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설레는 올해의 첫 책으로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10만부 기념 새해 에디션)을 골랐다. 적립금이 남아 ‘그래24’에서 구매했는데, 결제할 때는 배송일이 1월 4일이었는데, 오늘 오후에야 책이 도착했다.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1월의 책 『육식의 성정치』는 작은 사전이랑 같이 구매했더니 토요일에 배송된다고 한다. 하여, 올해의 책 1번, 2번이 공석인 관계로, 작년에 읽던 책들을 마저 읽어야 하겠으나, 그럴 수 없어서. 올해의 첫 책은 이 책이다.
다정한 친구가 영화를 선물해 줘서(친구에게 선물 받기 전에는 영화를 ‘선물’한다는 것이 가능한 지도 몰랐다) 아이패드에 넣어두고 가끔씩 꺼내 보는데, 교회에 갈 수 없는 고요한 주일 아침에 갑자기 생각나서 책을 꺼내 들었다. 대본을 샅샅이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구매해 놓고는 한 번도 읽지 않았던 바로 그 책이다. 영화를 볼 때는, 안나가 윌리엄에게 두 사람의 새로운 시작을 제안하는 장면이 제일 좋았는데, 이번에 읽을 때는 이 대사가 눈에 들어온다.
Bella : I just want to say to Tony, don’t take it personally. The more I think about things, the more I see no rhyme or reason in life – no one knows why some things work out, and some things don’t – why some of us get lucky and some of us… (250쪽)
인생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참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그게 더 자연스럽고 다행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이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내 모든 기도를 들어 주셨다면. 나의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기도가 모두 응답되었다면... 그래서는 안 되고, 결국 그렇게는 안 됐다. 자연스럽고 다행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나도 벨라처럼.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는 알라딘 똑똑친구의 서재에서 보았던 책인데, ‘들어가는 말’을 읽고는 당장 ‘우치다 타츠루’를 검색해 보았다. 잘난척 하지 않고, 목에 힘 주지 않고, 내가 아는 한도에서 설명하겠다는 자세가 마음에 쏙 들었다.
지성이 스스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해답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물음 아래 밑줄을 긋는 일’입니다. (9쪽)
지성의 정의나 범위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겠지만, 지성이 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밑줄을 긋는 일’이라면, 그거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해답을 내놓는 일은 어차피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물음 아래 밑줄을 긋는 일이라면, 아!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물음 한 두 가지는 가지고 있지 않던가. 그렇다면 그 물음 앞에, 아니 그 물음 아래에 밑줄을 그으면 된다. 저자의 설명대로라면, 입문서야말로 물음 아래에 밑줄을 그어준다고 하니, 이제 이 입문서에 밑줄을 그으면 되겠다. 마침 스테들러 코끼리 색연필, 보르도 색상에 더해 보라색까지 준비완료다.
『강으로』는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한 가장 지적인 여행’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고, 데뷔작인 이 책의 출간 당시 올리비아 랭은 평단과 독자 모두에게서 크게 주목받았다고 한다. 『강으로』의 밑줄은 좀 더 낭만적이다.
결혼은 사적인 일이다. 스스로 방대한 양의 일기와 편지를 남기고 떠난 데다 제삼자들 사이에서 숱한 구설수에 올랐던 사람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다. 결혼 생활의 속사정이 어떠하며 결혼 생활을 유지시키는 끈이 무엇인지는 아무리 오지랖을 떨어대도 당사자가 아닌 남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전혀 가늠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남겨진 글을 통해 느껴지는 인상은 변치 않는 사랑이다. 애정과 지적 자극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변치 않는 사랑. 버지니아는 레너드를 내 불가침의 중심축이라고 불렀으며 세상을 떠날 때도 그에게만 마지막 글을 남겼다. 이런 사실은 두 사람이 온갖 난관에도 불구하고 서로 행복했다는 증거이다. (49쪽)
지인 추천책은 이렇게 두 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일단 목차는 살펴보고, 이진경 책은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올해의 할 일은 밑줄을 긋는 일이다. 코끼리 색연필로, 보르도로 밑줄을 그을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