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을 먼저 쓴다.
명예살인이 가진 여성 폭력, 가정 폭력, 아내 폭력의 측면보다는 '살인'임을 강조할 것.
히잡은 가부장제 억압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자기표현 중 하나로 인식될 수 있음을 인정할 것.
히잡 착용을 금지할 것이 아니라, 히잡을 자의대로 벗겠다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대책을 마련할 것.
하려던 말을 다 썼다.
앤 필립스와 사비트리 사하르소는 ... 젠더 평등 원칙이 주류 사회의 인종차별주의적 편견을 정당화하고 다문화주의를 공격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며, 이를 피하기 위해 논의의 프레임은 문화가 아닌 여성의 권리 보호에 초점이 맞춰져 구성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 57쪽)
타문화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지지만, 이의 실천은 여전히 요원하다. 문제는 타 문화권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 있고, 저출산의 암울한 그림자에 이어 사회적 동력마저 잃어버리기 직전, 멸종의 위협 속에 있는 반만년 역사 단군의 후예 한많은 한민족은 이제 곧 유럽이 처한 모든 이민 문제를 끌어안게 될 가능성이 높다.
『타자로서의 서구』에서 임옥희는 스피박의 사티 해석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티라는 관습을 놓고 벌인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영국은 사티가 여성을 살육하는 것으로 규정 지음으로써 여성을 살육의 대상으로 구성한다. 그리하여 영국의 백인 남성은 이런 살해의 현장에서 인도 남성으로부터 인도 여성을 구출하는 교양 있는civil 신사가 된다.(『타자로서의 서구』, 139쪽)
서구 유럽이 제국주의 침략을 통해 각 국가의 전통문화와 미풍양속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인도 여성을 구하는 '왕자님'으로서 기능한다는 지적인데, 사티의 잔인함과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사티에 대한 인도인 내부의 다른 의견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확실한 듯하다. 그것을 외부자의 시각으로 판단하는 것과는 별개로, 당사자들은 그 상황을 자신들만의 방식과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미'를 '아름다울 미'로 표기하는 한국의 국민으로서는 이러한 당당함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명예살인을 그런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에 대한 대상화와 집안 간의 화목과 연합을 위한 재산으로서 여성이 간주되는 문화, 문화 현상, 그 결과에 대해 침잠하기보다는, 그런 행위가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살인 행위'에 해당하며, 이는 문화적 개별성이나 차이점과는 상관 없는 보편성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임을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신체와 생명에 대한 위해는 가장 강력하게 처벌받아야 할 범죄임을 강조해야 한다. 명예살인의 무자비함과 야만성을 규탄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스토킹 범죄'로 통칭되는 예전 애인, 배우자, 파트너에 대한 여러 물리적 위해, 협박, 폭행, 성폭행, 살인 역시 가볍게 여겨지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히잡에 대해서는, 나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아직 베일 편을 읽기 전이라 읽은 후에는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다) 히잡 문제를 생각할 때, 나는 나 자신을 예전부터 유럽에 거주하던 백인 여성으로 상정했던 것 같다. 자기들(이민자들)이 남(프랑스에 살고 있던 백인들)의 땅에 살려고 한다면, 여기 문화를 따라야지. 히잡을 벗어야지, 라고 말이다. 하지만, 히잡 착용 거부의 자유 못지 않게 중요한, 히잡 착용의 자유에 대해 생각하던 중, 이전의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히잡을 보는 것, 히잡을 착용한 여성을 보는 것은 불편하다. 그것은 억압적 가부장제의 상징이고, 여성의 복장을 규제하고, 여성의 생활반경을 크게 제약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히잡은 그들의 전통문화의 일부이며, 그들은 히잡을 통해 자긍심을 느끼며, 결정적으로 그들은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런 그들에게, 이건 그게 아니야. 그건 네가 뭘 몰라서 그래, 라는 자세를 취할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어른도 아이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나를 좋아하고 나에 관한 거라면 뭐든 좋게 보는 어떤 친구는 팔다리가 긴 것이 내 특징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 그렇지는 않고, 나는 그냥 키가 큰 거다. 내 생각에, 내 신체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한다면 배가 많이 나왔다는 건데, 친구가 크게 보는 내 장점과 내게 크게 보이는 내 단점을 잘 조합하면, 루즈한 스타일의 옷보다는 타이트한 스타일이 잘 어울리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짧은 치마를 자주 입는데(응?), 내 생각엔 그게 내 장점을 부각시키고 내 단점을 가리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주의 사항: 흰색 상의 입지 말 것. 아랫배가 부각됨) 내가 아주 짧은 치마를 입는 건 아니지만, 보통의 40대 후반 대한민국 여성이 선택하는 치마보다는 훨씬 짧기 때문에, 교회의 친한 언니는 '야! 너, 치마 왜 이렇게 짧아? 어?"하면서 단발머리 전용 선도부를 자청하신다. 그럼 또 나는 공손히, '네, 언니! 다음 주에는 더 짧은 거 입고 올게요!' 라고 말하면서 폴더인사를 건네는데......
그렇다. 내게는 짧은 치마가 어울리고, 그래서 나는 짧은 치마를 즐겨 입는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지금은 1920년대, 신여성이 등장한다. 신식 교육을 받은 여자들 혹은 서양식 차림새를 한 여자들이 신여성으로 불리우며 크게 주목받았다. 자세한 내막까지를 살필 수 없으니, 이번에도 '의복'으로만 한정해 보자. 신여성의 복장은 이러하다.
종아리를 드러냈다. 꽁꽁 싸매던 옷차림이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맞게 된 것이다. 신여성의 복장에 환호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경제성, 활동성에서 신여성들의 복장은 큰 호응을 얻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쳐다보기조차 부끄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어디, 종아리를 그렇게 내놓고, 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나이브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그런 변화의 과정 속에서 무언가를 '강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짧은 치마가 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짧은 치마를 입으면 되는 것이고, 긴 치마와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면 된다. 통이 넓은 편한 스타일의 바지를 입는 사람에게, 너 자신을 억압하는 무언의 압력에서 벗어나! 너 자신 그대로 아름답게 표현해 봐! 라고 말하는 게 억지인 것처럼,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에게, 너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에 동의하는 거야?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히잡을 벗기 싫어하는,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이슬람 여성들의 바램은 수용되어야 한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신체에 대한 위해가 아닌 이상, 그들의 전통문화의 하나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어떤 여성들이 히잡이 남성 억압의 표시로서 작동하며, 히잡을 통해 여성을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히잡 착용을 거부할 때, 온 몸으로 저항할 때,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실질적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히잡이 보기 싫다고, 거북하다고 억지로 히잡을 쓰지 못하게 할 것이 아니라, 히잡을 자의대로 쓰지 않겠다는 사람들, 히잡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이에 관련해 조금 더 쓰고 싶기는 한데, 눈꺼풀이 자꾸 내려온다. 원래 이 시간에는 선약이 있다. 이 시간에는 보통 『유대인의 역사』를 읽는데, 어제는 <1648년 대재앙과 그 여파> 앞부분을 읽었다. 신기한 일들의 연속이다.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읽어보지 못한 역사 이야기다. 밤은 깊어가고, 풀벌레 소리는 높아간다. 눈꺼풀이 한없이 무겁다.
이렇게 써두고 올리지 못하고 책상에 쓰러져 잠들었다. 눈을 뜨니 아침이고. 그래서, 인제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