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에 다녀왔다
지축역에서 가는 직행 마을버스가 있으나 70-120분 간격이다. 버스타고 고양동까지 가서 택시를 불렀다. 공교롭게 어제 방문했던 중남미 문화원 부근을 또 왔다. 안녕?
연휴기간 그제 어제 오늘 여러 곳이 막혔다는데 나는 큰 불편함이 없었다. 어쩐지 다 피해간 느낌이다. 드라이브할 때도 양평 부근 정체구간 다 피해갔고, GTX와 지하철탈 때도 한적했으며 가는 전시장마다 사람이 많지 않아 쾌적하게 관람했다.

가나아트파크를 지나 장흥관광구역을 진입하는데 택시기사가 여 앞에 청련사 되게 커요, 라고 해서, 그래요? 바로 세워주세요 하고 내려서 올라갔다. 왕십리에서 이전했다는 경기도유형문화유산 불상도 보고 산신각도 가고 대웅전도 갔다. 오늘은 초파일이자 어린이날이다. 청련사에 어린이도 있고 부처님도 보였다. 법회에 앉아있는 어린이의 얼굴은 물론 밝지 않았지만.
아, 오늘은 108배 안하고 금방 가야해요 죄송해요 되뇌이고 대웅전에서 삼배만 하고 길을 나섰다.

바로 앞에 양주시립 민복진미술관과 장욱진미술관이 같이 있다. 장욱진미술관은 장흥조각공원을 입장해서 둘레길을 산책하다가 입장하는 코스로 꾸며져있다. 장욱진은 유영국, 박수근, 김환기, 이중섭과 어깨를 견주는 2세대 서양화가다. 그의 작품세계는 회화에 국한되지 않고 조각도 있다. 수묵의 영향을 받은 듯한 간소한 구성과 원근법이 느껴지지 않는 오브제의 레이어가 특징이다. 초가집 안에 들어있는 수염난 웃긴 아저씨가 그의 페르소나인가 싶다. 전체적으로 발랄하고 귀여운 맛이 있다. 이 스타일과 가장 비근한 작가는 이왈종이다. 제주 남쪽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지금 리모델링 휴관중) 근처에 왈종미술관이 있고, 서쪽 빛의 벙커에 샤갈과 함께 왈종도 이머시브전시를 하고 있다. 장욱진은 1917년생, 이왈종은 1945년생이다.
민복진은 미술관이 위치한 양주와 관련이 있다. 1927년 양주출생이다. 1층은 50-60년대 인체조각전을 하고 있고, 25년 상반기 5개월 내내 진행된다. 이어서 25년 하반기 5개월 동안은 70-80년대 인체조각전을 한다.

위의 사진은 콜라주같지만 구도 하나에 담은 사진이다
요정은 꽃, 인어는 물갈퀴로 표현

교외지역 미술관은 너무 자주 올 수 없다. 고속도로에 있는 가든과 같다. 집 앞의 밥집이나 프랜차이즈나 배달음식과 다른 전략을 요한다. 늘 비슷한 메뉴여야한다. 땅값이 싼 곳에 큰 건물을 지어놓고 주차장이 완비되어 있어야한다. 오래 영업하고 있으면 왔다갔다 사람들이 눈여겨보고 있다가 한두 번씩 들른다. 가든도 매일 가는 사람이 없듯 교외지역 미술관도 도심지역 갤러리처럼 매일 갈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메뉴를 여러 번 바꿀 필요는 없다. 기억나는 그 맛을 제공하는 게 더 좋다. 매일 가는 곳은 쉬이 질리기에 프로모션으로 신메뉴를 내줘야한다. 영업자입장에서는 번거로울 수 있고 시판소스의 생산과 트렌드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한다. 안그러면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
그러니 S/S에 한 번, A/W에 한 번 이렇게 방문하면 좋도록 전시를 진행하는 것은 현명하다. 3개월에 한 번 교체도 소화하기 쉽지 않을거다. 서울 외곽지역 미술관 모두에 공통되는 사항이다.
인체조각이라하니 사람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구현한 작품도 있고 추상화한 작품도 있다. 어떻게 재료의 물성을 살리면서 정밀하게 표현했는지, 어떻게 눈 코 입 인체의 각 부분을 생략하면서도 그 본질을 드러내려했는지 가늠해보는 재미가 있다.

예를 들어 민복진의 연(68년)은 대리석으로 사람의 얼굴을 표현했는데 좌이는 두툼한 직사각형, 우이는 원이 뚫린 사각형이다. 구멍이 뚫어 눈을, 대리석 끄트머리로 앞머리를, 삼각형 홈을 파서 입과 턱을 함께 나타냈다.

그리스도교 성인조각은 하늘하늘 흘러내리는 치마의 부드러운 주름을 어떻게 단단한 석재로, 즉 강성으로 연성을 나타냈는지가 핵심이다.


토르소나 여성조각은 여성 특유의 곡선을 어떻게 표현했는지가 관건. 곡선의 각도와 흐름에 초점이 있다. 어렸을 때는 야한조각이고 조각가는 변태인줄 알았는데 전혀 그런게 아니다

2층은 개방형 수장고로 민복진의 미완성 작품을 소마킴과 문선우의 3채널 미디어아트와 함께 볼 수 있다. 하나의 덩어리로 붙어있는 어머니와 자식을 표현한 일련의 조각들이다. 잘라낸 석재에 그은 선들을 보면 건축가마냥 정교하게 설계한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적분까지는 아니어도 공간도형의 아이디어는 많다. 수학의 쓸모가 이렇다. 입시수학이 아닌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를 이해하는 언어로서 수학은 평생 재밌게 배울 수 있다




어머니의 품에서 자식이 나오니 같은 물성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고, 어머니와 자식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으며 서로 바라보고 있으니 얼굴이 맞대고 있는 것이 적절하다. 부드럽게 다듬은 표면과 부드러운 시선교환, 유연하고 따땃한 모친의 마음이 연결된다. 물성과 의도와 구현방법 모두 적절하다


1층 체험공간에는 조각에 사용되는 흙을 실제로 만져볼 수 있게 했다. 재미난 경험이었다. 조각작품은 한 걸음 떨어져 눈으로 보기만 했지 빚는 자의 마음으로 만져보 것은 처음이다. 론 뮤익전 지하 영상에서 작가가 소년소녀작품의 얼굴을 여러 번 고치며 살점을 매만지던 장면이 인상깊었다. 마치 루시안 프로이드의 그림처럼 피부 살점의 물성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조각용 흙을 나의 손으로 생생히 만져보니 더욱 더 조각이 내 삶의 한켠에 다가와 자리를 잡았다. 보들보들하고 푸석푸석하고 공기층이 있고 누르면 단단해지고 풀면 헤어지는 흙의 입자감을 느끼면서 형태를 조밀하게 느껴보았다. 베이커리 반죽과 비슷한 감각이다.

왜 조각가가 시인과 같은지 깨달았다. 대체로 조각가는 말 없이 침묵으로 소통한다. 작품에 대해서도 화려한 평론의 언어나 세련된 학술용어로 표현하지 않는다. 이유는 조각이라는 행위 자체에 내재해있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자는 구현한 결과외에 말할 것이 없다. 조각에는 메시지가 선명하다. 조각 위에 몇 문장 이상을 새길 수도, 복잡하게 형태를 만들 수도 없다. 붓을 여러 번 터치하며 그리는 화가가 펜을 여러 번 움직여 글을 쓸 수 있는 것과 다른 맥락이다.
하여 나도 사랑의 케이크를 빚어보았다. 보여지는 것 이상으로 할 말은 없다. 사랑의 마음, 그것이 전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