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3월의 마지막 주말. 

 

 

 

 

한자경 교수의 <헤겔 정신현상학 이해>가 나왔다. 독일에 가서 칸트 등 '독일 관념론' 철학을 공부하고, 귀국해서 불교철학으로도 그 지적관심이 확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자경 교수의 이러한 과정들은 꼬박꼬박 책으로도 나오는데, 그것을 따라가며 음미하는 재미도 괜찮다.  

 

 

 

 

 

 

 

 

 

 아무래도 <율리시스>을 읽어야 할 것 같다. 지금 테리 핀카드의 <헤겔>을 막 보는 참인데 1000 쪽이 넘는다. <율리시스>는 그보다 더하니, 양 손에 번갈아가며 아령하듯이 읽어야 할 것 같다. 카프카도 제대로 못 넘었는데, 제임스 조이스의 책들은 언제 다 읽을 것인지 까마득하다. 

  

 

 남회근 선생의 <금강경 강의>가 새롭게 나왔다. 전에 나온 책은 절판이 된 모양이고, 출판사도 바껴서(번역자는 전과 같음) 나왔는데, 여기서 계속 다른 책들도 이어서 나올 태세다. 이론과 실천 모두 훌륭한 분으로 보이는데, 모든 책이 다 충분히 가치가 있다. 내가 바라는 책은, <능엄경 강의>인데 이 책도 어서 번역이 되어 나왔음 한다. 

 

 

 

 

 

 

 

 

정말 <금강경>은 그 황금빛 발산처럼 무수히 많은 책들이 사방을 메운다. 이러한 풍족함이 좋기도 하지만, 거기서 더 좋은 금강경을 만나야 하는 어려움도 더불어 생긴다. 그 중에서 일단 한 권을 골라 본다면, 신소천의 <금강경강의>다. 오래된 책인데, 판을 거듭하고, 여러 출판사와 연을 맺으면서 지금까지 잘 전해지는 책이다.  

 

 

 

 

 

 

<꾼달리니 딴뜨라>와 <쿤달리니 탄트라>는 같은 책인데, 이번에 다른 출판사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나온 모양이다. 이 책은 여느 책과는 달리, 요가와 차크라, 그리고 꾼달리니(쿤달리니)에 대해서 체계적이고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중한 목소리가 담겨있다. 참고로, 요가에도 종류가 많은데, 쿤달리니 요가도 그 중 하나다. 우리가 요새 미용이나 다이어트로 요가를 많이 하지만, 그건 엄밀하게 말하면(인도의 시각에서 보자면), 요가라기 보다는 필라테스에 가깝다.  

 

 

 

 

내가 좋아하는 펠리니 감독의 책 한 권이 눈에 띈다. 겉장이 주는 느낌과 달리 꽤 쪽수가 많다. 펠리니 감독의 부인이자 뛰어난 여배우 줄리예타의 연기, 그 여자의 눈빛이 새삼 떠오른다. 그러나 쉽게 다시 펠리니의 영화를 보는 건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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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불교가 종교로 불리는지.. 약간의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일단 불교에는 다른 종교에서 내세우는 그러한 절대신(神)이 없다(우회적인 임시 방편으로 신을 다루긴 한다). 그리고 또 하나, 불교 안에는 긴 시간 동안 다르게 진행된 흐름들도 있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뭐라고 말한다"라기 보다는 "어떤 불교(학파, 종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불교가 다양한 이론들을 힘으로 정리하지 않고, 자체 논의를 통한 합리적인 선택을 기다리는 자세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이론들조차 인연에 내맡기는 태도라고 해야할까? 

따라서 종교라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논리학과 인식론(불교에는 이 둘이 엄격하게 떨어지지 않는다)이 발달하고 인과-관계성을 강조한다(절대신의 기적으로 바뀔 틈이 없다). 그것을 철학적? 전개의 모습으로 보자면, 이미 서양 철학에 훨씬 앞서 보여주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게, 아비달마를 비판하는 용수의 공사상(중관사상), 역시 아비달마(설일체유부)를 비판하면서 중관사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유식학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중관과 유식의 긍정적인 격돌 이후에 더욱 심화된 형태로 나타난 디그니가의 '아포하론'다르마끼르띠의 '찰나멸 논증'을 꼽을 수 있다.  

위와 같은 이론의 극단적인 몸짓들은 티베트로 흡수되어 다시 보존, 발달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불교의 치열한 모습이 담긴 책들을 몇 권 골라보았다. 

 

 

 

 

 

 

 

 

<- 일본의 대표적인 불교학자 마츠모토 시로의 이 책은, 보통 티베트하면 밀교를 떠올리는 고질적인? 분위기에 대한 비판의식과 더불어 티베트 불교철학의 온전한 줄기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업을 보여준다.  물론 티베트와 밀교(딴뜨라)의 깊은 연관성을 속된 이해로 치부하는 것도 지나친 단순화일 수 있겠다.       

 

 

 

 

섣부른 예감일지 모르겠지만, 프랑스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서양 철학의 마지막 향유가 사그라들쯤에, 그것을 넘어갈 힘을 불교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대개 창조적인 해석에 대해 조심스러워하고, 더군다나 최근의 철학 흐름에 대해 무지해서, 과거 불교에서 이룬 뛰어난 성과를 오늘날의 언어로 옮기거나 번식시키는데 썩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문헌학 기질이 있는 사람들이 철학-텍스트를 다룬다고 철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양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을 통해 불교, 특히 중관과 유식이 끌어올려지고 있는데, 서로의 닮은꼴을 비비는 차원은 넘지 못하는 것 같다. 얼추 비슷함을 발견하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비비는 작업에서 뜨거운 열이 나서, 예상치 못한 높이로 도약하는 그러한 발전을 기다려 본다. 

 

 

 

  

 

 

 

 

  

 

  

 

<-어쨌든 중관은 대개 비트겐슈타인이나 칸트, 유식은 현상학과 자주 비교되곤 했다. 이 책 역시 유식사상과 현상학을 같이 다룬 것인데, 저자는 단순하게 이 둘의 비슷함을 강조하려는 작업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현상학이라는 좀 구식이 된 사유에 대한 끌림이 없더라도 유식에 대한 새로운 각도를 통합 접근에서 의외의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잠깐 우리나라를 보자면, 원효나 의상 같은 큰 인물이 있다. 원효의 진가는 앞으로도 더욱 더 다양한 텍스트를 통해 드러날 거라는 예상을 해 본다. 최근에 나온 <스피노자와 붓다>처럼 서양에서 다소 이질적인 철학적 사유들이 불교를 통해서 (동양과 서양이라는) 경계를 비트는 새로운 방향을 암시한다. 그것이 초기 단계라 다소 들뜬 흥분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 충격이 여태의 철학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가장 중요한 변형은 수행적 실천에 있지 않을까? 

스피노자는 원효와도 만난 적이 있다. 신오현의 <원효 철학 에세이>에 실린 글 '스피노자 철학의 원효 철학적 해석'이 그것이다. 저자 신오현은 서양철학을 탄탄하게 거친 후, 동양철학 특히 불교로 방향을 돌렸는데, 불교를 철학적으로, 더 나아가 서양철학을 불교(철학)적으로 해석하기의 가능성까지 나아가려는 열의를 보여준다.  처음에 잠시 유식학에 관심을 두다가 어떤 계기로 원효를 만나게 되는데, 원효의 불학을 통해서 불교에 잠재되어 있지만 현재화 되지 않은 것과 근대 이후 서양철학이 다가왔지만, 벽에 부딪힌 한계를 넘으려는 시도! 그러한 몸짓이 있다.  

원효는 대승기신론과 화엄에 큰 관심을 쏟았다. 화엄을 다룰 때도 그 기본 바탕엔 기신론의 적용과 확장이 있는데, 이는 중관과 유식으로 벌어진 극단의 간격을 비판적 안목으로 화해하는 실천적인 해석학을 보여주는 것이다.  불교학이 유럽학자들, 거기다 일본의 렌즈를 거친 자료를 통해 연구되는 실정이라, 아직까지 원효의 가치가 크게 나타나진 않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불행이면서 다행이라 여긴다. 중관과 유식의 극단의 치우침을 역동적으로 건드려서 되살리려는 원효의 실천적 기질을 이어받을 수 있다면 상당히 훌륭한 성과가 나올것이다. 

 

 보통 불교의 옳은 방향을 아비달마의 요소들(실재들)을 파괴하는 작업들에서 찾는데(가령 용수), 그러한 불교 안에서의 모습 말고도 인도의 정통철학인 베단타와의 대결도 빼놓을 수 없다. 불교가 나왔을 때, 인도에서는 불교를 자이나교와 더불어 이단으로 여겼다고 하니,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본격적으로 불교를 공부하기에 앞서 전체적인 흐름을 익히는 것이 도움이 될 거 같다. 많은 불교사를 다룬 책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라모뜨의 이름은 남다르다. 그의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인데, 우리나라의 좁은 불교학 테두리에서만 그 울림이 작게 속삭였으리라..   

 

 

 

 

 

 

 

 

 

 

 

 

 

벨기에에 라모뜨가 있다면, 구소련에는 체르바스키라는 걸출한 불교학자가 있었다. 불교논리학에 대해 조예가 깊었는데, 불교를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선 이 사람도 그냥 지나칠 순 없을 것 같다. 

 

 

 

 

다만, 귀중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이 매끄럽지가 않아서 아쉽다(이 외에도 예전에 <소승불교개론>이라는 다소 얇은 책이 나온 적이 있는데, 지금은 구하기 쉽지 않다).  

 

 

 현대적인 불교 연구는 서양이 먼저 시작했다. 순수한 학문적인 입장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도우미로 시작한 것이지만, 그 성과를 단순히 부정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서양의 시각에서 들춰진 불교는 본래의 생기를 잃었을 게다. 왜냐하면, 불교는 단순히 이론적인 학문이 아니지 않은가. 자각과 체험, 그리고 실천이 빠진 불교는 대단히 위험한 이론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불교를 대하는 그러한 태도는 고스란히 동양의 학자들도 전수를 받고, 그것이 불교학의 원래의 방법인양 반복하고 있다.   

 

 

 

 

 

 

   

 

 

 

 

  

<현대불교학 연구사>는 고대부터 최근까지 불교가 어떻게 발견, 해석, 연구되었는지를 폭넓게 다룬 책인데, 불교학에 관심이 있다면 매우 좋은, 그리고 이런 주제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다.    칼루파하나도 세계적인 불교학자인데, 전에 시공사에서 <불교 철학사>란 이름으로 나온 책이, 이번에 다시 <불교철학의 역사>로 환생했다. 불교학계에 큰 논의를 일으킨 책이니 만큼, 기회가 있다면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불교, 불교학을 둘러보게 되면, 결국 우리나라 불교로 눈이 가게 마련이다. 우리나라 불교가 세계에 큰 반향을 준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학으로써 불교학의 역할이 더 필요한 부분이다. 

 

 

 

 

 

 

 

  

 

 <-최근에 나온 책인데, 불교 경전의 번역과 그 내막 등을 알기에 적당해 보인다. 특히 국내 저자들의 글 모음이라 더욱 반갑다.

 

 

 

 

 

<-아무래도 대승불교의 정수는 티베트로 많이 흘러 들어갔는데, 특히 중관사상의 새로운 발전상들도 찾아볼 수 있다. <불경의 요의와 불요의를 분별한 선설장론>이라는 낯선 이름을 가진 이 책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책이지만, 잠깐 멈춰서 살펴볼 가치가 있다. 쫑카빠는  티베트의 유명한 스님으로 이론과 실천을 두루 겸비했다고 전해진다. 이 책은 교상판석을 시도한 책으로 여러 비판적인 관점이 녹아있다. 유식과 관련된 해심밀경을 다루기도 하고, 용수, 청변은 물론 중관자립파나 중관귀류파 등 후기 중관 사상의 세세한 부분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 책까지 번역되어 나왔다는게 신기할 따름이다. 

 

 

본격적인 불교 공부에 관한 책이라서, 입문서 성격의 책은 빼고 실제적으로 불교의 참맛(그러나 적당히 어려운?)을 알려줄 만한 책을 골랐다. 그리고 유식과 중관에 대한 책은 다루지 않았는데, 이들은 본격적인 불교 공부에는 필수이기 때문에, 반드시 얕지 않게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위에서부터 차례로 추천하고픈 중요한 책들을 보자면, 맨 위에 다룬 <무상의 철학>, <열반 그리고 표현불가능성>은 현대적인 언어로 접근한 책이므로, 읽으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현대철학을 과거의 뛰어난 성취를 통해서 자극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티베트 불교철학>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는 책이다.  라모뜨의 <인도불교사>와 체르바스키의 <불교 논리학>도 불교학의 고전이자 중요한 책에 속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룬, <현대불교학 연구사><불교철학의 역사>도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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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inofilm 2021-09-04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정보를 얻었습니다

TexTan 2021-11-27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겨주신 글을 늦게 확인했습니다. 답글이 늦어서 미안합니다.

이응 2022-01-29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고 나니 지도가 그려지네요. 감사합니다. 이런수고로움 너무 감사하네요.

TexTan 2022-04-15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랜만에 들어와서 남기신 글 봤습니다. 답변 늦어 미안합니다^^
 

들뢰즈에 대한 나의 관심은 정치와 실천보다는 영화에 있다. 그의 영화 이미지에 대한 사유는 겉으로 보기엔 언뜻 "그래! 나랑 맞을 거 같아!" 이런 생각을 들게 한다. 하지만 읽어 갈수록  그리 쉽게 뇌에 스며들진 않는다. 그래서 다른 이의 '들뢰즈 읽기'를 통해 콩고물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나 두리번 거리기도 한다.  

 

 

 

 

나의 경우엔 클레어 콜브록 보다는 로널드 보그의 글이 더 이해하기 쉽다. 최근에 일본인 우노 구니이치의 책을 발견했는데, 들뢰즈에게 배우기까지 했다니까 왠지 (저절로) 신뢰감?이 생긴다. 지금 로도윅의 <들뢰즈의 시간기계>를 읽고 있는데, 클레어 콜브록의 <이미지와 생명>도 이어서 볼 예정이다. 들뢰즈-이미지에 대한 감이 조금 더 분명해지길 원하면서.. 

들뢰즈로 들어가는 문에 베르그송은 창조와 생성의 기운으로 어떤 쉼 없는 탄력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베르그송의 책도 정면으로 돌파한 적이 없는데,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을 것 같다.  

 

 

  

 

먼저, <창조적 진화>와 <물질과 기억>을 볼 생각이다.  그리고 나서 점검 차원에서 다른 이의 베르그송 풀이를 참고해야 겠다.  

최근 지젝에 의해 들뢰즈와 헤겔의 위험한? 근접이 있었는데, 이러한 시도는 왠지 그럴싸한 끼워 맞추기에 흐를 여지도 있다. 특히 당사자가 없는 상황에서 기묘한 지적 기질을 가진 자가 여러 우회로를 거쳐서 만들어내는 풍경은 자칫 일방적일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왜 헤겔이 들뢰즈와 닮았다고 볼 순 없겠는가? 그리고 니체는 어쩌란 말이지. 니체도 알고보면 예수와 (진정한) 기독교를 긍정했다는 해석도 나올테지. 그런 선행작업이랄까. 지젝은 니체가 말한 초인에 예수를 살짝 겹쳐놓기까지 했다.  

어쨌든, 사이비 해석과 진정한 그 무엇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자는 없을텐데, 잠시 누군가의 입담이 강한 분위기가 있는 건 사실이다. 

 

 

 

 

 

 

 

 

지금 현재, 가장 눈길을 끄는 책은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이다. 매우 두꺼운 책인데, 차근차근 한 번 읽어 볼 생각이다. 요새는 적대적인? 독서를 자주 하게 되는데, 들뢰즈와 라캉, 니체와 헤겔를 같이 읽어 나가는 건 묘한 긴장감이 있다.  

끝으로 책을 고르다가 이제이북스 책들이 좋은 가격에 판매중인걸 발견했다. 구입하고픈 책을 위주로 몇 가지 추려본다. 

 

 

  

 

 

 

 

 

이 중에서는 <플라톤과 유럽의 전통>, <기계 속의 생명>, 그리고 <살아 있는 인형>이 흥미로울 것 같다.

작은 책자로 나온 '아이콘 북스'와  '사이코 북스'는 아직 접해보질 않았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서 몇 권을 맛 볼 생각이다. 

  

 

 

 

 

 

 

 

      

 

 

 

 

  

 

 

 

 

 

 

 

 이런 작은 책자의 매력은 어느 정도 뽑기 운이 있는 것 같다. 적은 분량으로도 자글자글한 핵심을 잘 담아 낸 책이 있는가 하면, 그냥 머리 속을 스윽 지나가는 듯한 느낌만 나는 책도 있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 중에서 우선, 사도마조히즘, 거세, 승화, 초자아, 무의식, 환상, 성도착, 프로이트와 거짓 기억 증후군 등을 먼저 볼 것 같다. 역시나 요새 관심사라 그런지 정신분석 관련 책들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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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사람들의 눈과 귀를 잡아끄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야구다. 프로야구는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저기 일본을 거쳐 미국에서 벌어지는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는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기쁘게도 만들고, 초조하게도 만든다.  

야구는 구경하기에 그렇게 간단한 경기는 아닌 것 같다. 나야 어려서부터 재미로 보다 보니까, 저절로 규칙들은 어려움 없이 알게 됐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더러 있는 것 같다(여자들 중에는 꽤 있다는 보고가 있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한마디 하자면, 야구는 알면 알수록 묘한 재미를 주는 스포츠다(너무 상투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그냥 겉으로 보면, 던지고 때리고 달리는 것 같지만, 거기 안에 숨겨진 (긴장된) 정보들은 보는 사람의 심리를 극단으로 끌어 올리기도 한다.  

그렇다! 스포츠 중에 양팀 간 이렇게 정보전, 심리전이 치열한 것이 또 있을까? 한 선수의 신체 정보를 다 분석해서 장점과 단점, 그리고 공략법까지 데이터화해서 실제 경기에 활용하는 이 놀라운 세계..  흔히 쿠세라는 일본어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선수의 습관, 버릇을 통해서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예측, 대처하기도 한다. 가끔 이 쿠세를 서로 친한 양팀 선수끼리 알려준다는 얘기도 나돌곤 했다.

상황에 따라 포수가 투수에게 원하는 공은 달라지고, 그 공에 맞춰서 수비, 특히 내야수들의 위치도 변화한다. 마치 바둑처럼 수읽기는 야구에선 빈번한 일이다. 그래서 상황별로 고정된 패턴(정석)들이 있는데, 이를 역으로 삼는 경우들도 있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이다.  

그리고 야구를 투수놀음이라고들 한다. 강속구에다 제구력이 좋은 투수를 가진 팀은 상당히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야구가 투수 의존도가 높다고 하나, 결국은 한 점이라도 점수를 내야 이기기 때문데, 공격에서 분명 일을 내야 승리를 할 수 있다. 즉 15회 연장까지 투수가 퍼펙트로 상대 공격을 막아도, 자기 팀에서 점수를 내지 못하면, 이길 순 없다. 

 

 

 

 

야구에 관심이 가다보면 야구에 얽힌 이야기들에도 손이 간다. 특히 메이저리그는 야구선수 뿐만 아니라 평범한 야구팬들도 궁금해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고 이종남 기자라면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아는 분이다. 이 분이 번역한 '야구란 무엇인가'는 이 분야에서 매우 유명한 책으로 통한다. 두 권으로 나오던 시절이 있었는데, 최근에 두툼하게 한 권으로 새로 나왔다. 미국 메이저리그에 얽힌 미국식 야구 이야기고, 최근의 것들과는 멀지만, 야구장을 둘러 싼 내막들도 엿볼 수 있는, 좋은 정보를 갖춘 책이다.  

야구팬들이 선호하는 야구해설가가 있기 마련이다. 전에는 하일성, 허구연 해설위원으로 크게 양분되었는데, 요새는 그 중 한 분이 그 자리를 떠나 있기 때문에, 단연 허구연 해설위원이 큰 인기를 끈다. 이들의 어록도 있는데, 요새는 그의 독특한 발음과 얽힌 '허구연 어록'이 당연 대세다. 가령 이런 것들이 있다.   베나구(변화구), 스라이다(슬라이더), 쒀클 췌인지 압(써클 체인지업), 콘디숀(컨디션), 방맹환(박명환), 루헨진(루현진), 김벵헨(김병현) 등. 그리고 요새 가장 뜨는 어록이 있다면 "대쓰요(됐어요)". 

그에 반해, 하일성 어록은 간단하지만 여운이 오래 간다. 결정적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늘 하는 말, "야구 몰라요..." 

 

 

 

 

 

지금 WBC 국가대표 감독은 1회 대회때와 마찬가지로 김인식 감독이다. '믿음의 야구'로 알려진 분인데, SK의 김성근 감독 같은 정밀한 분석(데이터 야구) 보다는 자신의 '감'으로 밀고나가기도 하는 승부사 기질도 엿보인다. 대표팀 감독직을 꺼려하는 분위기(왜 그럴까?)에서 불편한 몸으로 다시 중책을  맡았는데, 좋은 결과를 기대해본다. 

 

 

 

 

야구의 본고장은 미국이라지만, 세상에는 미국식 야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메이저리그와 성격이 다른 리그들도 존재한다. 특히 동양이 그러한데, 일본과 한국, 대만이 그렇다(최근 중국도 가세). 일본은 동양야구를 대표하는데, 상당히 섬세하고 작전이 많은 편이다. 아마 우리나라 프로야구 팀 중에서 SK가 여기에 가까울 듯 하다.  상대편 선수의 투구나 타격 자세에서 어떤 습관이나 버릇을 읽고, 그것을 치밀하게 분석해서 경기에 활용하는 것도 일본 야구에선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아무리 잘 나가는 선수도 일단 약점이 잡히면 철저하게 공략을 당하는데,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일 년짜리 선수로 전락하기 쉽다.   

힘을 앞세우는 미국식 야구는 북남미 전체로 퍼져 있다. 메이저리그에도 유명한 선수들은 남미출신들이 많고, 최근 WBC에 참가한 멕시코나 베네수엘라에 대표팀만 보더라도, 쟁쟁한 이름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경기를 보자면, 시원시원한 맛은 있지만, 역시 잔재미는 덜하다. 대개 선수들의 역량에 맡기는 편이라, 결정적인 순간에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작전들은 적다. 아마도 일본식 야구는 그러한 힘의 부족을 다양한 작전과 조직력으로 변용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 야구는 그러한 일본의 영향이 강하긴 하지만, 또한 힘으로 밀어 붙이는 면도 가졌다는 평을 듣는다. 

내일이면 다시 한번 일본과 맞대결을 벌인다. 거의 무결점에 가까운 일본 야구가 유독 실점을 범한 상대는 우리나라였다. 일본이 경계를 할 만큼, 우리야구가 이렇게 성장햇다니 상당히 뿌듯하다. 예전 한일슈퍼게임이라고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일본은 형식적으로 우리야구를 대했고, 주전이 많이 빠지고서도 수월하게 이기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일본이 촤강의 선수를 구성해도, 우리한테 이긴다는 게 쉽지가 않다.  

아직도 프로야구 수준으로 보자면, 일본이 앞서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단일팀을 구성, 단기전의 경우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승부는 예상하기 어렵다. 내일도 역시 그러한데, 우리는 일본보다 잃을 것이 덜하다. 그리고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다양한 전법(빅볼, 스몰볼)을 충분히 구사했다. 이런 상승세라면, 또 한 번 일본에게 한국야구의 힘을 각인하는 날이 되지 않을까?   

 

*덧붙임 

위에 보이는 것처럼 야구책 페이퍼를 몇년 전에 썼는데, 요새(2011년 6월) 다시 야구책을 찾아보니, 전보다 더 많은 야구책들이 나와 있다. 특히 질적으로도 꽤 좋은 책들이 눈에 띈다.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야구에 대한 페이퍼를 쓰고 싶은데, 그 전에 우선 책들을 골라서 여기에 옮겨 심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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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지젝에 관한 책을 읽었다. <슬라보예 지젝>(김현강 지음)이란 책인데, 지젝과 라캉에 관심이 있지만 가까이 가면 약간 두통이 생기던 분들에겐 새로운 처방전 역할을 할 거 같다. 이 책을 본 김에 요새 지젝과 라캉의 출몰현황(신간 소식?)을 살폈더니, 눈에 띄는 것들이 여럿 보인다. 

 

 

 

 

라캉의 '세미나'를 드디어 우리말로 맛볼 수 있다. 1권부터 차례대로가 아닐지라도, 이제 시작인데 어쩌랴! 이 상황에서 에크리 번역까지 기다리는 건 큰 욕실일까?            최근 라캉에 관한 책 중에선 캐서린 벨지의 <문화와 실재>가 끌린다. 책의 차례를 보니, 독특한 구성은 아니지만, 여태 라캉과 관련하여 생긴 많은 문제들 중에서 중요한 것을 잘 포착해서 구성한 모습이 엿보인다.번역만 괜찮다면, 좋은 지식을 얻을 것 같다. 

<라캉 거꾸로 읽기>는 시인이기도 한, 이승훈씨의 책인데, 라캉에 대한 글이라기 보다 (자신의) 라캉 소화와 그 배출의 풍경을 담아내지 않았을까, 예상이 간다. 이 분의 다른 책들을 보니까, 지식의 폭이 상당히 넓다. 약간 옆길로 새는 감이 있지만, 몇 권을 추려본다. 

 

 

 

 

모더니즘에서 해체, 라캉에 이르는 큰 주파수 대역이 느껴지는데, 특히 눈이 가는 책은 <선과 기호학>이다. 나도 최근에 '간화선'이 심상치 않게 보여서, 공부할 기회를 찾고 있는데, 기호학과 선을 다룬 책이 있다니 꽤 반갑다. 내용도 기대에 미친다면 더 근사한 일이지만. 

화두를 뜬구름 잡는 말장난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것을 기표의 차원에서 바라볼 이론적인 도구들은 지금, 간지럽게 서성이고 있다.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는 지젝의 본격적인 징후가 보이는 책이기도 한데, 굳이 완성도?를 들먹인다면 편견과 억지도 세련된 여과없이 떠도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지젝에겐 문제될 것이 없을 수도 있다. 지젝 특유의 실천을 독려하는, 그리고 그 자극이 독자들에게 전달된다면, 그것으로 된 거니까.  

 

 

 

 

 

 

 

<죽은 신을 위하여>를 굳이 꼽지 않더라, 이제 슬슬 지젝의 여인이 라캉보다는 헤겔임을 눈치채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를 믿는 지젝이 즐겨 읽는 헤겔! 그리고 효과적인 도구로서의 라캉.  

최근 지젝이 관여한(서문) 책들이 나오고 있다. 

Revolutions 시리즈인데, 지젝은 물론 그의 동료 알랭 바디우도 보이고, 테리 이글턴, 마이클 하트의 이름도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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