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지도 -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을 찾아 떠난 여행
에릭 와이너 지음, 김승욱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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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라는 단어를 뱉자마자 지금,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나는 구체적인 행복들을 구현하고 그것들을 오롯하게 느끼고 있다. 근래에 느꼈던 가장 큰 행복은 가을의 오고 감을 보고 느끼는 것이었다. 가을의 순간들을 느낄 때마다 짤막하게 메모해둔 가을의 아름다움은 그때를 완벽하게 형상화할 수는 없지만, 바람과 햇빛과 공기를 다시 재생시켜준다. 나는, 가을이라는 계절을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사람처럼 가을을 사랑했다. 그렇게 사랑하던 가을의 한 계절 내내 나는, 너무나도 행복했다. 좋지 않은 일이 있었어도 가을이니까 라는 말은, 마법처럼 온화하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사랑하는 계절 속에서 나는 <행복의 지도>를 읽고 있었고, 가려는 지금에야 막 끝냈다.

행복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

기자 에릭 와이너.

실은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소>를 먼저 읽을 생각이었는데, 어쩌다보니 <행복의 지도>를 먼저 읽게 되었다.

그는 실체가 없는 행복의 실체를 사람들에게서 찾기 위해 네덜란드, 스위스, 부탄, 카타르,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 태국, 영국, 인도 9개국을 여행하고 다시 본국인 미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과연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네덜란드의 끝없는 관용

스위스의 새치름한 기색이 아주 살짝 섞인 조용한 만족감

부탄의 담백한 친절

카타르의 석유, 천연가스라는 복권 당첨

아이슬란드의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은 깍쟁이 같은 어둠

몰도바의 ca la moldva. ce sa fac?

태국의 고민은 그만두고 앞으로 나아가라

영국의 단순히 “고통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이 ‘존재’하는 상태

인도의 삶은 자유와 운명의 조합

미국의 도코미니엄

각기 나라를 여행하는 에릭 와이너의 뒤를 몰래 따라다니며, 나는 약간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처음에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행복이라는 건 한 국가 안에서도 개개인이 느끼는 행복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에 국가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서 찾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졌지만 (물론 지금도 내 생각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프롤로그에서 저자가 인용한 영국 태생의 철학자 앨런 워츠의 ‘바깥’이 없다면 ‘안’도 있을 수 없다.는 말에 의해 내가 속한 장소가 따라 개개인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되는 행복에 크게 중점을 두었다기보다 네덜란드에 있는 따듯한 맥주인 트라피스트 맥주를 매일매일 마셔보고 싶고, 스위스에서 아침에 눈을 뜨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경치를 보고, “cest pas mal”을 말하고 싶고, 부탄에서는 35cm보다는 좀 더 작은(...) 그 나무 조각을 사오고 싶으며, 카타르에서는 (중국 때문에 힘들겠지만) 요소수 외교정책을 슬쩍 강권하고 싶고, 나 역시 조금 더 다양한 생각을 하기 위해 아이슬란드어를 (많이는 말고) 몇 단어만 배워보고 싶은데, 아이슬란드에서는 매일 술을 마셔야 하니 아무래도 매우 힘든 일이 아닐까 싶다. 몰도바에서는 좋은 식당을 알려달라고 하는 대신에 좋은 식당을 가보지 않겠냐고 묻고 싶은데 그마저도 ‘50 대 50’이라고 대답하면 나는 뭐라고 말할지 생각해 봐야겠고, 살인 사건 발생률이 높은 편인 태국에서는 우선 살고 봐야 하기 때문에 좀 멍청하게 굴어야 할까, 하지만 그렇게 했는데도 죽으면 어떡하지. 내가 죽었는데 태국 사람들이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이면 나는 억울해서라도 다시 살아야겠다 라는 생각도 했으며, 투덜거리는 거? 나 잘 해! 나 영국에서 잘 살 수 있어! (제롬 K : “(자신의 행복을) 내보이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투덜거려라”) 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나는 커피를 참을 수 없으니 아마 아쉬람에서 수업을 받기는 힘들겠네. 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미국에 다다라서야 나는, 지금 내 삶이 미국과 좀 닮아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지난날들을 회상했다. 516. 항상 한 발을 문 밖에 놔둔 상태로는 어떤 장소도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 이전에 내가 그랬으니까. 지금은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언제든지 나갈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미국인들이 이사를 하는 것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단순히 어딘가 다른 곳에 가면 더 행복해질 것 같아서. 라는 말에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숨을 꺼내 내쉬어본다. 나 역시 지금 이곳을 벗어나면 지금보다는 나아질 수 있어. 라고 생각했던 시절에 느꼈던 그 숨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새로움에 대한 갈구를 실현했을 때의 성취감도 엄청나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지루함과 무력감이 또다시 고개를 처들 수 있다는 것을.

행복을 일컫는 각기 다른 용어들과 문장들이 내 눈을 끌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사회학자들이 만들었다는 주관적인 복지(subject well-being)였다.

행복은 예측이 불가능한데, 그것은 각각 자기만의 방식으로 행복(522page)을 느끼기 때문이다.

행복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노아 웹스터의 ‘좋은 것을 느낄 때 나타나는 기분 좋은 느낌’을 빌려 덧붙이자면,

결국 행복을 아는 것은 나를 돌보는 일이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내 입가에 웃음이 도는 건 무엇인지 하는 것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알아채는 것이다.

내가 이것에 행복해하는구나.

그렇게 행복이 아닐 수도 있었던 행복을 조금 더 붙잡고 있는 것.

298. “지루함도 선택이다. 부드러운 살사와 주름 잡힌 군복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참 좋은 예시.

지루함 속에서 나는 행복하지 않아, 라고 말을 해봤자 나아지는 것은 없다.

오히려 좋은 핑계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언젠가 행복에 대한 정의가 달라지는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지금까지의 행복은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것들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오늘 나의 행복은,

외할머니와 투닥거리며 통화를 한 것과,

컨디션을 묻는 배우자의 자상한 음성,

맑아졌다 흐려졌다 반복하는 가을 날씨에,

앞으로는 원두커피를 마셔야겠다며 주문했던 핸드 그라인더가 드디어 온다는 것과,

지금 마시고 있는 따듯한 차, 그리고 오늘 저녁에 있을 독서모임에 대한 기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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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조지아에 뭐가 있는데요?
권호영 지음 / 푸른향기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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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는 나에게 친숙해질 예정인 나라였다. ‘친숙해질’이라는 표현을 쓰는 까닭은, 2020년의 여행지로 우리는 조지아와 터키를 꼽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2019년에 이미 대한항공에서 조지아 직항을 두어 달의 기간 동안 운행했다는 기사를 보게 되면서 시간이 조금 지나면 직항이 생기지 않을까? 하며 희망을 품고 웃기도 했다. 하지만 2020년이 시작되기도 전에 갑작스레 해외로 여행을 가지 못할 이유가 생겼고, 그 이후에는 코로나19가 들이닥쳤다. 그때로부터 2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코로나19는 우리를 볼모로 잡고 놔주지 않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꽉 막힌 채로 지낼 수는 없기에 트래블 버블(Travel Bubble)이라는 협약이 새로 생겨났다. 아무래도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트래블 버블 국가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언젠가 여행을 할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망설이지 않고 조지아로 가는 항공편을 찾아보겠지?



저자는 조지아의 수도인 트빌리시, 카즈베기, 다시 트빌리시, 시그나기, 메스티아, 다시 트빌리시로 여행을 한다. 다른 지역을 가려면 트빌리시를 꼭 거쳐야만 한다니 말이다. 나는 여행을 갈 곳을 정하기만 했지 루트를 짜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의아한 마음에 조지아 지도를 펼쳐보니 정말 그렇다. 이 이야기를 j에게 했더니, 그는 “꼭 대전 같네?”라고 말했지만, 트빌리시가 교통의 요충지라고 하기엔 어쩐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다. 다른 방도가 없어서 무조건 트빌리시를 거쳐야만 하는 것이라 이동 시간의 제약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정말 교통의 요충지라고 해도 되는 것일까. 교통의 요충지라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은 아무래도 트빌리시에 사는 사람뿐이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녀의 조지아를 구경했다.




조지아의 날씨는 9월이 가장 좋다고 하는데, 저자가 체감한 카즈베기의 9월 날씨는 변덕이라고 했다. 카즈베기는 카즈벡 산 트레킹을 목적으로 한 여행자들이 많은데 날씨가 가장 좋다고 하는 9월마저 변덕이라니, 위험하지는 않을까? 하지만 생각해보니 날씨가 선선하다는 10월의 피렌체에서 우리는 습기와 더위를 느껴 반팔을 챙겨가지 않은 것을 기억해내곤 그때의 날씨운이 아닐까 살며시 생각해보기도 했다. 트레킹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카즈베기까지 가보지는 않을 것 같지만 아마 다녀오면 살이 5kg 정도 빠진다는 전제하에 다녀올 수는 있을 것도 같...고? 하지만 그만큼 고생을 해야 하니 여행지에서 살짝 뒤로 슬쩍 밀어본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트빌리시를 가야겠다. 아니, 트빌리시만 가야겠다. 하고 생각했다. 우선 왔다 갔다 하는 이동 시간과 그에 맞먹는 피로도를 이겨낼 재간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내가 가고 싶었던 이유도 트빌리시의 사진 한 장이었다. 그 사진을 지금은 찾을 수는 없지만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조금 지루해서 한 지역을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시그나기는 어떨까? 싶었다. 와인을 저렴하게 사오기 위함이라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실은 포르투갈의 신트라를 조지아의 시그나기에서 설핏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참, 책에는 포르투갈이 종종 언급이 되는데, 포르투갈에 대한 저자의 그리움이 느껴졌다. 그때마다 나 역시 포르투갈이 와락 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저자는 조지아의 한 줄 평을 <유럽의 동남아>라고 했는데, 까닭으로는 유럽이 품은 자연과 올드시티의 이국적인 분위기, 아직은 발달이 덜된 교통편과 도시 상황, 저렴하기로는 최고인 물가를 꼽았다. 내가 이제까지 여행을 다닌 곳은 (선택사항에 있던 것은 아니었으나) 물가가 대체로 저렴한 편이었는데 조지아도 그렇다고? 라고 말하고 혼자 웃었다. 그러면서 나를 맞이할, 내가 다녀올 조지아는 어떨까 사뭇 궁금해진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어쩌면 허황된 꿈을 꾸는 것 같은 착각이 고개를 처든다. 책을 읽으며 조지아의 지도부터 시작하여 단편적인 면모들을 보았지만, 현재 나는 떠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언젠가의, 나의 그루지야를 꿈꾼다.





덧. 그러나저러나 조지아의 언어가 너무 귀엽고 동글동글해서 그림 그리듯 그려보고 싶어서 몇 번을 그려보았다. 눈으로 봐도, 손으로 그려봐도 참 귀엽지만 강단이 있어 보이는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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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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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부산 보수동 책방 골목을 두 번째로 찾았다.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혼자 다녀오고 매우 큰 실망을 했었지만, J가 가보고 싶다고 하여 약간의 망설임 끝에 다시 가보기로 했다. 창원의 영록서점 같은 분위기일 줄 알았던 그 역시 실망의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그러던 중에 우리에게 과제가 주어졌다. 이곳에서 <동물농장>을 구매하자. 마지막 서점에도 없으면 발길을 돌리자 했는데, 그곳에는 중고가 아닌 새 책으로 버젓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그 책을 20%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책을 구매한 지 어느덧 네 개의 계절이 지나 다시 여름이 도래했다. 언젠가 읽겠지 하고 생각했던 책이었는데, 그가 먼저 읽어보고 감상평을 이야기하는데 솔깃해서 나도 뒤따라 읽기 시작했다.


11. 인간은 우리의 진정한 적이자 유일한 적입니다. 인간을 몰아내기만 하면 우리의 굶주림과 고된 노동의 근본 원인은 영원히 제거될 것이오.

현명하고 자애롭고 위엄이 넘쳐 보이는 늙은 수퇘지 메이저의 말에, 동물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메이저가 죽고 난 뒤 새로운 지도자가 생겼고 지도자의 지시에 따라 동물들은 존즈를 몰아내는 것에 성공한다. 메이너 농장은 동물농장으로 바뀌면서 그들에게는 일곱 계명이 생기게 된다.


일곱 계명

1. 무엇이건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다.

2. 무엇이건 네 발로 걷거나 날개를 가진 것은 친구이다.

3.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4.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

5.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

6.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선 안 된다.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하지만 우유과 사과가 시발점이 되면서 이후의 동물들의 삶에는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농장은 그 자체로는 전보다 부유해졌으면서도 거기 사는 동물들은 하나도 더 잘살지 못하는 (물론 돼지와 개들은 빼고) 그런 농장이 된 것 같았다.

동물들은 분명 더 잘 살기 위해 그와 같은 방법을 택한 것일텐데, 그들은 더 ‘열심히’ 일을 해야만 했다. 결국 형태만 달라졌을뿐, 결과는 조삼모사였다. 어떤 형태든지간에(가정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지도자가 자신의 배를 채우는 데만 급급하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너무나도 뻔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많지 않다. 순응하거나 타협하거나 맞서거나. 당신이 속한 가정은, 기업은, 국가는 어떠한가요.


71. 뭐든 잘못된 일이 있으면 모두 <스노볼이 그랬다>가 되었다.

보자마자 포옥, 한숨이 나오는 대목이었다. 남 탓하기 좋아하는 대상들을 거울로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너,라고.


123.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인간에게서 돼지로, 다시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번걸아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나폴레옹은 언제나 옳다>를 중심으로 조금씩 그들에 맞춰 바뀌어있는 계명들은 결국 하나의 계명으로 축약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당신은 어떤 동물인가, 다른 동물인가.


책은 구소련인 러시아를 풍자하기 위해 쓰였지만, 나는 읽으며 북한을, 한국을, 내가 경험했던 우리 사회의 한 어두운 면들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어디에나 나폴레옹과 스노볼 같은 사람이 있고, 스퀼러 같은 사람이 있으며, 벤자민 같은 사람이, 뮤리엘 같은 사람이, 모지즈 같은 사람이, 클로버 같은 사람이, 복서 같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니까.


아마 누구나가 그랬겠지만, 복서가 나올 때마다 답답함과 안타까움과 측은함 등 여러 가지 마음들이 어지럽게 공존했다. 나는 복서가 되지 않기를 바랐고, 벤자민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성격이라면 나는 절대 복서도, 그렇다고 벤자민도 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뮤리엘이 되기를 바랐다. 선하고 착한 이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싶지는 않기에 니가 너무 몰라서 그런 거잖아.라고 감히 비난할 수는 없지만, 조금만 더 알아보려고 했더라면, 조금만 더 꾀를 내었다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는 없었다. 결국은 내가, 네가, 우리가 원하는 이상 사회를 만들려면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했다. 마음이 어지럽다.


이 책을 지금보다 훨씬, 더 어릴 때 읽어보았더라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여기에서 더 어릴 때라 함은, 사회생활을 하기 전인 10대의 나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내가 아는 청소년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내가 아는 청소년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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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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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흐트러지는 일요일이다. 아침에 마음을 붙잡고 싶어 책을 들었다. 또 이 이야기를 읽었다.



알고 지내던, 또 친하게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둘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명백하게 누구의 잘못이라 말할 수 없는 관계들이 깨어지는 것을 마냥 바라보며 붙잡을 용기도, 노력도 서로가 하지 않았던 그 시절의 우리 모두는, 언니와 나를 닮았다. 이전에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에 담겨있는 <한지와 영주>의 한지와 영주를 매우 깊이 좋아했다. 아주 천천히, 그 글들을 다 씹어서 소화시킬 수 있다면 그러고 싶을 만큼. 다른 단편으로 넘어가기 싫고 그럴 수 없을 만큼. 이번 백수린 작가의 《여름의 빌라》에 담긴 <시간의 궤적>이 그랬다. 시간의 텀을 두고 두 번을 읽었다. 어쩐지 읽을 때마다 나는 극심하게 외로워졌고, 그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가 황급하게 지워버리곤 했다.



16.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거나 모두가 안정을 찾아가는 시기에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다가는 결국 낙오자가 될 거라고 말하지 않은 최초의 한국 사람이었고, 나는 그런 언니가 좋았다.

프랑스의 어학연수에서 만난 언니와 나는, 취향과 가치관이 꼭 맞았고 무엇보다 자국을 떠나 타국에 있다는 동질감이 그들을 친밀하게 했다. 어떤 이와 주고받는 말들은 아름다운 음악처럼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대화를 나누는 존재들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언니와 나는 낯선 세계에 꼭 그 둘만인 것처럼 우정을 나누었다. 하지만 내가 브리스와 결혼을 약속하면서 언니는 프랑스에 한시적으로 머물다 돌아갈 사람, 나는 여기에 남을 사람이라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겼고, 손쓸 수도 없이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28. 나는 일주일에 세 번씩 운동화를 신고 나가 파리를 걸었고, 이따금씩 길을 잃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면 거리에 서서 조용히 울었다.

타국은 아니지만 타지에서 느꼈던 내 감정이 이 한 줄로 요약되는 느낌이어서 나는 목이 메어왔다. 그 외로움은 실체는 없지만 너무나도 명확하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문제 중 하나니까. 그 마음을 얼굴도 모르는 이들에게 털어놓았을 때 나는, ‘본인의 시간을 만드세요’라는 대답을 가장 많이 들었고, 그 외에도 ‘시간이 해결해 준다’거나 ‘어쩔 수 없지 않냐’라는 대답을 들었다. 당시에 나는 충분히 내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기에 얼마나 더 많은 내 시간을 만들어야 나는 덜 외로울 수 있을까, 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외로움을 감당하지 못하는 내가 등신처럼 느껴지는 날들이 이어졌고, 결국 나는 그런 마음들을 더 이상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못했다. 어떤 대답들도 내게 와닿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대답들에 대해 ‘일리가 있구나’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말들을 아직도 정답이라 여기고 싶지 않은 것은, 발버둥치며 힘들어했던 날들을 단순히 그런 이유로 치부해버리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 시간들에 대해 꼭 필요했던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냥 그런 날도 있었다.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볼 뿐이다.



언니는 “네가 없었다면 나는 파리에서 정말 외로웠을 거야.”라고 말했고, 나는 소리 높여 동의했다지만,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부터 언니가 미웠다. ‘네가 없었다면’이라니 언니는 곧 떠날 사람이면서. 그러면 언니가 떠난 뒤의 나의 외로움은?...이라고 생각하자 그 외로움이 내 것인 양 나는 갈증이 일었다. 언니는 내가 힘들어하는 상황에 대해 거리낌 없이 조언해 주고 응원을 해주었지만, 적어도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언니는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 부분에 대해 나는 자격지심을 가졌던 것도 같다. 아니, 이야기의 나가 아닌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쓰는 나는 그렇다. 언니의 다정함들이 의도와는 다르게 콕콕 찔러대어 나는 무기력해졌다.



18.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우리의 밤을 생각하면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습기였다. 세 달 남짓한 여름밤을 제외하면 거의 언제나 곧이라도 빗방울을 떨어뜨릴 것만 같은 대기가 얇고 부드러운 껍질처럼 우리를 감쌌고, 나는 그 안에서 우리가 안전하다고 느꼈다. 골목들은 가로등의 따뜻한 불빛에 덮여 있었고, 도시의 오래된 건물은 나에게 영원을 떠올리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니를 그리워한다. 좋지 않게 끝난 관계가 있고, 물 흐르듯 끊긴 관계도 있다. 그 관계들이 그립다기보다 그때의 우리가 종종 그리울 때가 있다. 언니가 파리에 계속해서 남아있었대도 언니와 어떤 다른 이유로 관계가 깨어졌을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한다. 지금의 인연들과 남은 시간이 얼마만큼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저 옆에 있어주는 이들에게 최선을 다할 뿐이고, 놓치기 싫다면 붙잡아보기도 한다. 결국 놓이고 끊어진 것들에 대해 나는 다시 진한 아쉬움을 남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절들이 비록 미화의 감정일지라도, 그 시절들이 있기에 우리는 기꺼이 지금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나를 살게 한 많은 시간들이, 마음에 고여있다기보다 담겨있다고 믿는다.

 

 

 

 

 

 

_책 속의 문장

17. “괜찮아요, 언니. 사람에겐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으니까요.”


18. “나는 용감한 게 아니야. 단지 그런 척하는 거지. 척을 하다 보면 그래지기도 하니까.”


23. “우리는 전부를 걸고 낯선 나라에서 인생을 새로 시작할 만큼 용기를 내본 적 이는 사람들이니까, 걱정 마.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스스로 원하는 걸 찾을 줄 아는 사람이야.”


36. “그건 나쁜 거 아닐까. 언니는 남의 가정을 망가뜨리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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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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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두두둥, 그날 저녁에 본 옛날 프로그램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에서 방영하던 편은 <인형의 집>이었다. 누군가를 질투하고 부러워해서 자신의 남편과 집을 똑같이 꾸민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도서관에서 빌려온 <인형의 집>을 꺼냈다. 책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었기에 비슷한 내용이려나ㅡ싶은 생각뿐이었다.


14. 낭비꾼 새는 귀엽지. 하지만 돈이 아주 많이 들어. 이런 새를 키우는 게 남자에게 얼마나 돈이 드는 일인지.

노라, 그녀는 헬메르 토르발의 노래하는 종달새이자 다람쥐이자 낭비꾼이다. (과자 봉투를 숨기며) 빨리 빨리! 과자까지 금지시키는 모습을 포함해 여러 장면들을 보면서 자신에게 그녀를 예속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녀는, 소유물ㅡ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느끼게 된다. 그때의 허탈함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노라는 몇 년 전에 남편의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을 할 때 필요한 돈을 크로그스타드에게 빌려야만 했다. 그것을 빌리려면 보증을 서야 했는데, 남편을 살려야했기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해서라도 그 돈을 손에 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서명도, 날짜도 위조했다는 것이 탄로났다. 이후에(현재) 크로그스타드가 있는 은행의 총재로 취임하게 된 남편은 그를 해임하려고 하고 그는 노라에게 해임을 막아달라 부탁을 하며, 막지 않으면 그 사건을 폭로하겠다고 한다.

14. 당신은 정말 딱한 아이야. 당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당신은 돈을 손에 넣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지. 하지만 돈이 생기면 그 돈은 바로 당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그 돈으로 뭘 했는지도 당신은 전혀 모르고. 그래, 당신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피가 그러니까. 그래, 그래, 노라, 이건 유전이야.

책을 깊게 읽을수록 헬메르가 노라를 바라보는 관점 중 하나인 이 부분에 대해,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이 부분은 너무나도 완벽하게 사실적이었으니까. 크로그스타드에게 빌린 돈에 대해서도 그동안 얼마나 갚아왔는지는 모르지만, 그 돈에 대해서도 갚아야 한다는 생각보다 자신의 비밀이 탄로 날까 하는 생각에 더 급급한 모습을 보면서 한때는 가까웠던, 하지만 영영 가까이 두고 싶지 않은 누군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라가 크로그스타드에게 돈을 빌린 걸 알고 헬메르는 길길이 화를 내지만, 곧이어 차용증을 돌려받게 되자 헬메르는 금세 노라를 용서하게 된다. 그 부분에 대해 노라는 회의를 느끼게 된다. 나는 그저 인형 아내,였구나 하고. 그녀는 자신에 대한 책임인 거룩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집을 나간다고 선언하게 된다. 돈을 빌려야만 했던 이유에 대해서 노라는 말하지 않고 헬메르는 말하지 않는다. 편지나 차용증에 그 이유가 적혀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당신은 당신의 도리 그대로 나를 사랑했어. 통찰력이 부족해서 수단에 대해 옳은 판단을 내리지 못했을 뿐이지. 라고 말하는 헬메르의 말을 통해 간접적으로 편지에 쓰여있구나, 하고 짐작할 뿐)


책의 뒷부분에는, ‘근대극의 선구자 헨리크 입센이 ‘노라이즘’을 탄생시킨 최초의 페미니즘 희곡’이라고 쓰여있다. 하지만 과연 나는 이것이 헬메르 혹은 노라 어떤 한 사람만의 잘못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차용증서를 받았다고 하여 단박에 용서를 할 수 있는 헬메르도 우스운데, 그런 취급을 당했다고 하여 ‘너 때문에 빌린 거야’라는 말로 자신의 잘못은 전혀 없는 것인 양 타인의 돈을 빌린 것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그 돈을 갚아야 한다는 책무도 느끼지 못하면서 121. 당신이 아주 확실하게 모든 책임을 지고 “모두 내 잘못입니다.”라고 말할 줄 알았어요.라고 뻔뻔스럽게 말하던 노라의 말은 얼마나 허무맹랑한가. 정말 배우자를 위해 한 행동이라는 것도, 남편의 명예가 실추될까 봐 혹은 남편의 자존심이 상할까 봐 남편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모두 이해는 하지만 그것까지 감싸달라는 건 억지가 아닌가. 한 번의 사과라든지 변명은 했는가 말이다. 남편의 명예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생각이었던 노라라고 쓰여있는데 단추가 구멍에 들어가지 않는 것 같은 갑갑함을 느끼며 그녀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이 책에서 ‘굳이’ 페미니즘을 찾아야 한다면, 노라보다 크리스티네 쪽을 겨냥한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위해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였지만 그와 사별하고 노라를 찾아와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23.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허전해. 나는 늘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왔는데 이제 그 누군가가 없잖아. 그리고 크로그스타드에게 먼저 청혼하기도 하는 등,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크리스티네였다. 노라이즘에 대해서 나의 경제관념이 바뀌지 않는 이상 수긍할 수는 없다. 하지만 노라가 그곳을 떠나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것에 대해서는 행운을 빈다!




118. 나는 내가 우선적으로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고 믿어요. 최소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거예요.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말로 만족할 수 없고 책에 쓰여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어요. 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설명을 찾아야 해요.


118. 나의 거룩한 의무가 뭔가요?

- 그걸 내가 말해야 아나?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책임이 아닌가!

내게는 다른, 그만큼이나 거룩한 의무도 있어요.

-아니, 없어. 대체 무슨 의무지?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이에요.


121.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명예를 희생하는 사람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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