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는 우리의 공적인 삶과 더불어 각자의 사적인 삶까지도 비쳐주는 거울이 될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가장 개인적인 경험과 가장 견고하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가설들을 재평가하라고 촉구하기 때문이다. (285쪽)
여성주의/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읽어가면서 놀랄 때가 있다.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여기지 않았던 작은 말, 작은 이야기들이 우리 삶의 특정 부분을 꼭 집어 말해주고 있다는 걸 깨우칠 때다. 요즘에 자주 하시는 말씀은 아닌데,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에, 엄마는 이야기 끝에 외할아버지의 말씀을 옮기곤 하셨다. “오죽 죄가 많으면 여자로 태어났을까.”
초딩이었던 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죄로 연결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여자이기에 겪는 죄의 무게에 대해 알지 못 했다. 엄마는 엄마의 고통만큼 이 말을 삶으로 받아들였다. 외할아버지는 여자로서의 삶, 쉽지 않은 삶을 살아가게 될 사랑하는 딸에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당부하고 싶으셨던 건 아닐까. 오죽 죄가 많으면 여자로 태어났을까.
다른 예를 들자면, 이렇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저는 197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1981년부터 판사로 일했지만, 초기에는 함께 일하려는 ‘남자’ 판사도 드물었고 ‘남자’ 직원도 드물었습니다. 판사이지만 그냥 ‘판사’가 아니라 ‘여자’ 판사였기 때문이지요. ‘여자’ 판사는 종종 출산휴가를 한달도 채우지 못한 채 재판장의 전화를 받고 출근해야 했고, 사무실에서 반말 전화를 받기도 했고(그때마다 항의를 했지만 사과를 받은 일은 거의 없습니다), 때로는 법정에서 재판 진행권을 침해당하기도 했습니다. 판사인데도 그랬으니 다른 직종에서는 얼마나 더 심한 일들이 벌어졌을지 뻔하죠. ... 여성으로서의 삶 자체가 소수자로서의 삶이었던 시대(지금은 다른가요?)를 살아왔던 제게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해야 한다는 것은 따로 계기가 필요하거나 배워야 할 필요가 없는, 마치 평상복처럼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129쪽)
이 글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하나도 없다. 김영란 전 대법관이 판사로서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이유는 오로지 하나다. 그녀가 ‘여자’라는 점. 그녀는 ‘판사’가 아니라 ‘여자 판사’이므로, 사람들은(대부분 남자일 것이라 추정되는 그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 분쟁의 최종 판단자로서 최고의 권위를 소유한 그녀에게 반말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재판정에서 억지를 부린다. 그녀가 여자이므로.
프랑스의 유물론적 여성주의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소개할 인물은 콜레트 기요맹 Colette Guillaumin이다. 기요맹에 따르면, 남성은 노동인구의 구성원이라거나 의사 결정자라거나 하는 식으로 어떤 자리에서 저마다 갖는 사회적 가치에 따라서, 즉 그들이 하는 일이라는 측면에서 주로 규정되고 명명된다. 반면에 여성은 성별이라는 측면에서 주로 규정되고 명명된다. (223쪽)
김영란 전 대법관의 개인적 경험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일하는, 일하고자 하는, 일하고 있는 모든 여성들에게 해당된다. 그녀들은 직무가 아니라, 성별이라는 측면에서 주로 규정되고 명명된다.
엘렌 식수Helene Cixous는 여성을 억압하고 침묵에 빠뜨리는 가부장제의 이항대립적 사고의 기반을 약화시키거나 무너뜨리는 언어로 여성적 언어를 말한다. 또한 이런 종류의 언어가 이른바 여성적 글쓰기ecriture feminine를 통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다고 믿는다. 여성적 글쓰기는 자유로운 연상에 따라 유동적으로 구성된다. 여성적 글쓰기는 미리 정해진 ‘올바른’ 구성법, 합리적인 논리 규칙(경험 인지에 관한 협소한 정의에 근거하여 다양한 종류의 감정적, 직관적 경험을 불신하는, ‘머릿속’에서만 머무르는 논리), 선형추론 linear reasoning(x 다음에는y가, y다음에는 z가 온다는 식의 추론)등을 요구하기 마련인 가부장적 사고방식과 글쓰기 양식에 저항한다. (228쪽)
여성적 글쓰기,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역시나 다락방님이다. 자유로운 연상에 따라 유동적으로 구성되는 여성적 글쓰기의 전형이다. 가장 큰 증거는 그녀의 글에 있다.
이제 다 쓰고 등록버튼 누르려는데, 내가 뭘 쓰기 위해서 이 페이퍼를 썼는지 모르겠다.
끝. <till we meet again>
음.. 스티븐 킹 소설 이야기를 하다가 왜 여기까지 왔지? 두줄짜리 쓸라 그랬는데 또 이렇게 되어버렸네… 인생… 글이란 무엇인가….. 의식의 흐름……………
그럼 이만… <타고난 이야기꾼>
나는, 다락방님이 자신의 글쓰기 방법이 가부장제의 이항대립적 사고의 기반을 약화시키거나 무너뜨리는 여성적 글쓰기의 한 형태라는 걸 알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런 글쓰기 방법 혹은 형식이 의도적이었다면 그녀는 정말 영리한 게 틀림 없고, 의식하지 않고 이런 글쓰기를 계속해 왔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영리하다는 확실한 증거다.
가을 하늘이 높고 푸르다. 아직 추석은 오지 않았지만, 여하튼 오고는 있다.
추석 읽을거리를 대충 챙겨본다. 부족한 감이 느껴지려는 찰나, 들려오는 목/소/리/
염려 붙들어 매소서.
신에게는 아직 『제2의 성』이 남아 있사옵니다.
가부장제는 그 정의부터 성차별적이다. 말하자면, 가부장제는 여성이 남성보다 선천적으로 열등하다는 믿음을 조장한다. 이 같은 믿음은 이른 바 생물학적 본질주의 biological essentialism의 형식을 띠는데, 왜냐하면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을 불변하는 본질의 일부로 간주하고 거기서 찾아낸 생물학적 차이들을 여성의 타고난 열등성에 대한 믿음의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198쪽)
여성은 언제나 자신과 계급, 인종, 종교가 상이한 다른 여성이 아니라 자신과 사회적 계급, 인종, 종교가 같은 남성에게 전념한다. 사실, 같은 계급, 인종, 종교 안에서도 여성은 여성 대신 남성에게 전념한다.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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