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키 후미타케에게,
5년 전 이와쿠라를 떠올리며 - P-1

주요 등장인물
아유타 도마(60) | 흑묘관의 관리인.
가자마 유키(22) | 흑묘관 현 소유주의 아들. M** 대학 학생 록밴드 ‘세이렌’의 기타리스트.
히카와 하야토(23) | 유키의 사촌 형. T** 대학 대학원생. 세이렌의 피아니스트.
기노우치 신(22) | 유키의 친구. 세이렌의 드러머.
아사오 겐지로(21) | 유키의 친구. 세이렌의 베이시스트.
쓰바키모토 레나(25) | 여행자.

* 괄호 안 숫자는 1989년 8월 시점의 만 연령

아모 다츠야 | 흑묘관의 전 주인. 전 H** 대학 조교수. 생사 불명.
아모 리사코 | 다츠야의 딸. 생사 불명.
구마시로 노스케(70) | 아모 다츠야의 친구. 전 T** 대학 교수.
다치바나 데루코(63) | 아모 다츠야의 전 동료. H** 대학 교수.
가와미나미 다카아키(25) | 기단샤 편집자.
시시야 가도미(41) | 추리작가.

* 괄호 안 숫자는 1990년 6월 시점의 만 연령 - P-1

1990년 7월 8일(일), 홋카이도·아칸 - P-1

세 사람이 대문 앞에 서자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뒤쪽에 펼쳐진 가문비나무 숲에서 짙은 안개가 흘러나왔다. 가와미나미다카아키는 무심코 반소매 셔츠 아래로 드러난 팔을 문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 P-1

블루종과 같은 색의 숄더백을 어깨에 멘 시시야가 앞장서서 좁은 통용구를 빠져나갔다. 야유타 도마가 오른손에 쥔 갈색 지팡이로몸을 지탱하면서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가와미나미가 들어갔다. - P-1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느릿한 바람에 흘러가는 안개에 현혹되었는지 문득 그 검은 형체가 거대한 고양이로 보였다. 물론 ‘흑묘관黑猫館‘이라는 저택의 이름이 가와미나미의 마음 한구석을 자극한 결과이기도 했다. - P-1

그의 이름은 아유타 도마라고 한다. 체격이 빈약한 데다 등이 약간 굽어 실제보다 훨씬 늙어 보인다. 아직 예순 살 정도밖에 되지않았을 텐데 풍채는 이미 노인이나 다름없었다. - P-1

옅은 회색으로 더러워진 벽에 세로로 길고 조그만 창이 줄지어 나 있다. 지붕은 경사가 급한 맞배지붕. 외관은 그다지 기이하거나별날 것 없는 2층짜리 서양식 저택이지만, 홋카이도의 외진 숲속에 이런 집이 세워져 있다는 것 자체가 묘한 이야기이기는 하다.
더구나 여기가 나카무라 세이지中村靑司가 설계했고, 작년 여름 그 ‘수기‘에 적힌 사건이 일어난 곳이라고 생각하자 가와미나미는 등골이 오싹했다. - P-1

세 사람은 발소리를 죽이고 자욱한 안개 속을 나아갔다. 숲에서 노니는 들새 소리가 사방팔방에서 울려 퍼진다. 7월 초순, 정오에가까운 시각인데도 기온은 올라갈 기미가 없었다. 가와미나미는 쌀쌀한 느낌에 다시 팔을 문지르면서 여름 스웨터를 차 안에 두고온 것을 몹시 후회했다. - P-1

적어도 작년 9월까지는 아유타 노인이 저택의 관리인으로 일했을 것이다. 잃어버린 당시의 기억을 어떻게든 되찾으려고 지금도애를 쓰고 있기는 한데....... - P-1

다음 달 초,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현 주인의 아들이 이쪽으로 여행을 오기로 했다. 친구들과 함께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예정인데모처럼의 기회이니 아버지가 소유한 ‘별장‘에도 며칠 머무르고 싶다고 한다. 그러니 그들이 사용할 방을 준비하고, 머무르는 동안식사 등의 시중을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 P-1

여기에 적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1989년 8월 1일부터 4일까지 ‘흑묘관‘이라고 불리는 이 저택에서 일어난 사건의 정확하고 상세한 기록이다. - P-1

이것은 나 자신을 위한 수기다. 나는 이 수기를 씀으로써 그 불길한사건을 하나의 ‘과거‘로서 노트 속에 봉인하고 싶은 것이다....... - P-1

이것은 나 자신을 위한 수기다.
이 노트에 쓴 글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생각은 전혀 없다. 아주 특별한 일이라도 벌어지지 않는 한 아마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다. - P-1

토지와 가옥의 실질적인 관리는 이 지방의 대리인 아다치 히데아키足立秀秋 씨가 도맡고 있다. 그 아다치 씨가 전화로 연락을 한것이다. - P-1

하지만 일개 사용인에 불과한 내게 그러한 지시를 거부할 권리는 없다. 알겠습니다, 하고 냉큼 대답하는 것이 당연한 내 소임이다.
아무튼 가능한 한 냉정과 객관성을 유지하며 그 사건의 전말을 정리해두고자 한다. - P-1

앞으로 10년 정도 지나면 아직은 생생한 그 사건의 기억도 완전히 희미해지리라. 10년 후의 내게 이 수기는 반드시 재미있는 읽을거리로서 남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것은 미래의 나를 위해 쓰는 ‘소설‘, 그것도 이른바 탐정소설 부류에 속하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이왕 쓸 바에는 그런 기분으로 써내려가도록 하자. - P-1

내가 그 연락을 받은 것은 1989년 7월 초순이었다. 분명 7월에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2일인가 3일쯤이었을 것이다. - P-1

잊을 만하면 아다치 씨가 상태를 보러 오는 것을 제외하면 전혀, 라는 말을 붙여도 될 만큼 사람이 오지 않는다. - P-1

하여튼 내가 그 지시를 쾌히(표면상으로는) 받아들이자 아다치 씨는 일단 나를 염려해주었다.
"여러모로 힘들겠지만 며칠만 같이 지내면 되니까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자세한 일정은 결정되는 대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 P-1

그런 까닭에 나는 저택의 대청소를 비롯해 다양한 준비를 하느라 얼마 동안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예상대로 제법 버거웠다. - P-1

자기 소유의 고급 맨션과 최신 스포츠카가 있고, 용돈까지 두둑하지만 강의도 제대로 듣지 않고 싸돌아다니는 방탕아, 라는 진부한 상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같이 온다는 세 명도 아마 비슷한 부류일 것이라 생각하자 기분이 우울해졌다.
이맘때 굳이 이런 벽촌으로 오지 않아도 될 것을. 여기 말고도 그들이 놀 만한 곳은 얼마든지 있을 텐데.......
새삼스럽게 그렇게 툴툴대며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난다. - P-1

사이타마의 현 주인 역시 지금까지 업무를 보는 김에 딱 한 번(벌써 4년 전이다) 찾아온 적이 있을 뿐이다. 정말로 - P-1

역시 가능하면 이 집을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예순 살의 노구에게 이 넓은 저택의관리는 이제 힘에 겨운 일인지도 모른다. - P-1

"흔해 빠진 감상입니다만, 역시 경치가 웅대해요. 상상을 훨씬 넘어서서 감동했습니다."
"그거 잘됐군요."
나는 짤막해진 담배를 한 번 더 빨아들이고 재떨이에 버렸다. - P-1

"신경 쓰지 마세요. 적어도 저는 조용한 방과 뜨거운 커피만 있으면 대만족이니까요."
"조용한 것만은 보증하겠습니다. 숲속의 독채거든요." - P-1

뜻밖에도 예의 바른 상대의 태도에 나는 약간 당황했다.
"다른 분들은?"
"저쪽 라운지에 있어요. 금방 올 겁니다." - P-1

"처음 뵙겠습니다. 유키, 가자마 유키의 사촌 히카와라고 합니다. 히카와 하야토. 일부러 데리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P-1

"저는 도쿄 23구 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이렇게 도쿄를 떠나보니 그 도시는 이상하다는 실감이 나는군요. 도시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따져보면 거기는 틀림없이 어딘가에서 방향이 어긋난 괴물입니다." - P-1

"어제는 어디를 구경하러 가셨습니까?"
나는 히카와에게 물었다.
"혼자 이곳의 명물이라는 감옥 터에 다녀왔습니다."
대답하고 나서 청년은 가볍게 코를 훌쩍였다.
"옛날에 아바시리의 형무소에도 가본 적이 있는데, 역시 분위기가 다르더군요. 그렇게 비교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 P-1

다시금 네 사람을 관찰했다. 과연, 듣고 보니 히피인 양 차려입은 가자마 유키와 기노우치 신의 모습은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 P-1

그러더니 무슨 신호인지, 집게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을 세운 오른손을 내밀고 내게 "예이" 하고 소리를 질렀다.
"요컨대 밴드 해산 기념 여행을 왔다는 거죠. 사내놈 넷뿐이라 울적하기는 하지만. 뭐, 이삼 일 잘 부탁해요." - P-1

"그런데 히카와 씨."
나는 여전히 이따금 코를 훌쩍대는 조수석의 청년에게 마음에 걸리던 일을 물었다.
"호텔 로비에서 이곳의 저택에 개인적인 흥미가 있다고 하셨는데, 무슨 뜻입니까?"
히카와는 "아아" 하고 목소리를 흘려내더니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까 전에 피우지 않고 넣어두었던 담배를 다시 꺼내 입술 끝에 물면서 불쑥 중얼거렸다.
"아모 다츠야." - P-1

"엄청 산골이네."
가자마 유키가 불만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 운전석 시트를 쿡 찔렀다.
"저기, 아저씨, 얼마나 더 가야 돼요?"
"이제 절반은 지났습니다." - P-1

"도쿄의 열대야에 비하면 저한테는 천국입니다. 땀 흘리는 걸 정말 싫어해서요."
"올해는 이상하게 덥다고 들었는데요." - P-1

"T** 대학 이학부 출신의 아는 사람만 아는 생물학자죠. 최근 유행하는 이른바 뉴사이언스보다 몇 발 앞서 독특한 학설을 수없이발표한 사람으로, 결국 학계에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일부에서는 노벨상을 받을 만한 시도였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 역시 그 ‘일부‘에 포함되죠."
"삿포로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요." - P-1

"풍향고양이라고나 할까요."
"그게 뭡니까?"
"풍향닭의 닭 대신에 함석으로 된 고양이가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새카맣게 칠해져 있거든요."
"아아, 그래서.......!"
"뭐, 아마도 그게 흑묘관이라는 이름의 유래겠죠." - P-1

"저는 이학부에서 형태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의 한 분야죠. 그러다 보니 그의, 아모 다츠야 박사의 이름을 접할 기회가있었습니다." - P-1

"제가 여기 온 후에 받은 수고양이가 한 마리 있습니다. 이름은 칼로입니다."
"칼로?"
"네팔어로 ‘검다‘는 뜻이죠. 나중에 소개해드리지요." - P-1

"새끼 양인데 입에 안 맞으십니까?"
내 말에 가자마는 더 이상 불평을 하지 않고 명령했다.
"와인 좀 더 가져와요."
히카와를 제외한 세 사람은 술을 꽤 좋아하는 듯 이미 두 병이나 비웠다. - P-1

현관홀에서 왼쪽, 그러니까 동쪽으로 뻗은 복도를 따라 2층과 거의 동일하게 네 개의 방이 위치해 있다. 북쪽 앞편이 거실 겸 식당,
뒤편은 앞방과 이어진 응접실로 나는 ‘살롱‘이라고 부른다. 남쪽에는 앞편에 주방과 팬트리(식료품 저장실)가, 뒤편에 내가 쓰는침실이 있다. 1층에는 방이 하나 더 있는데, 현관홀 서쪽의 2층까지 뚫린 장서실이다. 차 안에서 히카와에게 이야기한 아모 다츠야박사의 책은 장서실에 늘어선 책장에 남아 있다. - P-1

그 후에도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젊은이들은 똑같은 패턴의 이야기를 되풀이한 것 같다. 가자마가 뭐라고 말하면, 기노우치가 그말을 받아 시시한 농담을 늘어놓는다. 아사오가 나지막하게 웃는다. 히카와는 그저 모르는 척. - P-1

"제 사촌 동생이기는 하지만 정말 한심합니다. 이성을 잃은 인간만큼 추한 건 없죠."
실연하든 술을 마시든 자신은 늘 이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 P-1

그 후에도 젊은이들의 술자리는 계속되었다. 팬트리에서 술을 더 꺼내어준 후에 나는 그들을 남겨놓고 살롱에서 나왔다. 그때 문득귀에 이런 말이 들어왔다. - P-1

"..요전의 엘, 아직 있지?"
가자마 유키가 기노우치 아니면 아사오에게 한 말이었다.
"나중에 가져와. 뭘 걱정하고 그래. 여긴 우리 아빠 별장이라고......." - P-1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절을 이어받고 소설가는 그만둘 거야. 절의 주지가 부업으로 사람 죽이는 이야기를 쓰다니 보기에 그다지안 좋잖아."
어디까지 진심인지 긴가민가하기는 한데....... - P-1

시시야 가도미는 가와미나미가 현재 담당하고 있는 추리작가 중 하나인 동시에, 몇 년을 알고 지낸 친구이기도 하다. 원래 오이타현에 있는 어떤 절 주지의 아들로, 제대로 된 직장 없이 결혼도 않고 빈둥대며 30대 중반을 보내고 있었다. 가와미나미는 그 무렵부터 그를 알고 지냈는데, 그 후에 어쩌다 보니 기단샤에서 데뷔작이 나오게 되었다. 재작년, 1988년 9월의 일이다. - P-1

각설하고, 갑작스레 이런 말씀을 드려 몹시 죄송합니다만 실은 간절한 바람이 있어 펜을 들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사정이 있어 작가 시시야 가도미 선생님을 꼭 한 번 뵙고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몰상식한 부탁임은 잘 압니다만, 어떻게 배려해주실 수 없을까요? - P-1

"실은, 기억을 잃었습니다. 병원에서 의식을 되찾기 이전의 기억을 깡그리!"
"기억상실증이라고요?"
급히 되묻자 상대는 한숨을 쉬는 듯한 목소리로 "예" 하고 대답했다.
"역행성 건망증이라고 하던가요? 이름, 주소, 직업 어느 것 하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 P-1

"저는 그때 그 호텔에 묵고 있었습니다. 미처 탈출하지 못해 중상을 입었죠.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구출되어 살았습니다만."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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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가슴이 뜨거워져라 - 열정 용기 사랑을 채우고 돌아온 손미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손미나 지음 / 삼성출판사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다시 가슴이 뜨거워져라』 ― 밥벌이의 지겨움을 넘어, 가슴을 다시 뛰게 하는 풍경들

손미나를 따라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걷다 보니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삶에서 눈길을 끄는 모습이 하나 있었다. 먹고사는 직업과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을 굳이 하나로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직업은 직업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 곁에 또 하나의 자기 삶을 자연스럽게 놓아두고 있었다.

은행원이면서 가수이고, 변호사인데 춤을 춘다. 버스기사로 일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여행사 직원이면서 어릿광대로 무대에 선다. 루카스의 여동생은 생물학자가 본업인데 서커스까지 한다.

물론 ‘버스를 몰면서 그림을 그린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다가는 사고 난다. 버스를 모는 것이 밥벌이라면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 사람의 또 다른 삶이라는 이야기다.

몇 사람의 모습만으로 아르헨티나 사람 전체가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손미나가 만난 사람들에게서는 예술이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도 아니고, 먹고살 만큼 벌고 시간과 돈이 남아야 비로소 누릴 수 있는 사치도 아니었다. 노래하고, 춤추고, 그림을 그리고, 서커스를 하는 일이 생활 한쪽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삶을 예술처럼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예술가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밥벌이가 한 사람의 삶을 전부 차지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자기 가슴을 뛰게 하는 무엇인가를 일상 속에 품고 사는 것이다. 직업이 그 사람의 전부일 필요는 없다.

김훈은 말한다. 밥벌이는 지겨움이라고.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이 언제나 즐거울 수는 없다. 아르헨티나 사람이라고 월요일 아침마다 신나게 출근하고 직장 일이 늘 즐거울 리도 없다. 밥벌이는 어디에서든 지겨울 수 있다. 그래서 오히려 밥벌이 바깥에 또 하나의 자기 삶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과 손미나가 아르헨티나에서 본 ‘생활 속 예술’은 반대말이 아니라, 어쩌면 서로를 보완하는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노래와 춤이 있고, 누군가에게는 그림과 서커스가 있다.

나에게는 산이 있다. 내게 등산은 예술이다.

산길을 걷고, 능선을 넘고,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숲과 바위를 바라보고, 정상에 올라 인간이 만들어놓은 세상을 내려다보는 시간은 내게 단순한 운동이 아니다. 그 시간만큼은 직함도 밥벌이도 잠시 내려놓고 한 사람으로 걷고 보고 느낀다.

꼭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연주해야만 예술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기 삶에 밥벌이와는 다른 리듬 하나를 만들어놓고 그 시간을 즐기며 살아가는 것. 넓게 보면 그것 역시 생활 속의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프롤로그에서 말했던 ‘억겁과 찰나’도 여기에서 다시 이어진다. 찰나에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삶을 밥벌이에만 모두 내줄 수는 없다. 자기 삶을 값지게 만드는 무엇인가를 하나쯤은 품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예술일 수도, 산일 수도, 여행일 수도 있다.

책을 덮고 나니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하는 아르헨티나의 다섯 가지 풍경이 떠올랐다.

1. 나의 영웅, 체 게바라 ― 여행이 한 사람의 눈을 바꾸다

첫 번째는 에르네스토 게바라. 우리가 알고 있는 ‘체 게바라’다.

쿠바 혁명의 상징으로 더 유명하지만, 본명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는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태어나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한 아르헨티나 청년이었다.

1952년, 스물세 살의 게바라는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라 포데로사 Ⅱ’라는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 여행을 시작했다. 오토바이는 여행 도중 고장 나 더 이상 함께하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걷고, 차와 배를 얻어 타면서 여행을 계속했다.

그 과정에서 젊은 게바라는 광산노동자와 가난한 농민, 원주민과 나병환자들을 만났다. 강의실이나 책 속에서가 아니라 자기 눈으로 라틴아메리카의 빈곤과 불평등을 보았다. 이 여행 하나만으로 그가 혁명가가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훗날 그의 세계관이 형성되는 데 중요한 경험 가운데 하나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때 남긴 기록은 훗날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로 세상에 알려졌다. 1952년 남미 여행 당시의 기록은 게바라가 1967년 볼리비아에서 죽은 뒤 26년이 지난 1993년, 스페인어판 『Notas de viaje』로 처음 출간되었다. 여행을 떠난 지 약 41년 만이었다. 영어판 『The Motorcycle Diaries』는 1995년에 출간되었다.

국내에서는 2000년 출판사 **‘이후’**에서 『체 게바라의 라틴 여행 일기』라는 제목으로 처음 번역되었고, 2004년 황매에서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2012년에는 황매(푸른바람)에서 개정판이 나왔지만 현재 2004년판과 2012년판 모두 절판되었고, 새 책으로는 구하기 어렵다.

나는 2004년 황매판으로 이 책을 읽었고, 지금도 그 책을 소장하고 있다.

손미나에게 아르헨티나 여행이 흔들린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한 시간이었다면, 젊은 게바라에게 남미 여행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어놓은 시간이었다. 두 사람의 삶과 지향은 전혀 다르지만, 여행이 단순한 장소의 이동을 넘어 한 인간의 삶에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맞닿아 있다.

어떤 여행은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고, 어떤 여행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향 자체를 바꾸어놓는다.

2. 마라도나와 메시 ― 축구, 전쟁의 기억을 넘어

두 번째 풍경은 축구다. 마라도나와 메시.

특히 디에고 마라도나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이다.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가 맞붙은 그해 8강전에는 축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역사가 깔려 있었다.

불과 4년 전인 1982년, 아르헨티나와 영국은 포클랜드 전쟁을 치렀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 전쟁이라 부른다.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자국에서 훨씬 가까운 포클랜드 제도를 기습 점령했다. 영국 본토에서는 1만 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남대서양의 섬이었다. 아르헨티나 지도부는 영국이 그 먼 섬을 되찾기 위해 대규모 군사력을 실제로 투입할 가능성이 낮다고 오판했다.

그러나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의 대처는 달랐다.

영국은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대규모 기동함대를 남대서양까지 보냈다. 그 먼 남대서양까지 해군과 공군력을 투입했고, 영국 핵잠수함은 아르헨티나 순양함 제네랄 벨그라노를 격침했다. 영국군은 포클랜드에 상륙했고, 전쟁은 약 74일 만에 아르헨티나의 패배로 끝났다.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영국의 대응 의지를 과소평가했다면, 대처는 그 오판에 함대를 남대서양까지 보내는 것으로 대처했다.

말 그대로 대처의 대처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고 4년 뒤인 1986년 6월 22일, 멕시코시티 아스테카 경기장에서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가 다시 만났다.

전쟁은 끝났지만 기억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두 나라 선수들이 총을 들고 싸우는 것도 아니었고, 축구경기의 승패가 전쟁의 승패를 뒤집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포클랜드 전쟁에서 패배한 지 겨우 4년밖에 지나지 않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이 경기가 그저 월드컵 8강전 하나로만 느껴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후반 6분, 마라도나가 잉글랜드 페널티지역 안으로 파고들었다. 공이 높이 떠오르자 골키퍼 피터 실턴도 함께 뛰어올랐다.

키 165cm의 마라도나가 183cm의 실턴보다 먼저 공을 건드렸다.

머리가 아니었다.

손이었다.

심판은 보지 못했고 골을 인정했다.

훗날 마라도나는 그것을 이렇게 불렀다.

‘신의 손.’

그런데 불과 4분 뒤, 마라도나는 이번에는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는 골을 만들어냈다.

자기 진영에서 공을 잡은 그는 잉글랜드 선수들을 차례로 제치며 약 60m를 질주했고, 마지막에는 골키퍼 실턴까지 따돌린 뒤 골문 안으로 공을 밀어 넣었다. 훗날 ‘세기의 골’이라 불리게 된 장면이다.

한 골은 손으로 만들었고, 다른 한 골은 오직 자신의 두 발로 만들었다. 하나는 명백한 반칙이었지만, 다른 하나는 마라도나가 왜 불세출의 축구선수로 불리는지를 보여주는 골이었다.

아르헨티나는 그 두 골로 잉글랜드를 2대 1로 꺾었다.

전쟁에서의 패배를 축구경기 하나로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불과 4년 전 영국에 패했던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그날의 승리가 어떤 감정으로 다가왔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마라도나 역시 훗날 이 경기를 포클랜드 전쟁의 기억과 연결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는 준결승에서 벨기에를 꺾고 결승에 올랐다. 상대는 서독이었다. 3대 2 승리.

1986년, ‘신의 손’과 ‘세기의 골’을 남긴 마라도나는 마침내 월드컵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그 장면으로부터 36년이 흐른 2022년, 이번에는 리오넬 메시가 카타르에서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마라도나가 있던 시대와 메시가 있던 시대는 달랐지만, 두 사람을 통해 보이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축구에 대한 열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3. 탱고 ― 두 사람이 함께 걷는 삶

세 번째 풍경은 탱고다.

축구가 경기장을 뜨겁게 만드는 열정이라면, 탱고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와 사람들의 삶 속에 스며든 또 다른 열정이다. 탱고를 생각하면 다시 이 책에서 만난 ‘생활 속 예술’로 돌아오게 된다.

책에는 한 노인이 피아노 반주에 맞춰 탱고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카를로스 가르델은 아름다운 탱고 선율과 노랫말로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상처와 한(恨)을 달랬고,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노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이어지고 있었다. 탱고는 그들에게 단순히 듣고 즐기는 음악이 아니라 사랑과 이별, 상처와 추억을 담아내는 삶의 한 부분이었다.

손미나가 만난 현지인은 탱고에 사랑과 인생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며, 머리가 아닌 가슴과 영혼으로 느끼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탱고를 두고 ‘두 사람이 함께 걷는 것’이라고 했다. 다만 누군가와 제대로 함께 걷기 위해서는 먼저 혼자서도 잘 걸을 수 있어야 한다.

춤 이야기인데 듣고 보면 삶의 이야기다.

서로 기대어 걷되 자기 발로 설 수 있어야 하고,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상대의 움직임을 느끼며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야 한다. 어쩌면 탱고는 사랑과 인생을 두 사람이 함께 걷는 모습으로 보여주는 춤인지도 모른다.

은행원이 노래를 부르고, 변호사가 춤을 추고, 생물학자가 서커스를 하는 도시. 그렇게 예술이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는 곳이니, 탱고가 공연장의 춤에 머물지 않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의 삶과 함께 이어져온 것도 이해할 만하다.

4. 파타고니아 ― 인간을 작게 만드는 대자연

네 번째 풍경은 파타고니아다.

파타고니아는 한 나라의 특정 지역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르헨티나와 칠레 두 나라에 걸쳐 펼쳐진 남아메리카 남부의 광대한 지리적 영역이다. 안데스와 빙하, 끝없이 펼쳐진 대지와 바람이 이어지는 곳이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것보다 자연의 크기가 훨씬 크게 느껴지는 땅이다.

손미나는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의 산타크루스주 엘 칼라파테까지 내려갔다.

프롤로그에서 지구 밖의 우주로 시선을 옮겨 인간이라는 존재를 티끌에 비유했다면, 파타고니아에서는 굳이 우주까지 나가지 않아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끝없는 대지와 거대한 빙하, 안데스의 산줄기 앞에 한 사람을 놓아보면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대로 드러날 것 같기 때문이다.

산과 웅장한 자연을 좋아하는 나에게 파타고니아는 언젠가 반드시 직접 걸어보고 싶은 땅이다.

그리고 손미나를 따라 엘 칼라파테까지 내려간 내 시선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남쪽으로 향한다.

5. 우수아이아 ― 정수일 교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세상의 끝으로

다섯 번째 풍경은 티에라델푸에고주의 우수아이아다.

우수아이아 역시 넓은 의미의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에 속한다. 남아메리카 남쪽 끝자락에 자리해 흔히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도시다.

손미나는 산타크루스주의 엘 칼라파테까지 갔지만, 나는 언젠가 그보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 우수아이아까지 가보고 싶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내가 존경하는 문명교류학자 정수일 교수님은 『문명의 보고 라틴아메리카를 가다』를 쓰기 위한 답사에서 노구를 이끌고 우수아이아까지 내려가셨다. 책에는 아예 「지구의 땅끝 마을, 우수아이아」라는 장이 있고, 그 뒤로 비글해협과 마젤란해협 답사가 이어진다.

언젠가는 나도 정수일 교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파타고니아를 더 남쪽으로 내려가 우수아이아와 비글해협 앞에 직접 서보고 싶다.

6. 다섯 풍경이 가리키는 곳 ― 다시 뜨거워지는 삶

체 게바라, 마라도나와 메시, 탱고, 파타고니아, 그리고 우수아이아.

책을 덮고 떠올린,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하는 아르헨티나의 다섯 가지 풍경이다.

혁명가와 축구선수, 춤과 음악, 거대한 자연과 세상의 끝에 있는 도시. 서로 전혀 다른 풍경들이지만 하나씩 따라가다 보니 결국 한곳으로 모인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이 짧은 삶을 무엇으로 채우며 살아갈 것인가.

손미나는 자신의 삶이 흔들리던 시기에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그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 풍경을 따라가며 나 역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다시 생각했다.

나에게는 산이 있고 여행이 있다.

그것들이 밥벌이와는 다른 삶의 리듬을 만들어주고, 내가 아직 가슴 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준다.

프롤로그에서 생각했던 ‘억겁과 찰나’도 결국 여기로 돌아온다.

억겁의 세월에 비하면 인간의 삶은 찰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허무하게 살 이유는 없다. 오히려 너무 짧기 때문에 더 알차고 찰지게 살아야 한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아가는 것. 밥벌이에 삶 전체를 내주지 않고 나를 움직이게 하는 무엇인가를 하나쯤 품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찰나보다 짧은 인생을 값지게 살아가는 한 방법일 것이다.

그래서 『다시 가슴이 뜨거워져라』라는 제목은 책을 덮은 뒤 처음보다 더 넓은 뜻으로 다가왔다.

다시 뜨거워져야 할 것은 사랑만이 아니다.

삶을 향한 가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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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세키 이후 단 한 명의 소세키도 다시 태어나지 않았다.” _ 세누마 시게키
“지금도 낡지 않았다. 이것은 가히 기적이다.” _ 고바야시 교지
“메이지 시대 일본인의 정신적 공백을 지식인의 눈으로 정확히 포착해 낸 작가.” _ 나카무라 미츠오

1. 작가를 말하다-나쓰메 소세키 夏目漱石

일본의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1867~1916)는 일본 문학사상 최고의 국민 작가로 칭송 받는 작가다. 일본인 대부분이 중고등학교 시절에 그의 작품을 읽고 배울 만큼 소세키는 여전히 존경받는 존재다.
소세키는 도쿄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에 게는 두 살 때 다른 집안에 양자로 입양되었다 양부모의 이혼으로 다시 생가로 돌아온 독특한 사연이 있다. 도쿄 제국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도쿄 고등 사범 학교, 제5고등학교 등에서 교사로 일하던 중 폐결핵 초기 진단을 받기도 했다.

1900년 국비 유학생으로 영국 유학길에 올라 런던 에서 셰익스피어 연구가인 윌리엄 크레이그 밑에서 수학했지만, 부담스러운 유학 비용과 고독감, 영문학에 대한 위화감 등으로 신경 쇠약에 시달렸다.
1903년 일본으로 돌아와 교직 생활에 몸담다 1905년 38세의 나이에 『나는 고양이로 소이다』로 좋은 평가를 얻으며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사실 소세키는 문학적 야망보다는 유학 시절 얻은 신경증을 완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소설을 창작했다고 한다. 이후 교직을 떠나 아사히 신문사에 소설 기자로 입사해 전업 소설가의 길을 모색한다.

소세키는 소설뿐 아니라 한시, 하이쿠, 수필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작품을 남겼다. 대표 작으로는 『도련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풀베개』, 『산시로』, 『마음』, 『그 후』, 『한눈팔 기』 등이 있다. 1916년 지병인 위궤양이 악화되어 내출혈로 49세에 세상을 떠났다.


2. 작품을 말하다-나는 고양이로소이다, 吾輩は猫である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한심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고양이의 시선으로 거침없이 폭로하는 소설이다. 일본 근대 소설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이 작품은 소세키의 데뷔 작이기도 하다. 1905년 1월부터 1906년 8월까지 잡지에 연재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 지기 시작했고, 1905년 10월부터 1907년 8월까지 세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중학교 교사 구샤미가 키우는 고양이가 그 집의 서재에 모여드는 메이테이, 간게 쓰, 도후 등 무기력하고 속물적인 지식인 계급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보고하는 형식으로 전개되는 글이 다. 소세키는 작품 속 고양이의 시선으로 만담하듯 위트 넘치는 문체로 인간의 위선과 허세, 밑바닥 본성을 폭로하며 비웃는다.

이 작품은 전통과 서구 문명,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풍자 적으로 그리고 있다. 섬세하고 치밀한 심리 묘사와 윤리적 문제의식, 그리고 그것을 감싸는 능청스러운 이야기로 일본 근대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소세키의 작품들은 일본 근대 문학의 시작점으로 손꼽히면서 동시에 완성도 높은, 지금까지도 낡지 않은 기적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3. 세계를 말하다

지폐에 실린 작가의 얼굴

죽은 지 100년이 훌쩍 지났지만, 소세키는 여전히 뜨겁게 사랑받는 작가다. 소세키는 지난 2000년 일본의 아사히 신문에서 실시한 한 조사에서 ‘지난 1000년 동안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1위로 선정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1984년부터 2004년까지 20년 동안 일본의 1000엔권 지폐에 그려진 초상화의 주인공이 바로 소세키라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사랑받는 작가인지 확고 하게 증명하고 있다.

작가들의 작가

‘일본의 셰익스피어’라고도 불리는 소세키는 일본 근대 문학의 형태를 확립한 작가로 추앙 받는다. 소세키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기쿠치 간 등 내로라하는 작가들을 그의 문하생 으로 두었다고 한다. 소세키는 일본에서만 존경받는 작가로 그치지 않았다. 우리나라 근대 문학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이광수와 염상섭, 중국 근대 문학의 아버지로 자리매김한 루쉰도 그의 문학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은 19세기 후반 일본의 메이지 천황 때에,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중앙 집권 통일 국가를 이루어 일본 자본주의 형성에 기점이 된 변혁의 과정을 뜻한다. 소세키가 살았던 메이지 시대는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서양 문화가 급작스럽게 밀려온 시기였다. 소세키는 가치관의 혼란으로 빚어진 정체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급변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하며 인간 본질에 대해 깊이 탐구했다. 소세키가 일본인의 정신적 스승으로 자리매김한 이유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세계문학그림책 | 정아원 저자(글) · 이해나 그림/만화 · 나쓰메 소세키 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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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ㅣ 세계문학그림책
이해나 그림, 정아원 글, 나쓰메 소세키 원작 / 고래의숲 / 202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세키 이후 단 한 명의 소세키도 다시 태어나지 않았다.” _ 세누마 시게키
“지금도 낡지 않았다. 이것은 가히 기적이다.” _ 고바야시 교지
“메이지 시대 일본인의 정신적 공백을 지식인의 눈으로 정확히 포착해 낸 작가.” _ 나카무라 미츠오

1. 작가를 말하다-나쓰메 소세키 夏目漱石

일본의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1867~1916)는 일본 문학사상 최고의 국민 작가로 칭송 받는 작가다. 일본인 대부분이 중고등학교 시절에 그의 작품을 읽고 배울 만큼 소세키는 여전히 존경받는 존재다.
소세키는 도쿄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에 게는 두 살 때 다른 집안에 양자로 입양되었다 양부모의 이혼으로 다시 생가로 돌아온 독특한 사연이 있다. 도쿄 제국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도쿄 고등 사범 학교, 제5고등학교 등에서 교사로 일하던 중 폐결핵 초기 진단을 받기도 했다.

1900년 국비 유학생으로 영국 유학길에 올라 런던 에서 셰익스피어 연구가인 윌리엄 크레이그 밑에서 수학했지만, 부담스러운 유학 비용과 고독감, 영문학에 대한 위화감 등으로 신경 쇠약에 시달렸다.
1903년 일본으로 돌아와 교직 생활에 몸담다 1905년 38세의 나이에 『나는 고양이로 소이다』로 좋은 평가를 얻으며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사실 소세키는 문학적 야망보다는 유학 시절 얻은 신경증을 완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소설을 창작했다고 한다. 이후 교직을 떠나 아사히 신문사에 소설 기자로 입사해 전업 소설가의 길을 모색한다.

소세키는 소설뿐 아니라 한시, 하이쿠, 수필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작품을 남겼다. 대표 작으로는 『도련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풀베개』, 『산시로』, 『마음』, 『그 후』, 『한눈팔 기』 등이 있다. 1916년 지병인 위궤양이 악화되어 내출혈로 49세에 세상을 떠났다.


2. 작품을 말하다-나는 고양이로소이다, 吾輩は猫である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한심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고양이의 시선으로 거침없이 폭로하는 소설이다. 일본 근대 소설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이 작품은 소세키의 데뷔 작이기도 하다. 1905년 1월부터 1906년 8월까지 잡지에 연재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 지기 시작했고, 1905년 10월부터 1907년 8월까지 세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중학교 교사 구샤미가 키우는 고양이가 그 집의 서재에 모여드는 메이테이, 간게 쓰, 도후 등 무기력하고 속물적인 지식인 계급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보고하는 형식으로 전개되는 글이 다. 소세키는 작품 속 고양이의 시선으로 만담하듯 위트 넘치는 문체로 인간의 위선과 허세, 밑바닥 본성을 폭로하며 비웃는다.

이 작품은 전통과 서구 문명,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풍자 적으로 그리고 있다. 섬세하고 치밀한 심리 묘사와 윤리적 문제의식, 그리고 그것을 감싸는 능청스러운 이야기로 일본 근대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소세키의 작품들은 일본 근대 문학의 시작점으로 손꼽히면서 동시에 완성도 높은, 지금까지도 낡지 않은 기적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3. 세계를 말하다

지폐에 실린 작가의 얼굴

죽은 지 100년이 훌쩍 지났지만, 소세키는 여전히 뜨겁게 사랑받는 작가다. 소세키는 지난 2000년 일본의 아사히 신문에서 실시한 한 조사에서 ‘지난 1000년 동안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1위로 선정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1984년부터 2004년까지 20년 동안 일본의 1000엔권 지폐에 그려진 초상화의 주인공이 바로 소세키라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사랑받는 작가인지 확고 하게 증명하고 있다.

작가들의 작가

‘일본의 셰익스피어’라고도 불리는 소세키는 일본 근대 문학의 형태를 확립한 작가로 추앙 받는다. 소세키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기쿠치 간 등 내로라하는 작가들을 그의 문하생 으로 두었다고 한다. 소세키는 일본에서만 존경받는 작가로 그치지 않았다. 우리나라 근대 문학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이광수와 염상섭, 중국 근대 문학의 아버지로 자리매김한 루쉰도 그의 문학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은 19세기 후반 일본의 메이지 천황 때에,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중앙 집권 통일 국가를 이루어 일본 자본주의 형성에 기점이 된 변혁의 과정을 뜻한다. 소세키가 살았던 메이지 시대는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서양 문화가 급작스럽게 밀려온 시기였다. 소세키는 가치관의 혼란으로 빚어진 정체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급변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하며 인간 본질에 대해 깊이 탐구했다. 소세키가 일본인의 정신적 스승으로 자리매김한 이유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세계문학그림책 | 정아원 저자(글) · 이해나 그림/만화 · 나쓰메 소세키 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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