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사람들의 눈과 귀를 잡아끄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야구다. 프로야구는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저기 일본을 거쳐 미국에서 벌어지는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는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기쁘게도 만들고, 초조하게도 만든다.  

야구는 구경하기에 그렇게 간단한 경기는 아닌 것 같다. 나야 어려서부터 재미로 보다 보니까, 저절로 규칙들은 어려움 없이 알게 됐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더러 있는 것 같다(여자들 중에는 꽤 있다는 보고가 있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한마디 하자면, 야구는 알면 알수록 묘한 재미를 주는 스포츠다(너무 상투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그냥 겉으로 보면, 던지고 때리고 달리는 것 같지만, 거기 안에 숨겨진 (긴장된) 정보들은 보는 사람의 심리를 극단으로 끌어 올리기도 한다.  

그렇다! 스포츠 중에 양팀 간 이렇게 정보전, 심리전이 치열한 것이 또 있을까? 한 선수의 신체 정보를 다 분석해서 장점과 단점, 그리고 공략법까지 데이터화해서 실제 경기에 활용하는 이 놀라운 세계..  흔히 쿠세라는 일본어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선수의 습관, 버릇을 통해서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예측, 대처하기도 한다. 가끔 이 쿠세를 서로 친한 양팀 선수끼리 알려준다는 얘기도 나돌곤 했다.

상황에 따라 포수가 투수에게 원하는 공은 달라지고, 그 공에 맞춰서 수비, 특히 내야수들의 위치도 변화한다. 마치 바둑처럼 수읽기는 야구에선 빈번한 일이다. 그래서 상황별로 고정된 패턴(정석)들이 있는데, 이를 역으로 삼는 경우들도 있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이다.  

그리고 야구를 투수놀음이라고들 한다. 강속구에다 제구력이 좋은 투수를 가진 팀은 상당히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야구가 투수 의존도가 높다고 하나, 결국은 한 점이라도 점수를 내야 이기기 때문데, 공격에서 분명 일을 내야 승리를 할 수 있다. 즉 15회 연장까지 투수가 퍼펙트로 상대 공격을 막아도, 자기 팀에서 점수를 내지 못하면, 이길 순 없다. 

 

 

 

 

야구에 관심이 가다보면 야구에 얽힌 이야기들에도 손이 간다. 특히 메이저리그는 야구선수 뿐만 아니라 평범한 야구팬들도 궁금해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고 이종남 기자라면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아는 분이다. 이 분이 번역한 '야구란 무엇인가'는 이 분야에서 매우 유명한 책으로 통한다. 두 권으로 나오던 시절이 있었는데, 최근에 두툼하게 한 권으로 새로 나왔다. 미국 메이저리그에 얽힌 미국식 야구 이야기고, 최근의 것들과는 멀지만, 야구장을 둘러 싼 내막들도 엿볼 수 있는, 좋은 정보를 갖춘 책이다.  

야구팬들이 선호하는 야구해설가가 있기 마련이다. 전에는 하일성, 허구연 해설위원으로 크게 양분되었는데, 요새는 그 중 한 분이 그 자리를 떠나 있기 때문에, 단연 허구연 해설위원이 큰 인기를 끈다. 이들의 어록도 있는데, 요새는 그의 독특한 발음과 얽힌 '허구연 어록'이 당연 대세다. 가령 이런 것들이 있다.   베나구(변화구), 스라이다(슬라이더), 쒀클 췌인지 압(써클 체인지업), 콘디숀(컨디션), 방맹환(박명환), 루헨진(루현진), 김벵헨(김병현) 등. 그리고 요새 가장 뜨는 어록이 있다면 "대쓰요(됐어요)". 

그에 반해, 하일성 어록은 간단하지만 여운이 오래 간다. 결정적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늘 하는 말, "야구 몰라요..." 

 

 

 

 

 

지금 WBC 국가대표 감독은 1회 대회때와 마찬가지로 김인식 감독이다. '믿음의 야구'로 알려진 분인데, SK의 김성근 감독 같은 정밀한 분석(데이터 야구) 보다는 자신의 '감'으로 밀고나가기도 하는 승부사 기질도 엿보인다. 대표팀 감독직을 꺼려하는 분위기(왜 그럴까?)에서 불편한 몸으로 다시 중책을  맡았는데, 좋은 결과를 기대해본다. 

 

 

 

 

야구의 본고장은 미국이라지만, 세상에는 미국식 야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메이저리그와 성격이 다른 리그들도 존재한다. 특히 동양이 그러한데, 일본과 한국, 대만이 그렇다(최근 중국도 가세). 일본은 동양야구를 대표하는데, 상당히 섬세하고 작전이 많은 편이다. 아마 우리나라 프로야구 팀 중에서 SK가 여기에 가까울 듯 하다.  상대편 선수의 투구나 타격 자세에서 어떤 습관이나 버릇을 읽고, 그것을 치밀하게 분석해서 경기에 활용하는 것도 일본 야구에선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아무리 잘 나가는 선수도 일단 약점이 잡히면 철저하게 공략을 당하는데,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일 년짜리 선수로 전락하기 쉽다.   

힘을 앞세우는 미국식 야구는 북남미 전체로 퍼져 있다. 메이저리그에도 유명한 선수들은 남미출신들이 많고, 최근 WBC에 참가한 멕시코나 베네수엘라에 대표팀만 보더라도, 쟁쟁한 이름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경기를 보자면, 시원시원한 맛은 있지만, 역시 잔재미는 덜하다. 대개 선수들의 역량에 맡기는 편이라, 결정적인 순간에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작전들은 적다. 아마도 일본식 야구는 그러한 힘의 부족을 다양한 작전과 조직력으로 변용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 야구는 그러한 일본의 영향이 강하긴 하지만, 또한 힘으로 밀어 붙이는 면도 가졌다는 평을 듣는다. 

내일이면 다시 한번 일본과 맞대결을 벌인다. 거의 무결점에 가까운 일본 야구가 유독 실점을 범한 상대는 우리나라였다. 일본이 경계를 할 만큼, 우리야구가 이렇게 성장햇다니 상당히 뿌듯하다. 예전 한일슈퍼게임이라고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일본은 형식적으로 우리야구를 대했고, 주전이 많이 빠지고서도 수월하게 이기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일본이 촤강의 선수를 구성해도, 우리한테 이긴다는 게 쉽지가 않다.  

아직도 프로야구 수준으로 보자면, 일본이 앞서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단일팀을 구성, 단기전의 경우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승부는 예상하기 어렵다. 내일도 역시 그러한데, 우리는 일본보다 잃을 것이 덜하다. 그리고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다양한 전법(빅볼, 스몰볼)을 충분히 구사했다. 이런 상승세라면, 또 한 번 일본에게 한국야구의 힘을 각인하는 날이 되지 않을까?   

 

*덧붙임 

위에 보이는 것처럼 야구책 페이퍼를 몇년 전에 썼는데, 요새(2011년 6월) 다시 야구책을 찾아보니, 전보다 더 많은 야구책들이 나와 있다. 특히 질적으로도 꽤 좋은 책들이 눈에 띈다.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야구에 대한 페이퍼를 쓰고 싶은데, 그 전에 우선 책들을 골라서 여기에 옮겨 심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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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를 리뷰해주세요.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 2008 촛불의 기록
한홍구 지음, 박재동 그림, 김현진 외 글, 한겨레 사진부 사진, 참여사회연구소 외 / 한겨레출판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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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촛불이 타던 밤이 있었다. 아마 그 어두운 공기는 촛불에 그을려 뜨거운 생채기가 나지 않았을까? 정말 참을 수 없는 생채기가 나서 집 밖을 뛰쳐나온 많은 사람들이 긴 시간 동안 거리에서 만든 기록들이 책으로 묶여져 나왔다.  

2008년 5월부터 7월까지, 이 몇 달의 시간 안에는 앳된 여고생의 얼굴에서부터 대학생, 직장인들의 '표현의 얼굴들'이 촛불은 아니지만, 사진으로 빛나고 있다. 사진은 기억을 다시 불러 모으는 초점의 역할을 하면서, 그 (사진) 주위를 메우는 촘촘한 문자들은 텍스트로서 역할, 즉 촛불의 다채로운 과정들을 생생하게 담아낸다.  

이 책에서 어떤 객관적인 시각과 심오한 반성, 성찰을 기대할 순 없다. 어쩌면, 촛불 아래 모였던 그 때의 대중들-동지들의 뒤풀이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굳이 지나치게 한 쪽에 치우친 시선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어쨌든 그들은 정권의 온전하지 못한 태도에 분노했고, 참여했고, 실천했으니까. 그 노고에 대한 그들만의 향유는 큰 사치는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바람이 있다면,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성찰과 반성이 담긴 촛불의 기억이 모인 책도 기다려본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촛불의 굴곡을 따라 생생한 사진과 그 과정, 배경 이야기들을 연대기적으로 들려준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 촛불에 대한 논의가 담긴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촛불 집회와 한국사회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촛불 집회에 집접 참여한 사람들이나, 이에 관심이 큰 독자들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기억은 객관적일 수 없으나 누구나 자기나름의 기억을 재구성하겠지요. 또한 기억은 본래 의지의 산물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 재구성된 기억은 어쩌면 각자의 시각에서만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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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과 탈주>를 리뷰해주세요.
추방과 탈주 트랜스 소시올로지 2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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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이 어쩔 수 없이 당하는 배제의 폭력이라면. '탈주'는 능동적인 삶의 선택이고, 중심의 권력을 교란하는 효과적인 전략이다. 

저자 고병권은 지난 정권과 지금의 정권에서 '신자유주의'의 연속적인 강화와  그로부터 생겨나는 어떤 (정치적) 폭력의 징후를 본다. 이 폭력은 일단 주변의 대중들에게 향한다. 어쩔 수 없이 떠도는 대중, 그러나 여기에도 자각이 생길 수 있고, 그러한 전환-태도 변경은 새로운 실천을 가능케 하는 싹이 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탈주라는 움직임이다. 이 책은 떠돌이 대중의 실상을 그 바닥의 심연에서 생생하게 드러내면서, 특별한 조건들로 이루어진 임계점을 기다리는 거대한 실천이 아닌, 지금 가능한-즉각적인 실천을 자극하는 텍스트를 제공한다. 

니체와 들뢰즈는 이 책의 전개에 큰 좌표를 준다. 그러나 바람직한 점이 있다면, 니체와 들뢰즈가 소화되지 않은 채로 들쑥날쑥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 텍스트에는 그 외에도 다른 이론과 사상들이 어떤 드러냄을 위해 효과적으로 쓰인다. 그래서 저자의 목소리는 다른 인용된 소음에 잦아들지 않고 분명하게 독자들을 찾아간다. 

그러한 저자의 분명함과 강한 목소리 뒤에는 짚고 넘어갈 부분들도 눈에 띈다. 일단 대중을 너무 쉽게 한 뭉터기로 보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대중은 권력의 장에서 배제될 수도 있다. 그리고 아직 중심에 머물면서 국가의 생리를 애써 감내하기도 한다. 정당하지 못한 권력을 향해 자신들의 성난 몸짓을 보이기도 하고, 혹은 그러한 (대중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시선들도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어떤 대중을 선택하느냐인데, 암묵적으로 저자가 가리키는 곳은 알겠지만, 그 점을 분명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대중이라는 이름 안에는 현실적으로 봉합하기 힘든 균열들이 있는데, 실천의 토대가 되는 그 부분에 대한 인식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극복과 관련해서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진보적인 시각도 더 철저하지 못한 점이 있다. 즉 인문학자들의 경직된 '나누기 놀이', 그들만의 '정상성'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다. 마치 니체의 어조인양 "'정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쟁점은 무시한 채, '정상'이라는 게 원래 있었던 것처럼 간주하듯이 말이다." 라는 부분, 그리고 이어지는 "이 점에서 오류는 진리의 협력자이며 , 비정상은 정상의 다른 얼굴이다. 철학자들은 오류를 극복하고 진리에 도달해야 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것은 진리 자체이다."   

인문학자들이 위와 같이 객관적인 오류에 갇혀 있는 것은 사실인데, 그러한 오류가 지금 현실에서 어떤 힘을, 가치를 가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미 거짓과 진실을 구분해서 진실을 선택하거나 그것을 구성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이 없다면, 이 현실에 작용하는 힘을 단지 '거짓'이라며 몰아세우기 이전에, 왜 그러한지에 대한 인식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나서 그것을 다시 바꿀 전략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력에 의해) 그것이 역전-성공했을 때, 그것들도 역시 오류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맥락에선 '거짓'과 '오류' 자체가 근본적인 문제는 아닌 것이 된다.  

저자는 아마 재소자, 광인, 동성애자도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부분이 그렇게 간단한 건 아니다. 가령, 흔히 정상의 성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보는 동성애는 정상 안으로 들어가는 분위기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이상성애에 대해선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변태들과 유아성욕자 등등 말이다. 이들도 과연 정상에 넣을 수 있을까, 아니면 비정상에 여전히 포함되는 '그들'은 있는 것일까?  

'1부 3_혁명 앞에서의 머뭇거림'에는 니체의 먼 목소리가 들리듯이 먹구름의 비유로 대중들의 잠재된 요동을 표현한다. 여기서 저자는 대중들이 자기 삶을 좌우하는 결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불안을 야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결정을 정치 책임자들이 적절하게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대중들이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할 때, 거기에도 역시 불안은 생긴다. 정치와 사회가 혼란할 때, 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생기고, 지금도 여전히 역대 대통령 중에 선호도 1위를 달리는 이유는 그러한 심리가 어느정도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대중의 이런 이중성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타인의 악에서 자신의 선함을 보는 것을 니체는 탐탁치 않게 여겼다. 저자의 목소리에 니체가 겹치는 부분들이 있다. 그런데 그 부분이 역설적이게도 니체가 반겨하지 않을 거 같은 분위기에서도 울려 퍼지는 것 같다. 자발적인 능동성과 긍정이 스스로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정권의 부도덕에 대한 반향일 경우, 원한은 은닉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전염 속도는 상당히 빨라진다. 그러므로 정부에 대한 거센 대중의 몸짓에서 그러한 원한의 징후도 함께 읽는 섬세함이 필요하다. 단지 많은 숫자가 그 힘의 강도를 말해주진 않으니까. 아마 저자도 촛불시위에서 그렇게 많은 대중의 참여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한 점을 의아해 하는데, 거기에도 그 이유가 있을 지도 모른다.  

'데모스 없는 데모크라시'. 고병권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위기를 실감한다. 그리고 자신 스스로 추방된 대중과 같이 길을 걸었고, 그 땀내 나는 현장의 목소리를 이 텍스트에 옮겨 심었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단지 사유 안에서만 맴도는 허황됨이 적다. 대중에 대한 열정이 앞서, 더 근본적인 성찰에는 소홀한 면도 없지 않다. 그리고 중요한 건 '실천'인데, 요새는 즉각적인 실천을 독려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것이 마치 유행같기도 하다. 그런데, 실천의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이 정말 어리석은 짓일까?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것이 너무 구식의 냄새가 나는 태도일까? 다시 니체를 불러 들이자. 니체라면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지금 당장 무조건 실천하라는 자도 있고, 혹은 대지가 움트는 그날, 그때 같이 일어나라!고 말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누가 실천하고, 누가 말하는가이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대중들의 삶의 현장에서 건져올린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  저자가 참여한 <코뮨주의 선언>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최근 시국의 문제와 촛불시위에 대한 더 밀착된 시선을 알고자 할 때.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니체는 디오게네스의 말을 따라서 "누구 하나 아프게 하지 않고 어떻게 위대한 철학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는데, 나 같으면 문장의 앞뒤를 바꾸어 썼을 것 같다. 즉 "위대한 철학은 우리를 아프게 한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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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 고병권이 쓴 '민주주의'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5-25 15:07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묻는 책들이 태풍처럼 출판계를 흔들어놓고 있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바람이 채 가라앉기 전에, 뒤를 이어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바람이 불고 있다. 이제 여기에 다시 고병권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바람을 추가해야 한다. 그러나 고병권이 몰고 올 바람은 일시적으로 불고 지나갈 바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해서 되돌아올 바람이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사상 지형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파열을 내는 이...
 
 
 
<진중권의 이매진>을 리뷰해주세요.
진중권의 이매진 -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프롤로그에 이런 말이 나온다. "그저 그림의 밖에 있으면서 그림의 안에 영향을 끼치는 액자처럼, 영화의 바깥에 있으면서도 안쪽으로 간섭을 하는 파레르곤(parergon) 같은 글쓰기는 어떠냐는...".  

즉 전문성과 무거운 호흡(긴 문장)으로 줄기차게 (영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닦달하기보다 일단 가벼운 제스처로서, 영화의 새로운 징후를 건드림, 여기에 이 책의 의도가 깔렸다고 볼 수 있다. 그 징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저자도 베냐민(벤야민)에 기대어 인식하고 있듯이 기술이 되겠고, 구체적으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지금과 같은 과도기다.  

그럼 본격적인 읽기에 앞서, 우리도 잠시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놀이를 해보는 건 어떨까? 이 책, 시각의 대상으로서 이 책을 가지고서 말이다. 우선 겉표지를 보면, 디지털 미학을 연상케 하는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앞을 횡단하듯이 검은 글씨로 '진중권의 Imagine 이매진'이 시각적으로 자신을 외치는 듯이 도드라져 보인다. 그리고 그 위로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이란 문구가 보인다. 아마 도시의 야경으로 치자면, 가장 시선을 끄는 네온 광고에 해당하겠다. 그리고 이 책의 안 쪽을 조심스럽게 들어가면, 바로 프롤로그에 당도하는데, 여기에도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이것은 영화비평이 아니다, 담론의 놀이다"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이 지점엔 분명 독자를 묘하게 자극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리고 자연스레 '인문학적 상상'과 '담론의 놀이'가 영화들을 스치면서 어떻게 펼쳐질까? 라는 기대감을 높인다. 그러나 바로 본문에 자리잡고 있는 (현실의) 텍스트는 자신이 밖에 걸어 둔 광고를 망각한 듯, 촘촘하게 박힌 단단한 전봇대(가령 용어, 인명, 인용)가 자유로운 활보를 더디게 하는 거리 풍경을 보여준다.   

저자의 주관적인 상상력과 기발한 담론의 놀이는 찾기 어렵고, 그나마 짧은 글들인데, 용어와 인명, 인용들이 경직된 알맹이처럼 꽤 많이 돌아다니는 걸 볼 수 있다. 그것이 필요하지만, 유효적절하게 쓰였다고 보긴 어렵다. 이 책의 탄생배경이 전에 영화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서 주제별로 묶었다는 걸 고려하면, 그 한계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순 있다. 그렇다면, 거기에 맞는 광고, 소개 문구를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총 10장으로 구성한 이 책에서, 1장 영화의 죽음은 그래도 어느 정도의 지적 흥분을 준다. 영화의 초창기에 가장 혁명적이었던 에이젠슈테인과 현재 상업성과 거리를 두고 개성적인 작가주의 작품을 생산하는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이 포문을 연다. 특히 그리너웨이 감독의 다중 프레임 실험(영화 화면 안에 여러 화면이 생성)은 실제로 변화하고 있는 영화의 가장 적극적인 모범으로 꼽을 만 하다.  

그 외 기억에 남는 것들은, 영화 <웨이킹 라이프>, <수면의 과학>, <블루 벨벳>과 관련된 글들이다. 프롤로그에서는 여기서 다룬 영화들이 우연히 주어진 소재임을 밝히면서, 대신 담론의 놀이를 펼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내가 보기엔 오히려 소재들은 적절해 보인다. 모르겠다. 저자는 자신이 발휘한 담론의 놀이가 만족스러웠는지도. 그리고 독자들 중에서도 그러한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영화의 새로운 징후인 디지털 영화들에 대한 맛보기를 할 수 있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 이 책에서도 언급한 <디지털 시대의 영화>, 주관적인 글쓰기와 재미가 보이는 영화 감상으론 <철학으로 영화보기 영화로 철학하기>이 있다. 그리고 다양한 인용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면서도 저자의 목소리가 인상적인 지젝의 <삐딱하게 보기>가 있는데, 여기서 자유롭고 지적인 '담론의 놀이'를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디지털 같은 새로운 영화에 대한 궁금증이 있는 사람들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나는 꿈의 신화학과 상징주의를 믿지 않아요. 왜 모든 이가 똑같은 연상을 가져야 하죠? 나는 우리 모두가 각각 자신만의 연상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 영화 <수면의 과학>의 감독 미셀 공드리의 태도가 담긴 글.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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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지젝에 관한 책을 읽었다. <슬라보예 지젝>(김현강 지음)이란 책인데, 지젝과 라캉에 관심이 있지만 가까이 가면 약간 두통이 생기던 분들에겐 새로운 처방전 역할을 할 거 같다. 이 책을 본 김에 요새 지젝과 라캉의 출몰현황(신간 소식?)을 살폈더니, 눈에 띄는 것들이 여럿 보인다. 

 

 

 

 

라캉의 '세미나'를 드디어 우리말로 맛볼 수 있다. 1권부터 차례대로가 아닐지라도, 이제 시작인데 어쩌랴! 이 상황에서 에크리 번역까지 기다리는 건 큰 욕실일까?            최근 라캉에 관한 책 중에선 캐서린 벨지의 <문화와 실재>가 끌린다. 책의 차례를 보니, 독특한 구성은 아니지만, 여태 라캉과 관련하여 생긴 많은 문제들 중에서 중요한 것을 잘 포착해서 구성한 모습이 엿보인다.번역만 괜찮다면, 좋은 지식을 얻을 것 같다. 

<라캉 거꾸로 읽기>는 시인이기도 한, 이승훈씨의 책인데, 라캉에 대한 글이라기 보다 (자신의) 라캉 소화와 그 배출의 풍경을 담아내지 않았을까, 예상이 간다. 이 분의 다른 책들을 보니까, 지식의 폭이 상당히 넓다. 약간 옆길로 새는 감이 있지만, 몇 권을 추려본다. 

 

 

 

 

모더니즘에서 해체, 라캉에 이르는 큰 주파수 대역이 느껴지는데, 특히 눈이 가는 책은 <선과 기호학>이다. 나도 최근에 '간화선'이 심상치 않게 보여서, 공부할 기회를 찾고 있는데, 기호학과 선을 다룬 책이 있다니 꽤 반갑다. 내용도 기대에 미친다면 더 근사한 일이지만. 

화두를 뜬구름 잡는 말장난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것을 기표의 차원에서 바라볼 이론적인 도구들은 지금, 간지럽게 서성이고 있다.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는 지젝의 본격적인 징후가 보이는 책이기도 한데, 굳이 완성도?를 들먹인다면 편견과 억지도 세련된 여과없이 떠도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지젝에겐 문제될 것이 없을 수도 있다. 지젝 특유의 실천을 독려하는, 그리고 그 자극이 독자들에게 전달된다면, 그것으로 된 거니까.  

 

 

 

 

 

 

 

<죽은 신을 위하여>를 굳이 꼽지 않더라, 이제 슬슬 지젝의 여인이 라캉보다는 헤겔임을 눈치채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를 믿는 지젝이 즐겨 읽는 헤겔! 그리고 효과적인 도구로서의 라캉.  

최근 지젝이 관여한(서문) 책들이 나오고 있다. 

Revolutions 시리즈인데, 지젝은 물론 그의 동료 알랭 바디우도 보이고, 테리 이글턴, 마이클 하트의 이름도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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