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지 않은 쌍둥이 - 프란츠 카프카 x 에곤 실레 세계문화전집 2
프란츠 카프카.에곤 실레 지음, 홍선기 엮음 / 모티브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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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기회가 좋아 모티브 세계문화전집1이었던 『안부를 전하며 : 헤르만 헤세 X 빈센트 반 고흐』를 아주 진득하게 취해서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만나지 않은 쌍둥이 : 프란츠 카프카 X 에곤 실레』를 곧이어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프란츠 카프카는 『변신』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고, 에곤 실레의 작품은 여러 번 보았었는데, 그 그림이 에곤 실레라는 것을 인지하게 해준 것은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인 『인간 실격』(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표지였다. 당시 『인간 실격』을 다 읽고 나서 표지를 봤을 때 주인공이었던 오바 요조와 너무 비슷했고, 『인간 실격』이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임을 알게 되면서 오히려 내게는 ‘다자이 오사무 X 에곤 실레’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했었는데 ‘프란츠 카프카 X 에곤 실레’라니! 프란츠 카프카와 에곤 실레의 공통점은 도대체 무엇일까? 어째서 둘의 조합일까?



프란츠 카프카 1883.07.03 ~ 1924.06.03

에곤 실레 1890.06.12 ~ 1918.10.31



만나지 않은 쌍둥이라는 말이 꼭 맞을 정도로 동시대를 살았지만 만나지 않았던 둘의 공통된 속성은 아버지로부터 나온다. 프란츠 카프카에게는 ‘살아 있는 권위’로, 에곤 실레에게는 ‘죽은 공포’였던 아버지로 하여금 내 몸은 정말 내 것인가? 아니면 가족과 사회와 국가에 의해 점령당한 영토인가?라는 질문에 카프카는 문장으로 썼고, 실레는 붓으로 그렸다.



카프카가 『변신』 초고를 집필하던 같은 해에 에곤 실레는 외설 화가로 불리며 감옥에 갇혔다.



서른여섯 살의 카프카는 「아버지께 드는 편지」로 책 한 권 분량의 편지를 썼지만 끝내 부치지 못했다. 그 편지에는 어느 밤에 카프카가 물을 달라며 칭얼대자 아버지는 카프카를 침실에서 끌어내 안마당으로 통하는 발코니에 내놓고 문을 잠근 어린 시절의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심판』, 『변신』, 『성』 모두 발코니에 서 있던 아이의 또 다른 형태로 느낄 수 있다. 이 사실을 알고 『변신』을 다시 읽으니 이전에 읽을 때보다 깊이 그레고르 잠자를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벌레가 되어버린 그레고르 잠자는 카프카였고, 그가 느꼈을 상처가 그런 것이었겠구나, 하며.


아버지의 매독에서 퍼져나간 죽음의 행렬을 경험한 실레는 거울 앞에서 자기 몸을 평생 반복해서 그렸다. 십 대 소녀들을 모델로 쓰기도 했고 한 소녀의 아버지가 실레를 신고하면서 경찰은 작업실에서 100점이 넘는 실레의 그림을 외설물로 간주하고 압수하게 되었다. 유괴와 유혹 혐의는 모두 기각되었지만, 미성년자가 접근이 가능한 장소에 외설적 그림을 전시한 죄가 유죄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재판 당일에 판사가 실레의 압수된 그림 중 한 점인 허리 위로만 옷을 입은 어린 소녀를 그린 그림을 법정에서 촛불로 태워버렸고, 실레는 눈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이 불이 타는 모습을 또 보아야만 했다. 또 실레는 자화상을 100점을 그렸는데 스스로를 찢고 비틀고 해부하는 그림이었다. 바로 그것이 그가 본 진실,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난 카프카와 실레를 왜 같은 선상에 두었는지, 쌍둥이라고 표현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각자가 가진 상처를 펜으로, 붓으로 마음껏 표출했다. 발가벗기고 찢어버리고 죽여가는 자기를 쓰고 그리면서 그들은 홀가분했을까? 아닐 것이다. 그런 모습을 한 자신의 모습이 더 참혹하게 다가왔을 것이고 끝내는 가엾은 자신들을 안타까워하며 안아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글과 그림 속에서 자신을 죽이고 또 살렸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을지, 짐작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당신은 숨은 곳에서 구원을 찾았습니까, 아니면 구원을 피해 숨었습니까? 이 질문에 난 입을 굳게 다물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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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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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내가 사는 지역에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레플리카展을 전시했고 다녀왔다. 페르메이르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북방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다. 그 작품은 1665년경에 그려졌고, 현재는 네덜란드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작품을 보자마자 오래전 읽었던 트레이시 슈발리에의《진주 귀고리 소녀》를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고 당시 읽고 있던 책들을 마무리한 뒤 바로 꺼내들었다.


이 책의 마지막을 덮은 후 여운이 길게 남았다. 그리고 뒤이어, 오래전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의 감상이 궁금해져 찾아봤다. 이 책을 읽은 건 2010년으로 16년이 지난 뒤에 재독을 한 것이었는데 그때의 감상을 읽어보니 당시의 나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에 아는 것 하나 없는 상태로 읽었던 게 분명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레플리카展에서 보고 큐레이터로부터 듣고 찾아보고 이 책을 읽은 지금은, 책의 어떤 부분이 사실이고 소설인지, 또 사실과 소설의 경계에 있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 알게 되어 좀 더 빠져들 수 있었다. 


​​


이야기는 그리트로부터 시작되어 그리트로 끝난다. 그리트는 가상의 인물로, 그림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의 모델이기도 하다. 그리트가 타일공인 아버지가 불운한 사고로 실직하게 되어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화가 페르메이르의 저택에 하녀로 들어가게 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녀에게 페르메이르 작업실의 청소가 주어졌고 화가의 물감을 씻고 재료를 가는 역할까지 도맡게 된다. 136. 나는 점점 그와 함께 있는 것에 익숙해졌다. 가끔 우리는 작은 다락방에 나란히 서서, 내가 백연을 갈고 있는 동안 그는 청금석을 씻거나 황토를 불에 구웠다.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나 역시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창으로 쏟아지는 빛 속에서 흐르던 그 시간들은 평화로웠다. 일을 끝내면 우리는 서로의 손에 주전자로 물을 부어주며 씻었다. 이야기는 아주 천천히, 고요하게 흘러간다. 평소의 나는 상황을 반전시키거나 급박하게 흘러가는 걸 기대하는 편인데, 이상하게도 이 침묵과 고요함이 지루하거나 답답함을 느끼지 못했다.



​235-236. “네 주인은 특별한 사람이야.” 반 레이원후크는 계속 말했다. “그의 눈은 황금으로 가득 찬 방만큼이나 가치가 있지. 그러나 가끔은 그도 자기가 그랬으면 하는 세계만 보곤 해. 실제로 세상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야. 자기의 그런 시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초래한 결과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아. 그는 오직 자기 자신과 자기 작품만을 생각한단다. 네 생각을 하지는 않아. 그러니까 너는 조심해야……” 반 레이원후크가 말을 멈췄다. 그의 발소리가 계단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무얼 조심해야 하나요?” 나는 속삭였다.

“너 자신으로 남아 있도록 해라.”

나는 턱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하녀로 남아 있으란 말씀입니까?”

“그런 말이 아니야. 그의 그림 속에 있는 여자들…… 그 여자들을 그는 자기의 세계에 가둬놓고 있어. 너 역시 거기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어.”


진주 귀고리를 하기 위해 피부를 마비시키는 정향유를 이용하여 귀를 뚫는 모습은 마치, 소녀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는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는, 그리트를 사랑했던걸까? 그 대답은 여전히 알 수가 없고 할 수도 없다. 그에게 그리트는 그저, 그의 그림을 완성시켜줄 진주 귀고리에 불과할 뿐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후로 페르메이르에 대해 찾아보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심지어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뿐만 아니라 작품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가 누굴 그린 것인지, 어떤 연유에서 그려진 것인지에 대해서도 명쾌한 답변을 찾지 못했다. 페르메이르에 대해 알려진 게 많지 않다는 건 그만큼 상상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기 때문에 작가는 오히려 더 좋은 일이라 하였다. 그렇기에 이런 이야기가 탄생했는지도 모른다. 그리트의 시선에서 참, 애달프게 읽었다. 그녀 손에 쥐여진 5길더는 영영 열리지 않을 것이다.




책 속의 밑줄_


​271. 결심을 했을 때, 나는 알았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선택임을. 별의 한 꼭지점에 주의 깊게 발을 딛고, 그 길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는 어김없이 걸어갔다.


284. “그래, 인생이란 한바탕 연극과 같은 거야. 자네도 오래 살다보면 놀랄 일따위는 없을 걸세.”


292. 이제 내게는 설명할 수 없는 오 길더가 더 있는 셈이었다. 나는 동전 다섯 개를 빼내 손바닥 안에 꽉 쥐었다. 피터와 아이들이 볼 수 없는 곳에 숨겨두리라. 오직 나만이 아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그런 장소에.

나는 이 다섯 개의 동전을 결코 쓰지 못할 것이다.

피터는 나머지 돈을 보면 기뻐하겠지. 빚이 깨끗이 청산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 역시 피터에게 더는 치를 것이 없었다. 한 하녀가 비로소 자유를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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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
김숨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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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재 철거 현장의 한복판에 오도카니 서있다. 한 달 전쯤 벌목작업을 했다. 나무가 베어질 때에 나는 나무가 아닌 사람의 안전에 신경을 썼다. 안전하게 벌목을 하려면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나의 업무였다. 벌목 시 나무 높이의 2배 반경에 동시 작업 금지할 것, 수구 각도는 30도 이상, 수구 깊이는 뿌리 지름의 1/4~1/3에 수구 작업을 할 것. 수구 절단부보다 나무 지름의 10분의 1정도 높은 위치에 만들어 추구작업을 하고 틈 사이에 쐐기를 박을 것. 다른 작업자 유무 확인 후 신호수의 신호에 따라 나무 넘길 것. 방식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그렇게 작업이 시작되었다. 



나무가 베어지는 걸 봤고 그루터기를 뽑아내고 뿌리가 뽑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어디에서도 흔히 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나는 죽어가는 나무를, 그리고 죽어버린 나무를 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소생을 빌었다. ‘다시 살아나.’ 하지만 나무는 살아나지 못했고 살아날 수 없었다. 임목폐기물로 분류되어 화물차에 실리는 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 나무들은 어디에 갈까.




45. 뿌리마다 특유의 냄새가 있어. 당신 겨드랑이처럼 습한 땅에 내려 물기를 흠씬 머금은 뿌리는 냄새가 짙고 깊어. 강요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침묵에 잠기게 하는 냄새야…… (…) 날이 밝으면 청계산으로 뿌리를 찾으러 갈 거야. 그곳에 가면 굴삭기에 뿌리가 들린 나무들이 지천으로 널렸을 거라고 하더군. 도로를 놓으려고 산을 파헤치고 있나봐. 그곳에 내가 찾는 뿌리가 있을지 모르지, 내가 그토록 그리는 표정을 짓고 있는 뿌리가……



김숨 작가의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 <뿌리 이야기>, <슬픈 어항>은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같은 존재론적 이야기로 연작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책을 읽으며 내가 목격했던 나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고 나의 뿌리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다. 나는 결혼을 하면서 또 이사를 하면서 나의 뿌리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졌다고 생각해왔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결국 나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한자리에 뿌리를 내리며 살고 있는 거였구나. 죽기 전까지 영영 벗어날 수 없는. 너무나도 싫어서 그 뿌리를 다 잘라내버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는 걸 최근에 다시 한번 느끼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더 여실히 깨달아야만 했다. 나는 나의 뿌리를 옮기려 얼마나 부단히 노력했던가 생각해보면 허탈감에 진이 다 빠져버려서 무엇도 하고 싶지가 않아졌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

내가 왜 없는 게 아니라 있는가

나무들도 스스로에게 묻고는 할까



나에게 이 책은 참 어렵게 다가왔다. 이해될듯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그어진 선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연달아 바로 읽어볼까 싶었는데 약간의 텀을 두고 다음에 다시 찾아 읽기로 하고 약간의 미련을 남긴 채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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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은 마흔이 되고 싶어 -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오즈 마리코 지음, 양수현 옮김 / 시원북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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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우습지만, 나는 20대 후반부터 마흔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블로그 곳곳에 마흔에 대한 로망을 엿볼 수 있다. ‘마흔이 되면’이라고 종알거려왔지만 그렇다고 마흔이 되면 딱 이걸 해야지라고 정해두진 않았다. 그런 내가 마흔을 목전에 두고 있다. 누군가 내게 나이를 물으면, “곧 마흔이에요.”라고 대답한다. 10년도 넘게 로망으로 품고 있었기에 안달이 날법도 한데, 크게 안달나거나 조급해지지 않으며 아쉬운 마음도 없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면 내가 중학생 때 엄마는 마흔을 맞이했다. 그때 나는 엄마가 마흔이라며 얼마나 울었던가. 그런데 내가 그 나이를 가지게 됐다니. 그나저나 마흔이라는 나이를 가지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어떤 기분이긴, 지금과 별다를 거 없는 기분이겠지! 간질간질한 느낌이 기분 좋게 다가온다.



책 《기분 좋은 마흔이 되고 싶어》는 일본 3040 독자를 매료시킨 오즈 마리코의 달콤하고 쌉쌀한 에세이로, 마흔이라서 하고 싶은 게 더 많아졌다는 에너지 가득한 만화책이다. 책을 재미있게 읽고 덮었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즈 마리코의 마흔은 더 ‘나’ 같아졌구나. 언젠가 갖고 싶었던 다이닝 테이블과 텀블러를 구매하고, 빨간색 전기포트를 구매하고, 금전 감각도 재설계하며 돈을 어디에 쓰고 싶은지에 대해 천천히 생각해보기도 하고, 고양이와 가족이 되고, 무채색의 옷 대신 컬러풀한 옷을 선택하기도 하고, 투톤으로 염색도 하고, 혼자 오키나와로 여행도 가고, 숙면을 위해 잠옷을 사고, 초록의 식물들을 집에 들이고, 혼자 영화를 보고, 춤도 추는 마흔. 마흔이라는 나이는, 나를 찾아가는 나이구나.


짧은 만화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깊이 와닿은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을 수는 없겠지만, 같은 주제에 대해 같은 마인드인 사람과의 대화를 좋아했다. 그것을 두고 대화가 통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오즈 마리코는 말한다. “요즘은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편해졌어. 왜냐면 너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거든.” 너무나도 맞는 말이어서 한동안 멍했다. 나도 그런 마인드로 다른 사람을 대해봐야겠다는 다짐을 해봤지만, 다음날 무참하게 실패로 끝났다. 하하.



책을 읽으면서, 지금의 나와 마흔의 나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이제껏 살아왔던 대로 마흔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좀 덜어내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나는 주제에 맞지 않게 너무 많은 걸 품고 산다는 생각을 자주 하기 때문인데, 그것이 결핍에서 오는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나는 그간 나의 결핍을 외면하며 살아왔다면, 앞으로는 나의 결핍을 품고 살아갈 준비를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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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위험을 보지 못할까 - 인간의 마음과 조직의 생리를 꿰뚫는 안전 전략가로 거듭나기
진현진 지음 / 미디어스트리트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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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지금 내가 근무하는 현장은 여러 의미로 크지만 작은 현장이다. 법적으로 선임 대상의 현장은 아니지만 자격을 갖춘 안전담당자가 있어야 한다는 발주처의 요청이 있었다. 공사기간은 짧은 기간이지만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어 지원하여 근무하고 있다. 처음에는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볼까 싶어서 선택한 것도 사실이다. 몇 년 간 선임 안전관리자로 있으면서 배운 것도 당연히 많지만 이곳에서는 그와 별개로 또 다른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이 서평을 쓰는 오늘은 상대적으로 고요한 날이었다. 고요하다는 것은 크게 바쁜 일 없고 새로운 일 없이 평소와 같은 작업을 하는 날을 말한다. 하지만 이런 날은 시야가 더 넓고 깊어져야 한다. 모순되게도 긴장감이 고조될 땐 모든 것에 촉각을 곤두세우기 때문에 위험으로부터 즉각적인 대처가 가능하다면, 긴장감이 완화될 땐 위험을 마주하고도 대응에 멈칫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드나듦이 있었다는 것이다. 발주처의 총장님이 왔다 가셨고, 뒤이어 재해예방기술지도 담당자가 방문했다. 대체로 현장은 정리정돈이 잘 되어있었지만 굴착기가 지나간 구간에 살수작업을 해두었다. 발주처에서 계약한 재해예방기술지도 담당자는 이 현장은 무결점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나는 어떠한 점검을 받을 때 내가 보지 못한 결점을, 위험을 찾아주기를 항상 바라왔다. 현장에서 완전히 없앤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숨겨둔 위험을 누구도 아닌 내가 알고 있었고 타인의 눈을 통해 나의 취약점이 드러나기를 소망했다. 그 외에 내가 몰랐고 간과해서 놓쳐버린 위험을 마주하면서 나의 오만으로부터 벗어나 한계를 느끼면서 성장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타인에게서 듣는 무결점이라는 단어가 자랑은 아니었다. 나는 가늘게 숨을 고른다.


직업이 직업이다보니 안전과 위험에 대해 자주 생각하며 산다. 이번에 읽은 책은 <왜 위험을 보지 못할까>는 안전이라는 직무를 직접적으로 가진 내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었다. 저자의 취지대로 이해를 올바르게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리는 식의 책 읽기를 선택했다.




책에서는 사고를 일으키는 심리적 요인으로 다섯 가지를 말하고 있다.

착각 : 눈 앞의 위험을 지워버리는

군중 : 개인을 눈먼 추종자로 만드는

마음 :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결정하는

성과 : 실적 뒤에 숨은 위험

조직 : 개인을 지배하는 시스템의 힘



저자는 이 다섯 가지 요인을 쉽게 풀어내며 구체적인 실험 과정과 결과를 넣어 이해를 돕고 있다. 덕분에 안전을 잘 모르는 일반인도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다만 책을 읽으며 내가 근무했고 근무하고 있는 현장과 오버랩을 하다보니 접점이 없는 곳도 있어서 아쉬웠으나 현장이 다 똑같을 수는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 책을 읽으며 몰랐던 사실들, 알면서도 간과했던 사실들을 마주할 수 있어서 굉장히 유익한 시간이었다. 특히나 사고가 없어서 상을 주는 게 아니라 위험을 많이 찾아내서 상을 주는 구조로 바뀌어야한다.는 말은 나 역시도 무척 공감한다. ‘사고가 없다’는 말은 표면적으로는 감탄사를 내비칠 수 있는 말이겠으나, 그 속에 숨겨진 아차사고를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위험을 발견하고 드러내어 시정조치하는 유결점의 안전이 우리를 살릴 수 있다.




책에 쓰인 그대로 “나 말고도 본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누군가 조치하겠지.” “다들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걸 보니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닌가 보다.”식의 대응을 많이 보는데, 근로자들은 대체로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니라 관리자가 해야하는 일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근로자 스스로 조치를 해준다면 무척이나 감사한 부분이지만 개구부 위에 합판이나 라바콘을 놓는 아주 간단한 것들이 아니면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일도 있기 때문에 본연의 일에 충실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혹은 그걸 왜 니가 하냐 라는 등 작업팀장들한테 꾸지람을 듣는 일도 분명 있다. 그런 상황에서 근로자 스스로 안전을 책임지게 만드는 것 자체를 현실적으로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TBM 시 관리자가 현장을 돌아봐도 실질적으로 일하는 반장님들보다 시야가 좁을 수 있기 때문에 작업을 하시다가 불편하거나 위험한 부분이 있으면 관리자에게 전달하면 즉시 조치하겠다고 말한다.




22. 우리는 안전을 위해 안전모를 써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실제 작업 현장에서 습기와 더위가 몰려오면 슬그머니 안전모의 턱끈을 푼다. 이것은 근로자가 나태해서도, 안전의식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익숙한 작업에서는 위험신호를 배경 소음으로 처리해 버리는 ‘주의력 결핍’과 ‘습관’ 때문이다. 이러한 불완전함은 교정해야 할 ‘오류’가 아니라, 우리가 안고 가야 할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그렇다고 불완전하다고, 인간의 본성 때문이라고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안전을 관리하고 책임져야 하는 리더 또는 관리자로서 방임이자 직무유기이다. 우리가 이 불완전함을 집요하게 파고들어야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현장에서 직접 근로자를 관리하다보면 그들이 이전에 어디에서 일을 했었는지가 보인다. 실제로 대기업 현장 경험이 있는 근로자들은 안전모를 벗으면 쓰리아웃, 투아웃, 원아웃까지 당하는 제재를 경험했기에 근무 중에 안전모를 벗으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이제까지의 현장 경험과 데이터에 비추어볼 때, 안전모 착용에 관한 건은 근로자가 처했던 환경과 그로 인해 축적된 안전의식 차이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현장에서 안전모 턱끈 미착용 정도는 계도에서 끝내기는 하지만, 아예 안전모를 쓰고 다니지 않으면 근로자, 관리자, 발주처를 막론하고 즉시 퇴출을 강행하고 있다. 신규채용교육을 할 때에도 본인이 권리를 내세우려면 의무를 다해야한다고 못박으며, 현장 내의 규칙을 지키지 않을 시에는 팀 전체를 대상으로 특별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누군가에 의해 하던 일을 중단하고 교육장으로 와야하는 것은 불편하지만, 서로의 안전을 지켜주는 일에 해당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그룹에서 실시하는 TBM 활동이나 안전점검 시 안전리더가 직접 위험요소를 지적하고, 작업을 중지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작업중지권’을 부여하며, 그 권한을 그들이 주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라고 제안하고 있다.

취지는 동의한다. 그러나 현재 법 체계와 건설 현장의 권한 구조를 고려하면 현실적인 실행이 쉽지만은 않다. 현재 시공사 소속인 안전관리자는 사업주를 보좌하고 관리감독자에게 지도·조언하는 참모 역할로 실질적인 작업중지권이 없다. 위험을 발견하고 작업을 중지하도록 지도, 조언, 권고하는 역할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현장에서 작업을 중지시키고 있다. 사규와 안전보건관리규정을 통해 안전관리자의 작업중지명령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회사 대표나 현장소장인 안전보건관리책임자의 권한을 위임받아 실무자로서 작업을 제지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중소규모의 현장에서는 여전히 안전관리자가 작업중지를 시켰을 때 관리감독자나 현장소장과의 충돌을 여전히 피할 수 없는 경우를 많이 봤다. 나 또한 많이 겪었다. 그렇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안전관리자에게도 부여되지 않는 작업중지권을 작업팀장에게 줄 수 있는 현장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면 실질적인 해결방안으로 검토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오히려 다른 대안으로 제시된 RTBM은 Reverse Tool Box Meeting의 줄임말로 관리자가 일방적으로 실시하는 TBM에서 벗어나 매일 한 명의 작업자를 ‘오늘의 안전관찰자’로 지정하고 그가 현장에서 발견한 ‘평소와 다른 한 가지’를 발표하게 하는 것이 좀 더 현실성 있다. 하지만 TBM 역시 현장마다 다른데 공종마다 별도로 하는 곳, 소규모로 하는 곳, TBM을 아예 시행하지 않고 시늉만 하는 곳도 여전히 많다. 다행히 내가 있는 현장은 오전/오후 TBM을 진행하고 있어서 접근하기가 수월해서 오후 TBM 시 현장에서 가장 불안해보이는 부분에 대해 넌지시 얘기를 꺼내보았다. 하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위험에 대해 본인이 직접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3일차 물어보았을 때에야 대답하는 사람이 한둘 생겼다. 관리자가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TBM과 근로자가 참여하여 답변을 이끌어내어 진행하는 TBM은 확연히 달랐다.



109.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산업현장에서 가장 무서운 경고의 메시지이다. 익숙함에 속아 위험을 ‘편안함’으로 오해하는 순간, 사고는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마지막으로 책에도 쓰인 ‘안전불감증’에 대해 짚고 넘어가고 싶다. 최초에 누가 안전불감증이라는 국적불명의 단어를 사용해서 사회적 유행어로 고착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모순된 말이다. 안전불감증은 뜻을 그대로 풀이하면 안전한 상태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인데 우리가 꼬집어야하는 현상은 위험한 상태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안전을 말하는 사람이라면 단어 하나, 용어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야한다. 안전불감증에 대해 여러 해석을 보었는데 왜 굳이 ‘해석해야하는 단어’를 사용해야하는지 의아하다. 위험에 둔감한 상태를 꼬집는 단어는 위험불감증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근무하는 건설현장에서는 안전불감증이 아닌 ‘위험불감증’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내게 <왜 위험을 보지 못할까>는 안전관리자로서 현장의 한계를 마주하고 근로자의 심리를 이해하기 좋은 책이었다. 특히나 기업의 대표나 관리자들이 이 책을 많이 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오늘도안전’이라는 말이 앵무새처럼 떠들고 흩어지는 말이 아니라 마음속에 깊이 아로새겨져 하루를 지탱해줄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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