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어떻게 생각하니?
아버지는 여든이 넘도록, 오른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은 것을 빼면 그 나이의 남자치고는 경이로울 만큼 건강해 보였지만 여든여섯에 안면신경마비에
걸렸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은 플로리다 의사의 오진이었다. 본래 이 병은 바이러스 감염으로 발생하며 보통
일시적으로 얼굴 반쪽이 마비된다. (9쪽)
이렇게 다섯 줄,
두 문장을 읽고는 나도 모르게 “하아… ”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나는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가. 나는 필립
로스, 필립 로스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그러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늦은 오후부터 그 다음날 아침까지 나는 필립
로스를 읽었다. 웃으면서 읽었고, 책을 덮고 나서는 다시
펴서 한번 더 읽었다. 그를 읽을 때 내가 느꼈던 불편함은 한 켠에 쌓아 두었다. 오랫동안 치우지 않아 정체 모를 다용도실 상자 속 그 물건처럼. 긴
시간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청소 타임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레베카 솔닛은 그녀의 책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에서 두 번이나 그의 이름을 언급했다. 보내야 하는가. 나는 필립 로스, 필립 로스를.
장소는 부엌 및 거실. 식탁에 앉아 러스크를 먹는 딸아이를 쳐다보며 이 부분을 읽는다.
잘 들어봐아. 이게 무슨 말인지.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버지는
자신에게 돈을 쓰는 것에는 옆에서 보기에 짜증이 날 정도로 인색했다. 두 손자가 돈이 필요하다 할 때는
망설임 없이 활수하게 내어주었음에도 자신이 좋아하거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사지 않고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을 계속 절약했다. (25쪽)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 근데, ‘활수하게’래. 활수하게!!
처음 듣는 단어인데. 그러게, 엄마도 그래. 활수하게, 활수하게!!라니…
활수하다 : 무엇이든지 아끼지 않고 쓰는 솜씨가 시원스럽다. (네이버 국어사전)
필립 로스를 사랑하는 나는, 그의 책을 번역해 주신 정영목님도 사랑하게 되고, 그렇게 우리는
삼각관계가 된다. 마음을 가득 채우는 황홀한 행복감에 유일한 홍일점인 나는 기뻐 어쩔 줄을 모른다. 그 때, 저 쪽 구석에서 조용히 자전거를 타고 있던 둘째가 말한다. 계속 읽어봐 봐,
엄마. 계속 읽어줘.
그러니까, 듣고
있었던 것이다. 무심한 듯 페달을 돌리는 이 깜찍한 초딩도 필립 로스,
정영목님에게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이 필립 로스꺼야. 필립 로스!
아~~ 로스 (네 친구니… ㅠㅠ)
너, 필립
로스 알아?
알지, 엄마가
하도 필립 로스, 필립 로스 했으니까. 알지~~.
그랬던 것이다. 나는
필립 로스, 필립 로스 하면서 살았던 거다. 미국의 생존
작가 중 최초로 라이브러리 오브 아메리카 (Library of America, 미국 문학의 고전을 펴내는
비영리 출판사)에서 출간한 완전 결정판(총9권)을 다 구매할 수는 없으니(구입하지 않아도 된다. 구입해도
읽기 어렵다), 화면 속의 사진을 닳도록 보고 또 보았던 것이다. 그의
작품에도 나오는 ‘유대인의 코’, 얼굴 전체를 가늠하는 ‘유대인의 코’를 말이다.
하도 들고 다니며 읽어, 두어 군데 뜯겨져 나간 <유령퇴장>을 제외하고는 완벽하게 깨끗한 필립 로스와 필립 로스들. 나는
이렇게 필립 로스, 필립 로스 하며 살았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들릴 때마다 ‘필립 로스’ 자리에 가서는 한 권씩, 한 권씩 구입해 모아두었다. 물론 읽는 것보다 구입하는 데에 방점을
찍었기에 이 아름다운 컬렉션이 가능할 테다. 읽지 않아도 좋아, 나는
필립 로스의 색감마저 사랑한다. 보라색의 그와 분홍색의 그를, 주황색과 노란색의 그를, 나는 사랑한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랑했고 그리고 사랑하는 필립 로스를 읽는다.
필립 로스. 아, 나의 필립 로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