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레싱의 대표작이며 200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이 책이 성 대결의 측면에서만 소비되는데 도리스 레싱이 불만을 가졌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흑백 갈등,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 전쟁에 대한 반대 등 이 책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여성해방운동의 경전으로 읽힌다는 것에 대해서도 도리스 레싱은 반대했다. 그럼에도 여성해방이 추구하는 모든 주제가 다뤄졌다는 점에서, 특별히 여성의 신체가 세상에 대해 반응하는 방식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런 평가는 지속될지도 모르겠다.


서사는 자유로운 여자들의 주된 흐름 속에서, 주인공이자 소설가인 애나의 네 가지 색 공책들인 검은색,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공책이 삽입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공책들> 안에는 일기, 리뷰, 소설의 개요, 신문 기사, 꿈에 대한 설명들이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금색 공책이 추가된다. 여러 이야기의 앞과 뒤, 먼저와 나중이 하나로 엮이면서 작가가 아닌 독자의 능동적인 참여, 적극적인 이해 과정을 통해 소설이 완성된다. 소설 쓰기의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작가의 생각을 해부해 보임으로써 소설 형식의 실험을 시도했고 이는 완벽하게 성공했다.



주인공 애나가 제일 많이 투영된 사람은 노란색 공책 <제삼자의 그림자>의 엘라이다. 여성지를 만드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엘라는 그녀의 업무와 관련되어 있는 닥터 웨스트의 파티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폴 태너라는 의사였는데, 그는 엘라에게 성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준다. 첫 눈에 반한 건 아니었지만 그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확신에 차서 점점 더 그를 사랑하게 된 엘라와는 달리, 폴은 엘라가 싫어할 만한 질문을 계속하며 자신의 난봉꾼 기질을 그대로 드러낸다. 밤을 함께 보내고 아침이면 셔츠를 갈아입고 씻기 위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남자.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남자. 아내는 좋은 여자라고 말하면서 매일 밤 엘라를 찾아오는 남자. 결국에는 예상처럼 엘라를 떠나는 남자. 엘라가 사랑했던 남자가 이 남자다.  



폴과 함께할 땐 그와 무관하게 성적인 충동을 느낀 적이 없었고, 그가 며칠 떠나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욕구도 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금 끓어오르는 이 성에 대한 갈망은 섹스 자체가 아니라 자기 인생의 온갖 감정적인 갈망에 의해 일어난 것임을. 다시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 곧 정상의 상태, 즉 남성의 성에 의해 차오르고 스러지는 성을 지닌 한 여성으로 돌아가리라는 사실을. 여자의 성은, 말하자면 남자에 의해, 진짜 남자에 의해 채워진다는 사실을. 어떤 의미에서 그는 자신을 잠들게 해줄 것이고, 그러면 더이상 섹스에 굶주리지 않게 되리라. (『금색 공책 2』, 133)



엘라가 갈망한 것은 섹스가 아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폴이라는 남자가 아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물음이다. 인생의 의미, 진정한 사랑, 정치적 이상향. 이 모든 것은 결국 스러져 버린다. 떠나고, 잃어버리고, 해체된다.


사랑을 확신하면서도 결국에는 자신의 것이 되지 않고 떠나가버린 폴을 예상했던 엘라처럼, 젊음과 시간을 모두 바쳤던 거대한 이상인 공산주의의 몰락 앞에서 애나는 절망한다. 엘라는 사랑을 잃었고, 애나는 꿈을 잃었다.


섹스도, 정치적 이상도 일생을 바칠 만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 삶을 끌어가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살고,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가. 왜 그토록 뜨거웠던 사랑은 식어버리고, 완벽한 이상은 무너져 내리는가. 마음속 빈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왜 사랑과 우정이 아니라 공허함과 우울함인가. 왜 빈자리는 끝내 채워지지 않는가.


소설가는 답해 주지 않는다. , 애나가 말할 뿐이고, 독자는 듣고 생각할 뿐이다. 『금색 공책』에 대한 로베타 루벤스타인의 논평이 옳다. 이 책은 읽는 책이 아니라 경험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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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3-01-06 1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 읽은 거죠? ㅋㅋㅋ☺️

단발머리 2023-01-06 11:44   좋아요 1 | URL
2020년 리뷰대회 땜에 ㅋㅋㅋㅋ 나 기억도 안 나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 5만원 탄 거 같기도 하고요 이거 아닌가?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1-06 11:50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 님은 이 사건 때 이 책을 선택하셨지 않았나요???? 했는데 아, 빌레뜨였군요.......

https://blog.aladin.co.kr/socker/11736220

공쟝쟝 2023-01-06 11:51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앍 무섭쟈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01-06 11:54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
촘촘하게 정확하신 분 ㅋㅋㅋㅋㅋㅋ 맞아요!! 그 때 저 책 두 권 받고 ㅋㅋㅋㅋ 그 후에 빌레뜨 두 권 받았다는 ㅋㅋㅋㅋ ”창비 우롱상자를 받았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단발머리 씨(23세, 여)는 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1-06 11:55   좋아요 2 | URL
와 창비가 금색공책이랑 빌레뜨를 줬다굽쇼???? 오ㅏ 듀근두근

잠자냥 2023-01-06 11:56   좋아요 1 | URL
그런 시절이 있었더이다. 난 <주군의 여인>1,2 받았음.
그때 다부장은 뭐 받았더라.....?

단발머리 2023-01-06 11:56   좋아요 0 | URL
금색 공책 리뷰대회의 3등 상품이 랜덤 2권이었고 모두 같은 책 (인기 없는) - 독자 항의 - 원하는 거 2권 다시 보내줌 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01-06 11:58   좋아요 1 | URL
주군의 여인으로 저는 기억합니다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1-06 12:01   좋아요 1 | URL
창비 찌질하다 ㅋㅋㅋㅋㅋ 아 안살래 ㅋㅋㅋㅋㅋ 금색공책 불매 합니다 ㅋㅋㅋㅋ (앗싸 두권 남았다 ㅋㅋㅋ 모사지?)

잠자냥 2023-01-06 12:02   좋아요 2 | URL
정확히는 창비세계문학 중 1권 읽고 감상문 남기는 리뷰대회였어요.
1등은 창비세계문학 전집 주고 2등이 10만원 상품권이었나, 적립금이었는데 다부장을 비롯하여 저는 요 10만원을 노리고 참가했습니다만 3등이 되고 말았지요. 요 3등은 창비세계문학 중에서 책 2권을 보내준다는 거였는데, 참가자들은 원하는 책 2권을 준다는 줄 알고 그것도 그런대로 괜찮겠다 했는데 아니 이게 무슨 일 창비에서는 덜커덕 <이반일리치의 죽음>하고 <젊은 베르테르의 고뇌>를 일률적으로 보낸 거예요. 암튼 그래서 여기에 불만을 가진 알라디너들이 다들 들고(?) 일어나서 원하는 책으로 보내달라~~ 집단지랄의 힘을 발휘하여 창비 쪽에셔 결국 원하는 책 2권씩으로 부랴부랴 다시 보내 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일명 <고뇌>와 <죽음> 사건...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1-06 14:17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 님 천재입니까? 제가 받은 것까지 기억하시는 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