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노부부의 모범이라고 보여질만큼 평화롭게 살고 있던 조르주와 안느, 그 둘의 일상은 아침 나절 잠시 혼절한 안느로 인해 깨지게 된다. 가벼운 뇌출혈이라는 말에 수술을 하게 되지만 결국 안느에게 오른쪽 편마비라는 휴우증을 남기고 만다. 퇴원한 그녀는 남편에게 다시는 자신을 병원에 보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본인도 노쇠한 판에 아내 병 수발을 들게 된 조르주는 다른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살뜰하게 그녀를 보살핀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아내를 잘 보필하려 애를 쓴다 한들, 간병이 힘에 부치지 않을리도 순조로울리도 없었다.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간병을 최선을 다해 애쓰는 조르즈,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들어 하는 사람은 바로 안느였다. 평생 피아노를 가르치며 살아온 우아하고 지적인 안느에게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불구의 몸이란 좌절 그자체였던 것이다. 이제 나빠질 일만 남았다고, 과연 앞으로 무엇을 기대해야 하겠느냐고 좌절한 눈으로 묻는 안느에게 조르쥬는 화는 낸다. 그 자신도 그걸 모르진 않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난감한건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지금의 상황이 버겁긴 하지만 그저 묵묵히 대처해 나가는 수밖엔 없다고 암묵의 동의를 한 둘은 하루 하루를 살아나가기로 한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시지, 간신히 버티고 있던 둘에게 인생은 잔인하기만 하다. 도움을 받기 위해 들인 가정 간호사는 무능한데다 무심하고, 오랜만에 친정집에 들른 딸은 엄마를 방치한다고 화를 낸다. 그나마 적응해 나가던 안느는 두번째 뇌출혈을 겪으면서 본격적으로 정신줄을 놓기 시작한다. 밤이고 낮이고 아프다고 끙끙대는 안느를 돌보면서 조르쥬의 두려움은 점차 커져간다. 그는 언젠가는 결단의 시간이 올 것임을 예견하지만, 그 날이 조금이라도 늦춰지길, 내진 자신의 손으로 그런 일을 벌이지 않게 되길 기다리는데...


 




감독은 축복받은 노년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일단 관객들에게 논란의 여지를 잠재운다. 이 둘이 정말로 사랑하는 부부였고, 굉장히 지적인 사람이었으며, 정서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이 주제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즉, 그들이 아무 이유없이 쉽게 목숨을 버릴 사람들이 아닐 뿐더러 생명을 경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더불어 그들이 미쳤거나 무식하거나 분노한 사람이라거나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설명은 그들이 앞으로 벌일 일들을 생각하면 유용한 방패막으로 활용될 것이다. 만약 그들이 아주 아주 가난했고, 삶에 찌들었으며, 매일 매일 전쟁을 하며 살아가는 무식한 노부부였다면, 영화는 쉽게 촛점을 잃었을 것이다. 생각할 것도 없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살인으로 비춰졌겠지. 간병에 지친 노인네가 평생 해로해온 가엾은 아내를 죽인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똑같은 상황임에도 우리의 판정은 그렇게 다르다. 불공평하다고? 아니, 원래 인생이 그런 법이다. 토를 달면서 항변하기엔 너무 지쳤으니 이젠 그저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는... 아니라고? 무슨 소리~~ 자신의 일이 아니라면 간병처럼 재밌는게 어디 있겠는가. 자신을 희생하고도 웃을 수 있는 인격을 남들에게 증명할 수 있는 기회도 되고 말이다. 왜 요즘도 간간히 뉴스에 나오질 않는가. 간병하던 치매 아내를 살해하고 자신은 자살하는 노인네에 대한 이야기가. 나는 그런 소식을 전하는 뉴스를 보면서 그 노인을 안됐다고 동정하는 논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살인을 하고 만 노인네의 정신상태에 대해 분노하는 논조는 봤어도. 그들은 쉽게  이름을 붙인다. 아내를 살해한 남자라고. 그녀가 병들었다는 이유로. 그가 지쳤으며 더이상 다른 길이 없다고 아주 아주 오랫동안 깊이 생각했을 것이란 것은 짐작하지 못한 채 그들은 호들갑을 떨어댄다. 다른 수가 있었을 거라고, 어떻게 무방비에 놓인 아내를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냐고, 간병에 지쳤다고 타인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 그렇게 쉬워서야 되겠느냐고 성토를 해댄다. 그런 기자들의 논조에 그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우리들은 그 노인네를 증오하게 된다. 늙었다는 것도 추한데, 거기에 살인이라니...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욱했다고 해서 , 병든 노인네가 걸리적댄다고 죽여대면 곤란하다고, 생명이 붙어있는 한 목숨은 다 아름답다고 귀중한 것이라고 말이다. 어찌보면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단지 그런 이유때문인 것일까?

이 영화가 특별했던 점은 바로 그 지점에서 감독이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감독은 조르쥬가 안느를 죽여야 했던 것이 걸리적대서가 아니라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당신은 사랑의 속성을 뭐라 생각하는가? 당신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죽일 수 있는가? 사랑때문에 살인자가 될 수도 있다고 당신을 생각하는가? 아마도 그건 사랑의 크기에 달린 것일 것이다. 나같은 보통 사람들의 경우 사람을 죽인다는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살인은 커녕 때려 본 적도 없는 내가 언감생심, 사람을 죽이라고? 나의 소심한 심장은 그런걸 감당할 수 없다. 하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나의 행동이 그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여줄 수 있다고 판단되어 진다면, 어쩜 나도 살인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도무지 전생에 어떤 죄를 졌길래 이런 끔찍한 감옥에서 언제 풀려날지도 모르는 형기를 채우고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만큼 비참한 투병을 지켜보면서도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착해서가 아니라 내 손을 더럽힐만큼 그나 그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역설적이지 않는가.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아서 살인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일 수도 있다는 것이 말이다. 어쩜 사랑하지 않기에 고통을 지켜보기만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하긴 내가 아픈게 아닌데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리곤 신은 없다고 결론 내리게 된다. 죄라는 개념도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아무리 대단한 죄를 지었다고 해도 저 고통에 비하면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인간의 존엄을 생각한다면, 이런 고통을 두고볼 신도 없을 것이고, 이런 것이 가능하지도 않았어야 했다. 하지만 이유없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들은 묻는다. 내 인생이 이렇게 무가치해도 되는가 하고. 하지만 비참하고 비루한 삶을 부여잡고 흐느껴 우는 병자들에게 사람들은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것이니 살아있으라고 말이다. 어떻게 있건 간에 중요한 것은 그것이라고. 거기에 맞서 병자들은 말하고 싶어한다. 죽음의 매력이 살아있음보다 더 커진다면 때론 죽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는게 아니냐고? 어쩜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 아니냐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이 감독이 우리에게 들려 주고 싶어했던 골자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이 영화에서, 아내를 죽인 조르쥬에게 그나마 면죄부(일말의 동정)가 주어지는 것은 두가지 때문이다. 안느가 그런 삶을 원하지 않는다는걸 분명히 했다는 점과 부부 사이가 정말로 좋았다는 점 말이다. 둘 사이엔 그간 쌓아온 진정한 사랑이 많았다. 둘은 젊은 시절부터 서로를 진정 사랑하고 아끼면서 부지런히 사랑의 저축을 해온 커플이었다. 아이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았다는 사람들이 아니라...둘이 늘 서로에게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장면들을 주목해 보시라. 그렇게 늙어간다는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쌓은 정이 많다보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그저 지켜만 볼 것인가? 이 이상의 수모와 추한 꼴을 당하는걸 보면서 그게 그녀의 운명이니 알아서 하라고, 나완 상관없는 일이라고 나는 두 손 놓고 말 것인가 라고 말이다. 만약 나와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 일이라면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어떤 말년을 보내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가 평생을 함께 살아온 사랑하는 아내였다면, 진심으로 그녀의 고통에 공명하게 되지 않을까. 그녀의 비참한 감옥 생활을 그만 끝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어떤 영화보다 이 영화의 제목이 적절하게 생각되었다. 사랑이 아니라면, 정말로 사랑이 아니라면 조르쥬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살인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을 그가 아내를 살해하게 된 이유이다. 바로 사랑 때문에...젊은 이들은 사랑이라는 것이 로맨스로만 생각하지 이렇게 비루한 일에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이 무한대로 열려 있다고 생각하는 나이엔 언젠가는 인생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테니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생을 마감해야만 하는 시간이 찾아옸을때 우리는 바라지 않겠는가. 최소한 인간적이길, 최소한 고통이 덜하긴, 최소한 존엄을 지킬 수 있기를 말이다. 그러니 그들이 그걸 바랬다고 해서 우리는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삶의 어떤 지점에 이르면, 그것이 정당한 요구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상당히 무겁게 전개되지 않을까 했었는데, 생각보단 흔연스러웠다. 실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면 ,보는 것마저 힘들었을텐데 그 정도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어쩜 그건 의도적이지 않았을까 했다. 주르쥬가 간병에 힘겨워하는 현실에 압도당하기 보단, 조르쥬가 안느의 고통에 공명하는 사랑에 촛점을 맞추기 위해서 말이다. 하긴 이 정도만으로도 다들 숨막혀 하면서 지켜볼텐데, 그 이상의 충격을 줄 필요는 없었겠다 싶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건 나와 상관없는 간병의 어려움이 아닐테니 말이다. 영화는 수작이라고 칭찬을 받고, 여러가지 상도 받았지만서도, 과연 이런 영화들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는 의문이다. 이런 영화를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면서 훌쩍이는 사람들도, 내일 신문 조그만 귀퉁이에 치매에 걸린 아내를 죽인 남편을 비난하는 기사가 실린 것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찰테니 말이다. 간병이란, 내가 하지 않는다면 전혀 힘들지도 상관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고민할 거리가 못 되는 것을 두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현실이 그렇다는걸 잘 아는 나이다 보니, 내가 바라는 것은 감독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주십사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들이 굉장히 고통을 당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 정도만이라도 이해해 주셨음 한다. 이해하는데 별로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거기에 이해란 때론 당신의 인품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겨우 남의 사정 하나 봐주는데 인품까지 높아진다면, 그까짓거 하면서 이해하고 넘어가도 되는 것이 아닐런지, 같은 인간으로써 한번 생각해 보심이 어떨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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