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5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예외 - 경계와 일탈에 관한 아홉 개의 사유
강상중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5월
평점 :
품절


 ‘예외라는 개념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어떤 사람에게는 자기 이론을 구성하는 데 있어 들어맞지 않는 퍼즐 조각이자 골칫거리일 것이다반면 어떤 사람에게는 새롭게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예외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고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막을 수 없는 변화의 계기로 보고 수용하는 사람들이 있다예외는 생각보다 다양하고 복합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이 책은 역사학정치학경제학법학과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의 전문가 아홉 명이 예외라는 화두로 각자 풀어낸 이야기들을 모은 책이다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소수의 특수한 사례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예외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들을 지닐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저자들은 예외가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과학의 입장에서 살펴보자면하나의 과학 법칙이 정립된 이후 그 법칙에 대한 예외가 어김없이 나타난다대부분의 예외는 기존의 법칙 안에 포섭되지만어떤 예외는 기존의 법칙을 대체하는 새로운 법칙이 된다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과학은 발전해 간다또한 규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즉 예외가 되지 않으려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독립적인 사고를 하는 예외적인 사람들은 역사의 변화를 일으키는 도화선 역할을 한다법과 예법제도가 옳지 못하면 그것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이 옳다고 판단하는 대로 행동하라고 주장했던 공자가 그런 예외적인 인물의 대표라고 불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외를 두려워하고 배척하는 것이 공연한 것만은 아니다저자들은 예외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무시하지 않는다평범한 중학생이 이유 없이 어린아이를 죽인 사건처럼 예외로서의 극단적인 악도 존재한다도덕을 중시하는 성리학 사회였던 조선에서조차시신을 이용해 무고한 사람에게 살인 누명을 씌우고 돈을 갈취하는 도뢰(圖賴)’라는 예외적인 범죄가 성행했다박정희의 유신정권에서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헌법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예외 상태의 통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책은 이렇게 위험한 예외들에서도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관념에 얽매이고 당장 눈앞의 도뢰 사건을 해결하는 데 급급해도뢰가 내포하고 있는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에 대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그러나 우리는 예외 상태의 통치였던 독재를 통해통치 권력을 규제하는 절대적 규범의 존재 자체가 문제를 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박정희라는 한 인격이 통치 권력을 규제하는 절대적 규범이 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계급민족이념 등 어떤 절대적인 규범이 통치 권력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다절대적 규범이 권력을 작동시키게 하는 대신 여리고 나약한 존재들이 상위의 권위 없이 연대하는 것이것이 우리가 예외 상태에서 배우는 정치적 상상력이다.

 

   한편 예외는 배제당하는 존재들이기도 하다정치학자 박상훈은 한국의 지역주의를 통해예외와 배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왔던 한국의 정치 현실을 비판한다그는 지역주의라는 해석의 틀을 악용해 사람들을 분열시켜 온 세력들에 맞서지역을 넘어 실업자비정규직이주노동자 등 더 많은 예외와 배제의 대상을 돌아보자고 이야기한다기획자의 말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까닭은 예외들의 희생 덕분이고우리 자신 또한 언제든지 예외와 배제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예외를 배제당하는 존재로 볼 때예외를 받아들이는 것은 모두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일본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우리나라의 세월호 사건 등 최근 예외적인 사태들이 늘어나고 있다그리고 성소수자이민자 등 예외적인 존재들의 존재감도 전 세계적으로 점점 커지고 있다그러나 국가는 예외적인 사태에서 어떤 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고사람들은 예외적인 존재들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드러낸다이렇게 계속해서 예외적인 것들에 대해 아무 고찰 없이 외면하거나 거부한다면우리는 예외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도 못하고함께 살아가는 법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이러한 현실 속에서 이 책은 말한다우리는 예외를 막을 수 없고예외를 잊어서도 안 된다고그리고 묻는다예외를 대하는 당신의 태도는 어떠한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간은 강간이다
조디 래피얼 지음, 최다인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간은 강간이다매우 당연한 이야기이다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당연한 이야기를 부정하는 사람이 많다.  2017년 7월, 한 강간 피해자가 자살했다.  그녀는 자신이 다니는 대학교 학생들이 사용하는 앱 안의 익명게시판에서 자신이 겪어온 성폭행 피해 사례를 이야기했었다. 그러나  "피해자 코스프레 한다", "꽃뱀 같고 역겹다", "남자한테 꼬리쳤는데 넘어오지 않으니 자존심이 상해 엿먹이려는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란 단어가 아깝다", "공론화 좀 그만 시켜라"라는 악플들이 달렸다. 9개월이 넘도록 이런 비난에 시달린 그녀는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 강간을 부정하는 행동이 피해자에게 2차 가해가 되고, 끝내 피해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미국의 여성 범죄 전담 변호사 조디 래피얼이 쓴 『강간은 강간이다』는 강간은 강간일 뿐이라는 것을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증거를 통해 논증한다. 우리보다 성 문화에 있어서는 더 진보적일 것 같은 미국에도 강간 피해자들의 고발을 허위 신고로 치부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충격적이다.  "성폭력과 가정폭력은 인격장애가 있는 여자들이 피해자인 척하려고 애쓴 결과다", "강간 신고는 여성들의 생리 증후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여성들을 깊이 불신하는 남성들이 있다. 심지어 여성들 중에도 강간을 강간으로 인정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극단적인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성적 자유를 누리려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며 강간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보수주의적인 여성들도 여성이 헤퍼서 일어난 일이라며 강간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돌린다. 


  이들은 오류가 있는 통계 자료를 인용한 자료들을 반복해서 인용하며 허위 강간 신고의 비율을 부풀려서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최근 정정된 통계 자료는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자료들만 선택해서 근거로 삼는다. 이들의 주장에 반박하려면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하기 때문에, 저자는 강간 피해자 보호단체들이 정확하지 않은 통계 자료를 근거로 하는 것도 경계한다. 그녀는 수많은 강간 연구와 통계를 꼼꼼히 검토하고, 합리적인 것으로 확인된 수치만을 근거로 든다. 그 결과, 허위 강간 신고는 강간 신고 전체 중 2~8퍼센트에 불과하고, 그 중에서도 피해자의 신고 철회에 근거를 둔 경우가 많았다. 피해자의 신고 철회는 용의자의 협박이나 수사과정에서 겪는 압박감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경찰과 법정은 피해자를 허위 신고자로 의심할 때가 많고, 심지어 피해자의 성기 사진을 법정에서 공개하거나 피해자에게 강간 당시 촬영된 동영상을 보라고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 큰 상처를 입고 기소를 포기하는 피해자들이 많다. 


  저자는 통계 분석과 함께 다섯 명의 피해 여성들의 사례도 함께 이야기한다. 저자는 피해 사례를 자극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준다.  책에 소개된 피해자들 또한 사법 당국이나 주변의 몰이해와 비난에 상처 받았지만, 강간으로 인해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고 강간에 대한 사람들의 몰이해에 반박한다.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 책은 강간을 통계상의 수치로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체험으로 이해하게 한다. 


"강간은 나쁜 섹스가 아니에요.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강간은 아예 섹스가 아니에요. 섹스는 합의하에 이루어지고 강간은 그렇지 않죠. ...강간범에게는 섹스일까요? 강간범은 섹스를 섹스로 이해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강간은 섹스를 무기로 사용하는 행위죠." 


“강간은 그 자체로 충분히 끔찍해요. 그런 사건을 겪은 피해자가 사람들, 가해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 때문에 자기를 의심하고 혐오하는 일이 일어나선 안 되는 거잖아요. 주변에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 있다면 당신이 그 사람 편이라고 알려주세요. 명백히 잘못된 일을 목격했다면 그렇다고 말해주세요. 침묵을 지키는 것은 중립이 아니에요.”


  자극적이거나 선정적인 면은 최소화되었지만, 강간당했다는 사실마저 의심당하고 피해자들이 몰이해와 비난이라는 2차 가해를 당하는 상황, 피해자들이 한 인간이라는 사실보다는 자신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급급한 강간 부정론자들의 모습 자체가 마음을 답답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직시해야 우리는 강간이 부정당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 강간이 부정당하는 세상에서 강간범들은 자유를 얻고 여성들은 더 큰 위험 속에서 살아간다. 저자가 말하듯이, 강간은 강간일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 스포일러 포함

 『해리 포터』에서는 기차역 한쪽 벽 너머에 마법의 승강장이 숨어 있고, 『나니아 연대기』에서는 옷장 속에 환상의 세계 나니아로 가는 통로가 있다.『위저드 베이커리』는 우리나라 어느 도시의 어느 골목에 있는 빵집 너머에 있는 마법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해리 포터』와 『나니아 연대기』에서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주로 마법의 세계 안에서 펼쳐지는 반면,  『위저드 베이커리』 속 주인공은 현실의 공간 안에서 현실과 부딪치는 마법을 본다. 현실은 말할 것도 없이 가혹하고, 마법도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청소년 소설이면서도 어른을 위한 잔혹동화이기도 하다. 

  제목 그대로 마법사의 빵집을 배경으로 하지만, 이 책은 마법의 빵보다는 마법의 빵을 둘러싼 사람들의 욕망과 실수, 그로 인한 가혹한 대가, 그리고 주인공 소년의 어두운 성장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소년은 위저드 베이커리에 숨기 전에도 후에도 아동성폭행, 아동학대, 자살, 스토킹 등 현실의 어두움과 마주친다. 사람들은 마법이 자신의 소망을 이루어지고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라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결과를 만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인간에 비하면 전지전능한 것 같은 마법사 점장도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마법과 환상은 소년도 손님들도 마법사 자신도 구원하지 않는다. 소년과 마법사에게 위안과 구원을 준 것은 서로를 아끼는 마음과 자신 앞에 놓인 고난들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소년이 타임 리와인더 쿠키로 시간을 되돌리지 않았을 때의 결말 속에 작은 희망이 숨어 있을 것이다. 소년이 가족들이나 손님들의 어두움을 다시 마주친다고 해도, 다시 만난 마법사, 파랑새와 함께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다. 

  소년이 본 열 가지가 넘는 마법의 빵 중 그 효과가 손님들에게 나타난 이야기가 생각보다 적은 것은 아쉽다. 시험이나 출장 때 마인드 컨트롤을 돕는 마인드 커스터드 푸딩, 화해하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메이킹 피스 건포도 스콘(개인적으로 가장 쓰고 싶은 빵이다.), 학교나 회사에 자기 대신 도플갱어가 나가게 만드는 도플갱어 피낭시에까지 실제 효과가 나타난 이야기를 좀 더 썼다면 이야기가 더 풍성해졌을 것이다. 체인 월넛 프레첼을 산 여성이 경솔했던 것은 맞지만, 헤어진 남자친구의 스토킹으로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방어 수단조차 주지 않고 혼자 책임지라고 한 것(마법사는 자신의 실수로 인해 일어난 살인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었고, 적어도 자신을 방어할 수단들을 갖추고 있었다.), 여성 캐릭터들은 희생자(주인공의 친어머니, 주인공의 이복여동생)가 아니면 조력자(파랑새), 악역(진상 손님들, 배선생)일 뿐이라는 것도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환상과 현실을 엮어나가는 솜씨와 잔혹한 현실과 마법 속에서 작게나마 빛나는 희망은 여전히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빨간구두당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스포일러 포함


  20여 년 전 일본의 작가 키류 마사오는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에서 백설공주의 왕비는 계모가 아니라 친어머니였다, 백설공주는 부왕과 근친상간 관계였고 왕비는 친딸을 질투한 것이다, 라는 파격적인 동화의 재해석을 보여주었다. 그 이후로 동화의 재해석, 잔혹동화들은 수없이 반복되어서 이제는 식상할 정도다. 그래도 표제작 「빨간구두당」의 내용 소개를 듣고 신선한 내용일 것 같아서 이 책을 읽었는데,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친숙한 이야기를 소재로 하지만 다자이 오사무의 직소처럼 다 아는 이야기임에도 몰입하게 만드는 힘을 갖추지도 못했고, 강렬한 이미지를 보여주지만 이미지들은 한 조각 한 조각 순간적으로만 빛난다. 동화들에 살을 붙여 종이인형 같은 인물들과 틀에 박힌 이야기에 현실감을 불어넣으려고 했지만, 소설 속 환상과 현실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겉돌 뿐이다. 그래서 내게 이 책의 재해석은 신선하지도, 매혹적이지도 않았다. 


1. 빨간구두당 

  색이 사라진 세상, 개인의 개성과 감정이 철저히 억압받는 세상, 그 속에서도 색에 눈을 뜨는 주인공은 이미 영화 <플레전트빌>과 미국의 작가 로이스 로리의 소설기억 전달자에서 등장한 설정이기 때문에 그렇게 신선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처음에 책 소개만 봤을 때는 '빨간구두당'이 색채를 통해 자유를 얻기 위해 싸우는 단체의 이야기로 흘러갈 줄 알았다. 그 대신 빨간색을 세상에 혼란을 가져오는 존재로 보고, 사람들을 빨간색을 볼 수 있는 '빨간구두당'으로 몰아 발목을 잘라버리는 마녀사냥이 등장한다. 이런 마녀사냥과 빨간색을 찾는 신부의 구도기가 서로 따로 노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빨간구두당'이 말하려는 메시지가 어떤 것인지 와 닿지 않는다. 


2. '개구리 왕자 또는 맹목의 하인리히 

  여러 면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직소를 연상시킨다. 동양인 작가가 서구의 이야기를 재해석해 쓴 단편 소설이고, 1인칭 주인공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형식이며,  주인공은 어느 한 인물에 대해 깊은 양가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개구리 왕자...」는 개구리 왕자의 충성스러운 시종 하인리히를 화자로 내세우고 있고, 직소는 예수를 배신한 제자 유다를 화자로 내세우고 있다.직소는 유다가 예수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말하다가 자신을 배신한 예수에 대해 증오를 내뿜으며 쏟아내는 이야기에 독자들이 몰입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개구리 왕자...」 또한 화려한 문장을 나열하고, '직소'와 같이 충성을 바치던 대상에 대한 양가감정을 묘사한다. "당신의 시야가 다시 맑게 개기만 한다면 배신자의 오명을 쓰는 일쯤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의 밤이란 이토록, 마음속에 그리는 이에 대한 충심과 경애가 깊어지면서 동시에 의혹과 원망과 모종의 음모가 신생되기도 하는 양극의 시간인 듯합니다."는 구절은 직소」의 유다가 예수를 배신하게 된 심리를 말하는 장면에 넣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유다의 절절한 애증이 어떻게 배신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직소'와 달리, '개구리 왕자'는 하인리히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주지 못한다. 하인리히는 주군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한쪽 눈을 잃는 것도 감수하지만, 때때로 한심한 주군의 모습을 가차없이 비판한다. 하인리히의 '마음속에 그리는 이에 대한 충심과 경애'는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라기보다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기에 새겨진 강박관념처럼 보인다. 굳이 짐작해 보자면, 심장이 떨어져 나가도록 헌신했는데, 정작 주군은 이 핑계 저 핑계 대느라 심장의 고통을 연장시켜 놓았고, 한참 뒤에서야 얼굴만 예쁜 한심한 여자를 선택했다. 여기에서 나온 배신감과 분노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의 충성과 헌신이 배신당한 것에 대한 분노 이면에 깊은 애증이 있는 것처럼 묘사되었는데, 그만한 애증을 가질 만한 계기나 심리 변화가 충분히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하인리히의 내면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3. 기슭과 노수부

  동화 속 주인공들은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들의 칭송을 받는다. 그러나 주인공을 제외한 사람들은 과연 그의 도움으로 행복해졌을까? 여기에 의문을 품고, 주인공의 도움이 실질적으로 그들의 삶을 구원하지 못했다는 재해석은 신선하다. 주인공의 일시적인 도움으로 구원되기에 그들의 문제는 너무나 뿌리깊고 구조적인 것이다. 이것을 깨닫게 하는 단편이었다.


4. 카이사르의 순무

  자신이 원하는 보상을 받지 못하자 자신의 몸을 갈가리 찢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어서도 순무에 달라붙어 있는 이상한 남자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는다. 원래 의도와는 상관없이 권력자들에게 자기 의도를 곡해당하고 희생되는 사람들은 지금도 많을 것이다. 환상과 현실 양쪽의 잔혹함이 더해져 두 배로 잔혹하고 어둡게 느껴지는 단편이다.


5. 헤르메스의 붕대

  주인공이 금기를 어겨 세상에 다시 없을 기회를 놓치는 수많은 동화의 공식을 그대로 따른다. 열등감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망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 배를 갈랐다 거위만 죽였던 주인공 부부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을 과욕 때문에 놓치는 주인공들이 허다한데,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을 잘 활용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는 주인공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6. 엘제는 녹아 없어지다 

 원작이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자신을 잃은 엘제를 비판한다면, 구병모의 소설은 엘제와 엘제를 배척하기만 한 사람들 양쪽 모두를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엘제가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데는 엘제 자신의 책임도 있지만, 엘제와 함께 대화하고 고민하기보다는 그냥 무시해 버렸던 사람들의 책임도 있다. 부모는 엘제가 대학에 가서 학문을 익히게 하는 대신 귀찮은 딸을 치우듯이 시집보내 버렸고, 남편은 엘제를 복종시키려고만 했으며 시댁 식구들은 엘제를 비웃고 무시하기만 했다. 엘제는 그런 현실에 맞서서 형이상학적 세계, 학문적 세계로 더 숨어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엘제와 동질감을 느낀다. 


7. 거위지기가 본 것은 

 이 책에서 유일하게 감성적으로 와 닿았던 단편이다. 자기가 공주인 척 위장한 시녀 때문에 거위지기가 된 진짜 공주. 주변의 도움으로 시녀의 정체를 밝히고 왕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이게 과연 해피엔딩일까? 공주는 왕과 행복하게 살았을까? 이 단편은 이런 의문에서 시작한 재해석으로 보인다. 공주임을 몰랐을 때부터 공주를 향해 왔던 거위지기 소년의 감정은 더 없이 풋풋하고 순수하다. 바람에 흩날리는 공주의 머리카락 묘사는 소년의 설렘을 섬세하게 전달한다. 마지막에 소년과 공주의 감정이 통하는 모습은 관능적이다. 그러나 작가가 말하듯이, 소년은 공주를 향한 감정의 대가로 처참하게 처형될 것이다. 그래서 소년의 풋풋한 사랑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8. 화갑소녀전

 원작인 '성냥팔이 소녀'처럼 얼어죽지는 않지만 정체불명의 에너지 공장에 취직해서 자기 온 몸을 착취당하고 죽는 성냥팔이 소녀의 이야기이다. 살아남으려다 결국 자신을 다 소진해 버리는 것은 성냥팔이 소녀만이 아닐 것이다. 1960, 70년대에 착취당하던 근로자들뿐만 아니라 지금의 우리 자신까지 떠올리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려라 메로스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욱송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으리. 그 사람은, 너무합니다. 너무합니다. 예. 못된 놈입니다. 나쁜 사람입니다. 아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도저히 살려둘 수가 없습니다. 


 예, 예. 차분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을 살려두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의 원수입니다. 예, 모든 것을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있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산산조각을 내어 죽여주십시오.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소설 「직소(直訴)」는 이렇게 도입부부터 강렬한 증오를 쏟아낸다. 작품의 화자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스승을 고발하는데자신 안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스승에 대한 애증을 미친 듯이 쏟아낸다. 읽을 때마다 바로 내 앞에서 미친 듯이 쏟아 놓는 듯한 그의 이야기를 홀린 듯이 끝까지 읽게 된다. 나까지 그의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조금만 읽어도 눈치챘겠지만, 이 소설의 화자는 예수를 배신한 제자 가룟 유다다.(이 책에서는 이 단편이 '유다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그럼에도 유다가 마지막에 헤헤, 저는 가룟 유다입니다.”라고 밝힐 때는 전율을 느끼게 된다. 그가 예수에 대한 모든 감정을 정리하고 배신자 가룟 유다로 남겠다고 스스로 선언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유다는 예수에게 깊은 양가감정을 품고 있다. 더 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예수를 흠모하면서도, 예수에게 현실감각이 없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현실감각이 부족한 예수 대신 발로 뛰어다니며 예수와 제자들을 먹여 살리지만, 예수가 그것을 알아주지 않고 자신을 장사치라고 경멸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를 원망하면서도 그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 예루살렘 입성 후, 유다는 자신에게 보여주지 않은 따뜻한 모습을 창녀인 마리아에게 보여주고, 성전을 사흘 만에 무너뜨렸다 다시 짓겠다는 호언장담을 늘어놓는 예수의 모습에 실망하고 그를 배신하기에 이른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보인 따뜻한 모습에 유다는 자신의 배신을 후회하고 다시 예수를 따르려 마음먹지만, 그 순간 예수는 말한다. "너희 중에 나를 배신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태어나지 않는 게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 이제 깊은 후회와 사랑은 격렬한 증오와 배신으로 바뀐다. 

 실제 유다가 정말 돈에 눈이 먼 배신자였는지, 예수를 너무나 사랑하고, 너무나 증오해서 배신하게 된 가여운 인물이었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랑하지만 결코 가질 수 없는 존재, 결코 가질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에 대한 애증을 이보다 더 절절하게 표현한 작품을 보지 못했다. 예수를 어느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배신자라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직소」의 유다는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유다와 매우 닮아 있다. 「직소」보다 수십 년 후에 만들어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직소」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직소의 유다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유다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예수가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배신자의 운명으로 이끄는데도, 예수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 운명으로 스스로 걸어갔다. 온 세상을 구원한 구세주에게마저 버림받은 유다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존재에게서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마음은 얼마나 참담하고 절망스러웠을까. 자신은 예수가 경멸하는 장사꾼일 뿐이라며 위악을 떠는 유다의 마지막 모습은 연민을 느끼게 한다.


  「직소」는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와도, 독자인 우리와도 수천 년은 동떨어진 시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설이다. 그럼에도 바로 우리 앞에서 유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놓는 것 같은 현장감을 느끼게 한다. 같은 작가의 작품인  「달려라 메로스」는 원전인 고대 그리스 전설에 심리묘사를 조금 더했다는 느낌만 주지만, 「직소」는 유다가 우리처럼 사랑하고 증오하며 살아간 인간임을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읽을 때마다 그의 감정에 함께 사로잡혀 끊김없이 단숨에 읽어나가게 한다. 이것이 다자이 오사무의 천재성이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5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