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밤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83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평점 :
품절





노든과 앙가부, 치쿠와 펭귄을 기억하기 위해서 귀차니즘에게 휴전을 선언하고 쓴다.


노든이 극진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고 그들은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 사람들은 노든에 대해 뭐든지 다 아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그들이 노든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너의 말년은 어떠니,하고 노든에게 물어보지 않았잖아.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란 노든에게 선택의 날이 다가왔다. 갈팡질팡하다가 코끼리 고아원에 남겠다는 결정을 한 노든에게 할머니 코끼리는 “하지만 너에게는 궁금한 것들이 있잖아. 네 눈을 보면 알아.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못 가. 직접 가서 그 답을 찾아내지 않으면 영영 모를 거야. 더 넓은 세상으로 가. 네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바깥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라고 말하고 그 말에 힘을 얻은 노든은 바깥세상으로 나오기로 한다. 할머니 코끼리의 말과 다른 코끼리의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다는 말이 노든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 응원과 지지를 받았던, 그리고 보냈던 순간을 조용히 생각해 본다. 그의 두 번째 사회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4. 노든은 아내와 딸에 대해서는 항상 말을 아꼈다. 아내와 딸은 노든의 삶에서 가장 반짝이는 것이었고, 그 눈부신 반짝임에 대해 노든은 차마 함부로 입을 떼지 못했다.

노든도 가족을 이루었다. 그렇게 영원히 행복할 줄 알았지만 인간들에게 습격을 당하게 되면서 아내와 딸을 잃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노든은 동물원에 갇히게 되며 그곳에서 앙가부를 만난다. 하지만 삶이 송두리째 뽑혀버린 노든은 숨을 쉬는 매 순간 화가 나있고 인간들에 대한 복수심에 가득 차있어 낮에 동물원에 찾아오는 인간들을 사납게 노려보느라 여념이 없다. 악몽을 꾸는 노든에게 앙가부가 먼저 다가가고 둘은 친구가 된다. 노든은 복수를 하기 위해, 앙가부는 초원을 달리기 위해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다시 계획을 세우고 남몰래 조금씩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든이 잠시 치료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뿔이 잘려 나간 채 숨이 멎은 코뿔소를 발견한다. 나의 친구 앙가부. 노든의 복수심은 이전보다 더 차올랐다. 앙가부의 죽음에서 나는 멈춰버렸다. 꼭 그래야만 했나, 싶어서. 어디까지일까, 이 상실의 고통은.


상실감과 복수심에 차있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던 날들에, ‘전쟁’이 터졌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동물원을 빠져나오며 치쿠를 만났다. 치쿠는 입에 알이 담긴 양동이를 물고 있었다. 배려라고는 코끼리 눈곱만큼도 없이, 한참을 말 한마디 않고 걷다가, 느닷없이 자기 사정만 늘어놓고, 상대방의 생각은 한 번도 물어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바다를 찾아야 한다던 펭귄 치쿠. 치쿠는 노든을 ‘정어리 눈곱만 한 코뿔소’라고 불렀고, 노든은 치쿠를 ‘코끼리 코딱지만 한 펭귄’이라고 불렀다. 치쿠는 노든과 자신을, ‘우리’라고 불렀고 노든은 그것이 싫지 않았다. 함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긴긴밤이 계속되었다. 그 긴긴밤은 언제까지 이어지는 걸까, 그들이 찾는 ‘바다’는 어디에 있는 걸까.


67. 그저 다시 모래를 떨고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가는 것이 노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노든은 옛날 기억에 사로잡힐 때마다 앞으로 걷고 또 걸었다. 노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노든의 상실감과 고통과 슬픔을 느낄 수 있던 문장들.

최근에 <아침의 피아노>를 필사하면서 “안개를 통과하는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그건 일상이다. 일상을 지켜야 한다. 일상이 길이다.”라는 문장과 마주했다. 일상을 지키는 힘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기도 하니까. 그 일상을 소중하게 지키고 실천하고 지내는 것이 가끔은 힘에 부칠 때가 있다. 힘들면 잠시 쉬어가도 된다는 걸 알면서도 쉬면 언제까지고 그렇게 쉬게 될까 봐, 다시 끙챠ㅡ 힘을 내 하던 일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까 나도, 노든도 그렇게 살아간다고, 또 살아낸다고.


치쿠의 말대로, 노든은 알을 지켜냈다. 새로운 펭귄이 태어난 것이다. 펭귄은 노든에게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치쿠가 그렇게도 바라던 ‘바다’를 찾으러 나섰다. 노든은 펭귄에게 말하곤 했다. “이리 와, 안아줄게.” 그 어떤 말보다 다정하고 상냥한 말이다. 보는 내 입가에도 미소가 살짝 앉았다. 잘 익은 망고 열매 색 하늘 밑에서 그들은 그렇게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다. 그들이 왔다. (ㅡ)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 심정을,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나간 노든의 아내 마음을, 아직 죽지 않은 연인을 뒤로 하고 알을 데리고 도망쳐 나오던 치쿠의 심정을, 치쿠와 눈을 마주쳤던 윔보의 마음을, 혼자 탈출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던 앙가부의 마음을, 코끼리들과 작별을 결심하던 노든의 심정을, 나는 다 알 수 없고, 다 알 수 없을 것이다. 또, 앞으로도 알고 싶지 않다. 이보다 더 우스운 말은 없겠지만, 힘든 일들을 겪고 싶지 않다. 더 단단한 내가 되고 싶지도 않다. 아직까지는 이전보다 조금 더 이기적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그 마음들을 알기에 알고 싶지 않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마음들을 하나씩 들여다본다. 그 어떤 마음도 내가 아니었던 적 없고, 그 어떤 마음도 내가 갖고 싶지 않았던 그 마음들을. 알게 모르게 내 마음들과 닮아있던 그 마음들을 말이다.

대상이 누가 되었든, ‘우리’는 언젠가 만날 수 있다. 그리곤 코와 부리를 맞대고 인사를 나누겠지, 매우 반갑게. ‘우리’의 재회를 응원한다.

주어진 생에 대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해, 평온한 마음에 대해, 가진 것들에 대한 감사함이 실체로 있을 것만 같은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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