을, 우리는 볼 수가 있으니까. 인내심이라고는 전혀 없던 우리는 아빠를 통해 인내심을 배운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아빠가 내 곁을 떠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막연했던 죽음의 실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 달 전 해외여행을 앞두고 나는 온 집안을 다 끄집어내어 정리했었다. 혹시라도 내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인데, 그때 내가 아닌 다른 이가 지저분한 우리 집을 본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용케 살아서 이 글을 작성하고 있기는 하다. 내가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두렵지 않은데, 내가 죽고 난 뒤에 나의 모든 것들이 거리낌 없이 발가벗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늘 있었다. 올곧게 살아오지 못해서일까.


지난번 어디선가 지인의 죽음을 통해 내가 살아있음이 감사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걸 겉으로 표현하는 건 조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서 나는 그 글자 하나하나가 굉장히 섬뜩하게 느껴졌다. 타인의 죽음 위에 쌓는 감사라니. 그런 감사가 진실한 감사가 맞을까. 모든 것이 두려워졌다. 그러면서 최근에 들은 말이 생각났다. 누군가가 엄마에게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아?”라는 말을 직접 들었다고 했는데 더 기가 막힌 건 몇 년 전에 본인도 엄마가 편찮으셔서 돌아가셨다는 것, 그리고 그걸 자기 딴에는 위로라고 얘기했다는 점이었다. 엄마가 그 여자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아 수소문 끝에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평소 욕을 거의 하지 않는 나지만 전화를 걸어 얘기를 듣다가 끝내 씨발년아, 라고 시작하는 값싼 문장들을 구사했었다. 말로 인해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충동을 살면서 처음 느껴봤다. 뱉은 것보다 훨씬 더 큰 벌을 받기를 바란다.



죽음에 집중해서 글을 쓰다보니 말이 자꾸만 새서 커피를 타서 자리에 앉아 다시 책으로 돌아가본다. 저자는 서울대학교병원에서 38년간 간호사로 근무한 이력이 있다. 응급실, 보라매병원 행려병동, 신경외과, 외과, 성형외과, 재활의학과 등 다양한 병동을 거치면서 삶과 죽음의 본질을 직접 마주한 이야기를 보면서 생각보다 사는 게 녹록지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는 것은 분명 성스러운 축복이었을 텐데 죽는 것은 그와 별개로 너무 쓸쓸하고 처참하게 느껴졌다. 많은 이유로 태어난 생명체는 언젠가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죽음 자체가 아름답지 못하니 죽음에 대해 반감이 생기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책을 덮고 나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연명의료결정법이었다. 연명의료결정법은 2018년에 시행되었는데 시행착오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환자가 연명의료를 하지 않겠다고 동의를 했더라도 보호자가 극구 해달라고 한다면 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 부분에 대해 나도 남편이랑 얘기를 나누었다. 우리 둘 모두 각자 연명의료를 하지 않겠다는 쪽이 거의 100%였다. 하지만 상황이 닥쳤을 때 남편의 의사를 오롯하게 받아줄 수 있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금만 더요, 한 번만 더요,라고 간곡하게 외치고 있을 내가 너무 당연하게 떠오른다. 


그런 보호자들로 인해 환자의 존엄과 결정권은 사라져간다는 글이 책에 실려있는데 과연 그 말이 맞는 걸까.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의료진들은 그런 경험을 수없이 해보았으니 이렇게 해서도 가망이 없다는 것들을 판단할 수 있겠지만, 보호자는 그런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조금만 더 하면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입장도 너무나도 이해가 된다. 또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붙잡고 싶어하는 마음 역시 너무 절절하게 이해가 간다. 전에 아빠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아빠만 버텨준다면. 그리고 힘을 내준다면. 나도 끝까지 버틸 수 있다. 그때 나의 아빠는 간헐적으로 눈만 뜨고 내내 잠만 잘뿐, 살았다고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도 그랬다. 그게 보호자 마음이다. 어떻게든 살리고 싶고, 어떻게든 곁에 두고 싶은 마음. 비록 그게 이기적이라고 말한대도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다. 나는 아빠 덕분에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졌고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함부로 추측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오늘도 모든 이들의 안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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