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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의 정치학 ㅣ 도란스 기획 총서 4
정희진 외 지음 / 교양인 / 2019년 2월
평점 :
노력하지 않으면 ‘지배자’의 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오해한다. 공시가격 9억원(시가 약 13억원)이상 공동주택 보유 시 부과되는 종합부동산세 과세 대상에 본인은 해당되지 않는데도 언론매체를 통해 ‘세금 폭탄’이라는 단어가 반복되면 ‘마치’ 내 일인양 흥분한다. 노동조합의 파업 때문에 시민들의 출근길이 불편해졌다는 언론 보도에 자신을 ‘시민’으로만 생각하는 ‘노동자’는 분통을 터뜨린다. 생각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쉽게, 자신이 재산 9억 넘는 아파트를 서너 채 소유한 부자인 줄 안다. 젊고 똑똑하고 합리적이며 정의감에 불타는 남성으로, 자신을 상정한다. 한 가지를 빼먹었다. 객관적인.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왜 ‘그 자리’에 갔냐, 왜 ‘그 시간’에 거기에 갔냐라는 질문은 남성들만의 것이 아니다. 조심해야 한다고, 더 조심했어야 한다고, 남자들은 원래 그렇다고(자신의 몸조차 조절이 안 된다고), 그러니까 여자가 조심해야 한다고, 여자들이 말한다. 남자들이 하고 싶은 말을 여자들이 말한다. 잊어버리고 말한다.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피해여성이 짧은 치마를 입어서, 피해여성이 늦은 시간 밖을 돌아다녀서, 피해여성이 조금 이상한(?)듯한 남자(가해자)를 계속 (도망다녔는대도 결국 만날 수 밖에 없어) 만나서 성폭력을 당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어서, 남자는 여자에게 그렇게 할 수 있어서 그렇게 했다는 걸 모른다. 잊어버린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성은 스스로 남성이 할 만할 생각을 ‘생각하고’, 남자나 할 말한 말을 ‘말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사실, 미투는 젠더 질서의 소립자일 뿐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가부장제 사회의 기본 질서이다.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통제가 없다면, 여성의 노동에 대한 남성과 국가의 착취가 없다면 사회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가부장제 질서의 축도인 여성에 대한 폭력 구조를 해부하지 않으면 – 이미 벌어지고 있듯이 – 미투는 일시적 스캔들이거나 인간성을 의심케 하는 잔인하고 예외적인 뉴스로 치부될 것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끔찍하게 정상적’인데, 사회는 이것을 비정상인 사람들의 일탈로 취급한다.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남성 사회의 정상성을 유지하려면 여성의 정신 상태가 ‘이상’해야 한다. 여성들은 자신이 경험한 것들과 들은 것 사이에서 분열하면서, ‘내 남자’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80쪽)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당연시하는 사회 구조와 문화 속에서 유력인에 대한 ‘미투’는 사회에 강한 충격을 주고 단번에 국민적인 관심을 얻는다. 하지만, 피해자의 인생 전체를 걸고 이루어지는 현재의 미투에 대해 정희진은 이것이 임시적 방법일 뿐이며, 남성 사회를 변화시키는 문화 운동과 사법 체계의 개선이 최우선이라고 말한다.(86쪽)
동의한다. 결국에는 법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처벌을 원한다. 하지만, 이름을 걸고 얼굴을 공개하고 개인사까지 노출되는 고통 속에 재판정에 들어선 피해자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근친상간, 어린이 추행, 성희롱, 성추행, 데이트 폭력, 가정 폭력 등 대부분의 성범죄가 그러하다. 인식의 전환. 남성들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역동적인 변화가 일어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요원할 일일 듯 싶다. 현재 우리 사회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정상’으로 다뤄지는 사회라고 말할 때, 그렇다고 인정할 남자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결국은 법이다. 양승태 대법원장의 재판 거래 의혹이 사실로 속속 밝혀지는 요즘, 법원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것이 사실이라 해도, 사회 갈등과 분쟁의 최종 결정은 법원에서 이루어진다. 국민의 감시를 받지 않는 법원이, 가해자의 입장에서 판결을 계속한다면, 사회 전체의 인식을 변화시켜야 하는 장구한 투쟁보다 강력한 법 제정, 엄격한 법적용을 주장하는 편이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존재를 알게 되자마자 생활에 바로 적용된 법의 예로 나는 ‘김영란법’을 꼽고 싶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새로운 담임선생님을 만나자마자 듣고 오는 첫번째 말이 ‘엄마, 카톡으로 커피 한 잔 선물해도 안 된대요.’이다. 교장선생님 훈화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주제도 ‘부정청탁금지법’에 대한 안내이다. 불과 2-3년 안에 ‘학교 갈 때는 빈손으로, 돌아올 때는 미소 가득’이라는 표어가 엄마들 사이에서 확실히 자리잡았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금액과 특혜가 오고 가는 ‘그들만의 리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학교’에 갈 때 ‘무언가’를 들고 가지 않아도 될까? 나만 빈손 아닐까?라고 고민하던 평범한 학부모들은 ‘김영란법’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법에 걸리잖아, 불법이잖아,는 가장 효과적인 억제책이다.
법에 어긋나는 일임을 몰라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겠지만 법의 엄격한 적용은 ‘범죄’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위험을 포함한 낮은 수준의 해결책을 혼자 생각해본다. 여성을 상대로 한 극악무도한 범죄에도 솜방망이 처벌만 이루어지는 상황을 두고 볼 수 만은 없지 않는가.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의 역사’를 다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의 수전 브라운밀러도 내 생각과 비슷한 것 같아 옮겨본다.
이 지점에서 잠시 내 성향에 대해 밝혀두고 싶다. 나는 징역형이 범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공정하고도 적법한 사회적 처벌 방식이자 문명화된 응징이고, 미래의 범죄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이며, 현재로서는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고의 해결책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나는 범죄자가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걸맞은 처벌을 받느냐에 비하면 감옥이 정말로 ‘갱생’에 도움이 되는지는 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감옥에서 범죄자가 받는 처우에 관심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범죄를 저지르면 실제로 감옥에 가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해두는 일이 더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595쪽)
사족 1. 이 책은 <도란스 기획 총서 4>이다. 책소개 화면에 ‘도란스 기획 총서 4’라는 안내가 없어서 왜 이 책은 시리즈가 아니지?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보자마자 바로 확인이 됐다.
사족 2. 이 책이 쓰여질 무렵,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던 안희정은 2019년 2월 1일 항소심에서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등의 혐의에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3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법정구속됐다.
사족 3. 리뷰에도 '알라딘상품' 넣기가 가능하면 참 좋을텐데,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67번째다.
사족 4. 정희진 선생님 글은 3독이 기본이라 이번에는 줄을 치지 않고 얌전히 읽었다. 재독 때에 빛나는 줄긋기 신공을 선보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