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출생에서부터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남녀평등시대에 더해 여성상위시대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외침이 더 늘어난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여성 지위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항상 ‘백래시’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연대는 조직적으로, 집단적으로 그리고 연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왜 여성간의 연대는 이렇게 어려울까.
여자들은 타자와 대결해서 싸울 수 있도록 자신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현실적인 수단이 없었다. 여자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과거나 역사와 종교를 갖고 있지 않고, 프롤레타리아처럼 노동과 이해의 연대성도 갖고 있지 않다. 여자들 상호간에는, 미국의 흑인이나 게토의 유대인이나 생드니의 르노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가 공유하는 어떤 장소의 집단성도 없다. 여자들은 주거·노동·경제적인 이해관계에 매이고 아버지나 남편 같은 남자들의 사회적 신분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여자들보다 남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그들 사이에서 분산되어 살고 있다. 부르주아 여성은 부르주아 남성과 연대성이 있으며, 프롤레타리아 여성과는 관계가 없다. 백인 여성은 흑인 여성이 아닌 백인 남성과 연대한다. 어쩌면 프롤레타리아는 특권계급을 말살하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며, 광신적인 유대인과 흑인은 원자폭탄의 비밀을 독점하여 인류 전체를 유대인이나 흑인으로 만들려고 꿈꿀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자는 꿈에도 남성을 말살하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여자와 그 압제자 사이의 굴레는 다른 굴레와 비교도 되지 않는다. 성의 구별은 생물학적 조건이지 인간 역사의 한 단면은 아니기 때문이다. 남녀의 대립은 최초의 ‘공존’ 한 가운데서 나타났고, 여자는 이 대립을 깨뜨리지 않았다. 남녀 한 쌍은 두 개의 반쪽이 서로 불가분적으로 이어져 있는 기본단위이다. 성에 의해서 사회를 둘로 나누기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여자의 특징을 근본적으로 나타낸다. 여자는 두 요소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전체 속에서의 타자이다. (18쪽)
보부아르는 ‘여자들이 주거, 노동,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매이고, 아버지나 남편의 사회적 신분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최초의 공존 상태인 가정 속에서 남녀는 대립할 수 밖에 없지만, 가정이야말로 그녀의 존재를 존속시켜줄 토대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성의 변증법』에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억압당하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성 계급’이라 표현했고, 『젠더는 해롭다』에서 쉴라 제프리스는 그 위치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성 카스트’라 명했다. 여성은 제2의 계급이며, 표준에 도달하지 못한 인간으로서, 평생 그 지위를 벗어날 수 없다. 이는 신화, 종교, 문화의 이름으로 재생산되며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전수된다. 문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어떤 개인도 역사적 환경과 사회적 맥락 속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전업주부이다 보니 아무래도 전업주부를 자주 만나게 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댁 이야기가 나오고, 시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남편에 대한 불평을 듣게 된다. 놀라운 지점은 이야기가 다들 똑같다는 것. 어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는 “너의 시어머니와 우리 시어머니가 같은 사람 아니냐? 혹시 잃어버린 쌍둥이 아니야?”라며 웃기도 했다. 나는 고된 시집살이를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에피소드 몇 개 정도는 가지고 있다. 제일 힘들었을 때는 시어머니의 그런 행동이 ‘심하다’고 생각했을 때였는데, 결혼 연차가 쌓이고 다른 사람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면서 생각이 바꿨다. 그 때는 페미니즘 책을 읽기도 전이었다. 시어머니는 중증이 아니었다. 굳이 카테고리화하자면, 중간에서 그래도 좀 나은 쪽이었다. 모든 시어머니가 그랬다.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알고 지내는 아들친구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그건 교양이나 지식유무의 문제가 아니었다. 시어머니가 되면 그랬다. 시어머니의 위치가 되면 모두 그랬다. 똑같이. 거의 똑같이.
지금은 좀 다르게 본다. 남성 위주의 사회,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남성 권력에 기대는 방법 뿐이다. 가정 내에서 남편의 권위는 아들에게로 전해진다. 경제적인 힘도, 집 전체를 운용하는 힘도 모두 남자에게만 있다. 시어머니가 그나마 자신의 권력을 집행할 수 있는 대상은 며느리 뿐이다. 시어머니는 남자들의 일원이 될 수는 없지만 며느리에게는 상대적인 강자가 되어, 남자들이 남겨준 권력의 일부를 누릴 수 있다. 내 아들과 결혼해 이 낯선 집에 들어온 이상, 며느리는 반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핵심은 이것이 우리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고부갈등이라고 쉽게 예단할 일도, 유교 문화 속 한국인들의 평범한 생활상이라 생각할 일도 아니라는 뜻이다.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가 말했듯이, 『판결과 정의』의 김영란 전 대법관이 말했듯이, 『가부장제의 창조』의 거다 러너가 말했듯이, 가부장제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여성은 생물학적 조건 때문에 임신, 출산이 강요되고, 결혼이 강제된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사랑했던 사람에게 데이트 폭력, 아내 폭력을 당하고, 헤어지자 말했다가 살해당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가장 은밀한 순간마저 약점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불안함 속에 살아야 한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더 적은 월급이 주어지며, 꾸밈노동, 감정노동이 강제된다. 이 모든 억압은 여자라는 이름으로 주어진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왜 ‘우리’라는 이름으로 연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가. 왜 그런가.
보부아르의 진단이다. 부르주아 여성은 부르주아 남성과 같이 살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보다는 부르주아 남성이 더 가깝기 때문이다. 백인 여성은 흑인 여성보다 백인 남성에 더 친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여성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무시할 수는 없다. 여성 내부에서도 계급이 존재함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계급 철폐를 위해선 반드시 단일 대오가 필요하다. 여성이 스스로를 ‘우리’라 호명해야 한다.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전선으로 임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 투쟁할 것인가에 대해선 다음 시간에… 다른 분이… 이어 주실 거라 굳게 믿으며.
나는 쉬겠네 그림을 걸지 않은 작은 미술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