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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사 1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8월
평점 :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기억이 맞았다. 제일 먼저 읽은 장강명 책은 <한국이 싫어서>.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유행하던 때, 혹은 그 단어가 막 알려지기 시작하던 때이긴 한데 다들 이렇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걸 딱 밖으로 표현하기는 거시기(?)하다고 느낄 때, 장강명은 적의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한국을 싫어하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이 싫어서>.
그다음 책은 <5년 만의 신혼여행>. 이 책도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편안하고 재밌고 술술 읽혔다. 이후에 ‘장강명’이라는 작가를 찾아보면서 그의 특별한 이력에 더욱 감탄하게 되었고(기자 생활 중에 공모하여 쟁쟁한 문학상을 연거푸 수상/아내와의 에피소드), 주경야독의 꿈을 이룬 그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표백>을 읽은 후에 나의 안목에 대해 더 과한 칭찬이 필요하다고 여겼고, 적어도 그의 이름을 보고 책을 사도 후회할 일은 없겠다 생각하게 됐다. <댓글부대>는 앞부분만 읽었고(쏴리), <당선, 계급, 합격>의 문제의식에 크게 공감했고, 이런 인식이 사회적으로도 널리 공유되었으면 했는데 생각보다 책이 큰 호응을 받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리고는 이렇게 세 권 <책 한번 써봅시다>, <책, 이게 뭐라고>,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모두 에세이구나) 읽었다. 책과 관련된 책들이고 작가의 삶에 관한 책이라 재미도 있고 부담감 없이 읽을 수 있기는 한데, 돈이 최고의 가치인 현대 사회에서 ‘소설가’라는 이름의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팍팍한지가 느껴져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장강명 정도의 작가도 이러할진대, 이제 막 1-2개의 히트작(?)을 낸 신인 작가나 작가 지망생, 시인들은 어떻게 생활을 꾸려갈까. 한국 출판계의 고질적 문제들을 작가 몇 사람이나 소수 독자의 힘으로 바꿔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고. 독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1) 책을 구입하고 2) 도서관에 책을 신청하고 3) 서평을 쓰고 4) 독서 모임 하기, 정도를 생각할 수 있겠다. 1번, 2번 완료하고, 3번 진행 중이며 4번은... 저랑 장강명 뽀개기 하실 분? 제가 친구 따라 푸코 읽기 해야 해서 많이 바쁘기는 한데, 장강명이랑 도선생 ‘엮어 읽기’로 진행하신다면 참가 용의 있습니다. 연락주세요, 010-1234-5678.
소재의 특별함으로 승부하는 소설이 있을 테고, 독창적인 구조의 변화를 시도하는 소설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소설은 이야기의 힘, 그 자체로 밀고 가는 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야기란, 우리가 열광하는 이야기란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그리스 비극으로부터 반복되어 온 것으로서. 그래서 새로 쓸 수 있는 건 문장뿐이라고 김연수가 말했었고. 결국 이 세상에 완벽하게 독창적이고 새로운 소설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구조에 변화를 주고 익숙한 이야기를 어떻게, 어떤 문장으로 풀어가느냐가 중요할 테고, 주인공이 갖는 매력, 사건들 사이의 연결성, 개연성 혹은 핍진성 등이 중요하겠지만, 내 소설 선택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작가의 ‘이름’인 것이며. 그래서 오늘은 장강명.
소설은 22년 전 미제 살인 사건을 맡게 된 강력계 형사인 연지혜가 피해자의 독서 모임 회원들을 한 명씩 만나면서 사건 당시 밝혀지지 않았던 사건의 실마리를 추적하는 과정을 담았다. 챕터를 번갈아 가며 범인의 독백이 이어지는데, <죄와 벌>의 로쟈와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지하인, 그리고 <악령>의 주인공 스타브로긴이 범인을 지배하는 세 개의 인격으로 독백을 이어간다. 죄책감이 아니라 이 나라의 형사사법 시스템과 싸우고 있다는 고백에서부터 시작해 선과 악, 죄와 벌 특별히 인간의 고통에 대한 범인의 사유는 현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주를 이룬다.
사랑하는 이를 병이나 천재지변으로 떠나 보내는 것과 살인사건으로 잃는 것은 모두 같은 손실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느끼는 정의감은 매우 부조리해서, 그 죽음의 배후에 다른 인간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반응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하지만 내가 처벌된다고 해서 그들의 손실이 보상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분노가 가시지도 않을 거다. 그렇다면 나를 벌 주기보다 그들이 관점을 달리하는 게 더 생산적인 일 아니겠느냐고 지하인은 궤변을 펼친다. (44쪽)
범인은 계속해서 자신의 살인을 변명하고 자신의 범죄가 지탄받지 말아야 할 이유를 나열하고, 다른 이들이 저지르는 범죄와 자신의 범죄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묻는다. 범인의 이야기는 너무나 진지하고 치열해서, 1권을 30쪽 정도 읽고 바로 2권과 장강명의 신간 SF소설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을 주문했다. 나는 장강명을 읽는다.
거대 담론이 사라진 시대, 각자도생이 당연한 시대에 신과 인생의 의미, 행복과 고통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죽음과 자살, 영원과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어떠한가. 환경운동과 채식주의는 또 어떤가.
모든 것이 허용될 때, 그래서 어떤 것에도 의미가 깃들 수 없고 진리라는 것이 성립할 수가 없을 때, 우리는 자살하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는 걸까? 카뮈는 반항하라고 한다. 끝내 의미를 발견할 수 없겠지만 의미를 구할 수 없다는 현실 그 자체에 우리가 시시포스처럼 끊임없이 반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99쪽)
그렇다면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귀여운 북극곰들을 살리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종이컵이 아니라 해외여행을 막아야 한다. 관광 목적의 출국은 5년에 1회 정도로 제한해야 한다. 유명 해외 관광지의 사진을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람들을 비난해야 한다. 그러나 탄소 줄이기 캠페인은 종이컵 쪽에 더 초점을 맞춘다. 해외여행보다는 종이컵이 종교적 금지 대상에 좀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종이컵 쪽이 보다 일상적이고, 현시적(顯示的)이며, 고통스럽다(보통 사람들은 해외여행을 그리 자주 가지 않으며, 해외여행을 가지 않는 상태는 티가 나지 않지만 텀블러는 눈에 잘 띈다). (206쪽)
채식주의도 비슷하다. 육식이라는 유혹을 참는 일은 일상적이고, 현시적이며, 고통스럽다. 그리고 자주 논리적 모순에 부딪힌다. 동물 복지를 위해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고양이를 키워도 될까? 고양이는 동물성 단백질을 먹어야 하고, 고양이 사료는 닭이나 연어로 만든다. (206쪽)
계몽주의, 인권에 대한 부분이 흥미로웠다. 유발 하라리도 <사피엔스>에서 ‘민주주의’의 개념과 더불어 ‘인권’ 개념에 대해 길게 설명했는데, ‘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역사적으로 특정한 시기에 발명되고 정교화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논의와도 비슷하게 읽혔다. 그리고 물론 죽음과 의미에 대한 부분도.
프란츠 카프카는 친구이자 비평가였던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의 원고를 전부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만약 브로트가 그 유언을 지켰다면, 카프카의 삶은 의미가 없어지는 걸까? 카프카가 의미 있는 삶을 살았는지 여부는 그가 무엇을 남겼느냐에 달린 문제인가?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결국엔 다 잊히지 않나? 그 말은 우리 대부분은 무의미한 존재라는 뜻일까? (233쪽)
233쪽의 위의 챕터를 읽으면서는 당연히 오르한 파묵이 생각났다. 그의 책 <소설과 소설가>라고 기억하는데,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고 대충 이런 의미였다. ‘내 책은 100년 뒤에도 읽힐까? 200년 뒤에도 읽힐까? 내 책이 200년 뒤에도 읽힌다는 게 내게 의미가 있을까? 200년 뒤라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을 텐데, 그 책이 읽힌다는 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와 상관이 있을까?’ 대답은 기억나지 않고 그의 질문만 기억에 남는 건, 그 역시 대답하지 않고 묻기만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죽을 운명이고, 태양은 곧(아마도 50억 년) 수명을 다하고, 지구는 없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혹은 그럴 것이기에 결국. 우리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나. 우리의 삶과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나. 답 없는 물음은 계속된다. 이건 나만의 ‘오래된’ 숙제로 남겨두기로 한다.
최근에 장강명의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을 읽고 페이퍼를 썼더랬다. <노르웨이의 숲>을 쓰고 난 이후에 하루키가 어떻게 다른 사람이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는데, 나 역시 이 소설을 읽으며 여러 번, ‘오~~장강명!’을 소리 내어 외치기도 했으니. 소설가 장강명은 <재수사> 이전의 ‘장강명’과 <재수사> 이후의 ‘장강명’으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뒤쪽 책날개에는 이런 짧은 글이 있다.
작품이 곧 자기소개가 되는 것.
무슨무슨 소설을 쓴 사람으로 소개되는 것.
거기서 더 나아가면 작가와 작품이 동의어가 되는 것.
피와 살이 있는 인간 장강명과
동의어가 될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
앞으로도 장강명은 계속해서 쓸 테고 다루는 소설의 영역을 확장해 가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아름다운 문장의 주인이 되겠지만, 나는 이 책 <재수사>에서 장강명은 자신과 동의어가 될 수 있는 책을 쓰는 일을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작가와 작품이 동의어가 되는 세계로 입장한 장강명에게, 기립박수를 쳐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