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책을 주문하다가 너무 오래 방치한 누군가?의 서재에 잠깐 들렀다. 그 누군가는 아마도 나...일 것이다.

 

 

 

 

<영화로 읽는 정신분석>이라는 이 책의 느낌은, 부제 '... 치유하는 영화읽기'가 오히려 더 알맞다. 제목은 왠지 어려운 느낌이 나는데, 그렇게 깊게 이론적으로 파고들지 않는다. 아마도 정신분석과 관련된 뾰족한 용어들이 작은 산을 이루는 책들에 대한 저자의 염려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친절함에 비해선 뭔가 끈덕지게 남는 지적인 중량감은 떨어진다. 특이한 건, 이 책의 저자는 쥐를 잡는데 고양이의 색깔을 문제삼지 않는 실용적인 입장에서 융과 라캉을 동시에 활용하고자 하는 의욕을 보여준다.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고기를 잡을 때, 그물과 낚시를 동시에 쓰는 경우는 없지 않은가? 인간의 문제는 산술적인 것(가령 1+1=2)과는 다르게, 제대로 된 초점 하나를 잘 잡아서 들어가는 길에서 풀리는 일도 있다. 어쨌든, 저자의 태도는 한 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꺼리가 된다고 본다. 

<라캉과 한국영화>에 실린 글들의 제목을 보니까, 위에 저자가 왠지 달가워 하지 않을 거 같은, (라캉식) 용어 주위에 포진한 과잉이 느껴지는 짧은 늘어섬들이 눈에 띈다. 발산은 하지만 왠지 속 깊이 스며들지 않을 거 같은 텍스트가 아닐까? 미리 설레발 예감을 해본다.

새벽에 갑자기 주문을 한 <라캉과 영화 이론>은 '라캉과 영화'를 좀 더 분명하게 묶은 책이 아닐까싶다. 번역은 읽어봐야 알겠지만, 왠지 그리 나쁘진 않을 거 같다. 난 라캉보단 들뢰즈에 더 가까운 기질이 있다고 여기는데, 오히려 라캉에 관한 책을 훨씬 더 많이 보는 거 같다. 왜 그럴까? 

라캉과 영화.. 이 지점에서 이젠 영화를 낭만적이고 감상적으로 보기엔 글러먹은 것 같다. 영화 안에서 감상자 자신을 비춰주는 섬뜩한 거울들을 만나게 되는 풍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새 너무 오랫동안 책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다. "나의 게으름을 남에게 알리지 마라!". 정말이지 '게으름에 이르는 길'을 어쩔 수 없이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아침에 동아일보를 보다가 신간에서 '지젝'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요새 띄엄띄엄 읽고 있는 책이 <까다로운 주체>인데, 중간을 넘어서 버틀러 부분을 훑고 있는 중이다. 이걸 끝내면, 사 놓고 고히 책장에 모셔만 둔 <신체 없는 기관>을 볼 작정이다.

 

 

 

 

<지젝 Zizek>은 그 전에 나온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나 <슬라보예 지젝>과는 조금 차이가 느껴진다. 급하게 그의 사상을 요약해서 알려주려는 목적보다는 하나의 체계적인 지도를 담은 듯한 느낌이다. 우선 눈에 띄는 건, 지젝의 물리적 태생 지점인 슬로베니아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이다. 지젝은 직접적으로 강하게 자신의 나라에 대해 긴 연설은 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하나의 회귀마냥 과거의 기억으로, 혹은 정치적인 문제와 결부해서 건드리곤 한다. 스스로 자신을 백인 남자?로 여기기도 하지만, 그도 어느 정도는 이방인의 자리에 있음을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믿을만한 번역자가 옮겨서 오역에 대한 두려움은 일단 접을 수 있을 것 같다. 헤겔-라캉-맑스로 이어지는 삼각구도 안에서 지젝이 어떻게 이 힘들을 승화시켜 나가는지를 조금은 엿볼 수 있지 않을까?  

 

 

 

 

 

<감각의 논리>가 새롭게 번역되어 나왔다. 들뢰즈는 화가로는 베이컨, 영화(감독)으로는 알랭 레네를 주목한 거 같다. 이들은 자기 분야에서 전하고는 전혀 다른 방법을  구사했고, 그러면서도 과거의 찌꺼기가 결국 발목을 잡는 꼴을 피하는 과감성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즉 발전보다는 비약에 가까운 시도였으리라..

궁금한게 있다. 대개 라캉과 들뢰즈를 거의 비슷한 무게를 두고 읽는 사람들이 많을텐데, 과연 이 둘 중에 그래도 누구의 손을 들어주고 싶을까? 물론 지젝이 <앙띠 오이디푸스> 이전의 들뢰즈는 라캉과 대척관계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하지만, 어떤 큰 흐름을 돌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게다가 큰 걸림돌인 니체를 알렌카 주파치치가 <정오의 그림자>에서 아주 가는 빛으로라도 라캉과의 이어짐을 시도하지만, 오히려 읽은 소감은 말레비치의 검은 표면과 더 밀착된 느낌이었다.

어쨌든, 들뢰즈와 라캉의 긴장된 역학 관계는 언젠가는 한쪽으로 대세가 기울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라캉의 지젝처럼 들뢰즈에게도 누군가 하나 걸출한 인물이 나타난다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스티븐 컨의 <육체의 문화사>라는 책이 탐이 나는데, 이 책은 아쉽게도 절판이다. 이 사람은 지식의 재단사라도 되는지, 방대한 시간에 흘러가는 지식들을 알맞은 구획으로 잘 포개어 담아내는 것 같다. 빅토리아 시대부터 현대까지 다룬 <사랑의 문화사>도 왠지 흥미로울 것 같다.

켄타우로스.. 하체는 말처럼 힘있고 야생적인 네발인데, 상체는 인간의 모습을 한 반인반수. 그렇다면, <켄타우로스의 비평>에 담긴 몸놀림은 어떠할지 대강 짐작이 된다. 얌전하고 차분한 글쓰기는 아닐 터. 최근에 국산 텍스트의 섭취가 적었음을 반성하면서 발견한 책인데, 실제 섭취로 이어질지는 아직 모르겠다.

 

 

 

 

 

미술에 대한 책도 읽어야 한다. 누가? 나 말이다. 요새는 특히 '알레고리'를 익히려고 애쓰는 중이다. 이것만을 다룬 책이 나오면 좋으련만, 아직 보이질 않는다.  <미술사를 보는 눈> 같은 책도 한번 보면 미술에 대한 차분한 시력을 조금 높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우선 알베르토 망구엘의 <나의 그림 읽기>가 읽고 싶어진다.

미술, 미학에 관한 책을 자주 쓰는 진중권의 책은 뭔가 좀 아쉽다. 물론 스스로 많은 자료를 깔끔하게 정리해서 옮기는 작업, 그 노고가 깃든 책이겠지만은.   <미학 오디세이>, <천천히 그림 읽기>, <성의 미학>,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등을 읽었고, 현재 <춤추는 죽음>을 보고 있는데, 언제나 <미학 오디세이>의 약간 다른 변주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뭐가 부족할까? 그건 그의 책 제목에도 찍혀 있는 바로 '상상력'이 아닐까? 기존 미학 견해에 대한 얌전한 수거와 정리 이상을 보여주면 좋으련만. 특히 <성의 미학>에서 너무 단순한 페미니즘 시각은 예상외로 놀라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구름 속에서도 빛은 숨어 있는 법.

 

 

 

 

<춤추는 죽음>은 필립 아리에스<죽음 앞에 선 인간>에서 다룬 미술 자료들을 토대로 저자가 다시 선별 작업을 거친 책이라고 한다. 전에 <미학 오디세이>가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에서 모티브를 얻었듯이 말이다. 이렇게 대가의 방향에서 힌트를 얻어 스스로 무언가를 보태어 약간 다르게 돌출해내는 작업도 하나의 센스가 아닐까? 굳이 장점을 찾자면 말이다.

끝으로 필립 아리에스의 책들을 적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보다 볼 만한 영화들이 DVD에 실려서 많이 나온다. 가끔 영미의 영향권 밖에 있는 영화들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은근히 흥분되는 일이다.

 

 

 

 

자이 장커 감독은 젊다. 중국 아니 아시아 영화의 어떤 새로운 줄기 하나를 세우고 있는 감독 중에 한 명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이미 <임소요>라는 영화로 범상치 않음을 알렸는데, 최근에 본 <세계>는 그 전에 보던 중국 영화하고는 뭔가 많이 달랐다. 재미로 따지자면, 쉽게 남한테 권할 영화는 아니지만 말이다.      

<비정성시(A City of Sadness, 1989)>라는 영화로 중국 영화의 묵직한 획을 하나 첨가한 허우 샤오시엔 감독.. 그 이후엔 제대로 된 필력을 보여주질 못하는/않는 것 같다. 언제부턴가 서기라는 여배우를 자주 쓰는데, <밀레니엄 맘보>, <쓰리 타임즈>.. .  <쓰리 타임즈>는 좀 건조한 영화다. 두 남녀가 서로를 마주보면서 습기찬 애정을 전하기 보다는 무작정 그녀의 흔적을 찾아 다니는 한 남자의 흐름이 두드러진다. 비가 추적추적 내릴 때, 아프로디테스 차일드의 'Rain and Tear'는 건질만한 순간이다. 이 영화의 남자배우 장 첸은 최근 김기덕 감독의 영화 <숨>에 나오기도 했다. 그 전에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도 참여했던 옴니버스 영화 <에로스>에서 왕가위 감독 연출분에 공리와 함께 나오는데, 다른 영화들에서 보여주지 않은 모습을 연기한다.  다시 허우 샤우시엔 감독으로 초점을 옮기면, 최근작이라 할 수 있는 <카페 뤼미에르>는 유럽 영화인들에게 큰 영향을 준 감독 오지 야스지로의 <도쿄 이야기>의 현대판 버전이다.  좋은 영화라면 어디선가 나타나는 아사노 타나노부도 나온다.

<색계>는 시간을 내어 따로 페이퍼를 써야겠다. 영화적 해석을 자극할 만한 짙은 심리의 꼬임이 침대 위에 걸터 앉아 있는 영화다. 아마 지젝이 좋아할 영화가 아닐까싶다.

 

 

 

 

 

 구로사와 아키라.. 일본엔 정말 탐나는 감독들이 많다. 오즈 야스지로, 이마무라 쇼헤이, 미조구찌 겐지, 신도 가네토 등등.   <자전거 도둑>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감독 비토리오 데 시카의 박스세트도 눈에 띈다.

셰익스피어를 전에는 세익스피어라고 한 거 같은데.. 어쨌든, 문학으로서가 아니라 연극이나 영화로 자주 만나도 그가 발산하는 '인간이 처한 상황'의 떠도는 상징들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좀 익숙하지 않은 영화를 보도록 하자. 알제리에서 태어난 토니 갓리프 감독의 <추방된 사람들>은 영화를 찾는 사람들한테는 알려진 편이다. 최근에 아르젠토 감독의 딸 아시아 아르젠토가 나온  <트란실바니아>도 있는데, 다소 싱거운 맛이 나는 영화다. 여배우의 약간의 광기어린 모습들은 그렇게 와닿지도 않고 말이다.   커다란 상복이 있는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 중에 하나를 만날 수 있다. <로제타>, <아들> 들도 유명한데, 이 영화 <더 차일드>도 역시 칸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 동양인이 보기에는 약간은 좀 수긍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아니면 우리가 너무 할리우드 영화의 자극에 익숙해져서 섬세한 영화적 감각들이 둔해졌는지도..

 

 

 

 

 

우선 새로운 이미지의 도래를 알리는 영화들. <베오울프><벡실>, 그리고 그 전에 극장판을 통해 그 이미지의 도발을 감행한 <공각기동대>의 후예들(TV판을 비롯한 시리즈)..  <베오울프>는 좀 놀라운 영화다. 우리가 미래에 '이럴 것이다'라고 예감했던 이미지를 어느 정도 맛볼 수 있는 영화였다. 정말 배우 없이도 실사에 버금가는 영화들이 나올 것만 같다.    <벡실>은 <베오울프>의 기술적인 노선과는 다르다. 실사 영화와 착각할 만한 이미지가 아니라, 오히려 만화적 이미지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는 방향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다른 차원에서 어떤 쾌감을 선사하는데, 그것은 바로 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베오울프>처럼 점차 그 틈이 사라지게 되면, 처음에 받은 충격은 이내 당연시되기 쉽다. 그 변화의 (작은 시간)과정에서만 우리는 놀랄 뿐이다.  <베오울프>를 말하면서 안젤리나 졸리를 빼 먹으면 김빠지는 장사다. 유혹과 대가(재앙)의 되물림이 우리 욕망이 게으름피우지 않게 자극하는 성난 엄마의 손찌검이 아닐까? 무슨 말인지 통.. 

 

'개별 11인'이라는 어색한 제목을 가진 공각기동대 TV시리즈 2기의 합(Ghost In The Shell - Individual Eleven)이라 할 수 있는데, 비쥬얼에서 큰 공을 들였다면, 극장판으로 나와도 손색이 없을 구성을 갖고 있다. 줄거리의 핵심적인 것은 이미 그 전에 선보였던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괜찮다. 이상하게도 공각기동대는 극장판은 대단히 정성을 들여 만들어도 죽을  쑤는데, TV판은 오히려 인기가 많다. 나는 오히려 극장판이 더 끌린다. 왠만한 영화는 두 번 보질 않는데, 공각기동대 극장판은 2-3번은 봤으니 말이다.  과연 3번째 극장판이 나올 수 있을지.. 기다려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드제플린의 비장한 사랑 노래라고 볼 수 있는.. Babe I'm Gonna Leave you

그들의 풋풋한 모습이 담긴 라이브 영상

 

이 곡은 원래 유명한 포크 뮤지션 존 바에즈의 곡이다. 하지만 그녀의 원곡하고는 너무나 다른 느낌으로 변했다.  제플린답게 소화해내는 능력이 아닐까?

이러한 비슷한 정서는 제플린의 마지막 앨범이라 할 수 있는 <In Through The Out Door>에 담겨 있는

'I'm Gonna Crawl'에서도 긴 시간의 간격을 두고 더 처절해진 느낌으로 만나 볼 수 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exTan 2008-02-29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 링크를 잘못 걸었는데 수정했습니다.
 

봄기운이 살랑거린다. 파란 새싹처럼 싱그러운 책들은 어디서 피어나고 있을까?

 

 

 

 

그리스 문명이 검은 대륙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영향이 컸음을 말하는 책이 있다. <블랙 아테나>. 검고 도발적인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례들이 동양의 뿌리에 서식하는 심리층들에게 어떤 위안을 줄 순 있겠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결국 흥미로운 주변의 풍경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타당한 증거들이 지식의 표층을 새롭게 장악하리란 순진한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요새는 유행이다. 암울한..

지젝을 읽으면서 가라타니 고진도 함께 읽는데, 상당히 효과적인 '읽기'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중이다. 둘은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뭔가 기존의 익숙한 지식의 말뚝을 제거하는 '태도 변경'을 독려한다는 점에선 실천적인 면이 있다. 어쨌든, 앞으로 고진을 (독서로써)고집할 생각인데, 그를 비판하기도 한 아즈마 히로키의 책을 하나 발견했다. 우선 이 책,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으로 만족해야겠다. 전에는 몰랐지만, 일본에는 제법 눈에 띄는 (지식) 검객들이 활동한다. 그 검술이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모양인데, 우리나라로 눈을 돌리니 참 그렇다.  

 <- 아즈마 히로키에 관심이 있어 찾아보니까, <현대일본사상>이란 책이 보인다.  아사다 아키라의 <구조의 힘>(우리나라에선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로 나옴)에서부터 나카자와 신이치, 가라타니 고진 등 일본 열도의 지능적 힘줄을 훑어 볼 수 있다. 이상하게 일본 지식인들을 유럽이나 미국 학자들에 비해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들뢰즈 영화 이론에 대한 책은 몇 권 보이지만, 그것을 응용한 것은 찾기 힘들었다. <시각문화의 매트릭스>는 그래서 반갑다.           아마 들뢰즈와 라캉 사이에서 긴장된 읽기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을 터.. 나도 그런가?  들뢰즈의 형, 니체의 짜라투스트라 혹은 차라투스트라가 이번엔 '짜라두짜'로 등장했다. 여태의 번역과는 다른 새로움이 느껴지는데, 왠지 정이가는 니체의 흔적이다보니, 나도 곧 이 책을 손에 쥘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문맥에 맞지 않게도 앞에다 썼다) 라캉이나 지젝, 혹은 고진을 읽으려면 그들의 텍스트 군데군데 곰팡이처럼 따라다니는 제임스 조이스나 바흐친을 회피하기 어렵다. <조이스와 바흐친>이라니.. 두 마리를 하나에 가둔 책이 보인다. 셰익스피어도 결국은 본격적으로 읽어야 할 텐데, 우선 <한 권으로 읽는 셰익스피어 4대 비극 5대 희극>, 이런 책으로 잠시 무마해 볼 생각도 든다. 난 곰처럼 우직하게 읽기보단 요령을 피우니까 말이다.       <언어와 이데올로기>는 전에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으로 나온 적이 있다. 왜 원래 제목과 다르게 나와서 헷갈리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난 그것도 모르고, 절판된 이 책을 헌책방에서 열심히 찾았다.

<20세기 서양 철학의 흐름>이라.. 이렇게 종합적으로 모아 놓은 책들은 피했었는데, 요새 돌아가는 사상의 흐름에 점점 둔해지는 기분이다. 철학은 정말 끝없이 유혹하는 덫이 아닐까? 철학은 죽었다고 외치는데, 그것은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죽은 것들이 오히려 더 질긴 오염력을 갖는다. 그걸 안다고 벗어날 순 없는 문제다. 신이 그렇고 종교가 그렇지 않은가?

오늘 책 오디세이에서 좀 동떨어진 분위기의 책 <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위하여>. 제목 참 멋지다. 읽지 않고 괜히 섣불리 판단을 내리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런 책은 우리에게 '태도 변경'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자극적인 알갱이들, 그 풍부한 껍데기들로 우리를 유혹하는 책이 아닐까? 그래도 이 유혹으로 도피하고/들어가고 싶기도 하다. 모든 책이 전혀 새로운 품종의 씨앗들이라면, 우리의 눈은 곧 두려워할테니까. 세속의 못된 관성을 즐기고 싶은 히스테리 환자들이니까.. 우리가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