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 좋은 방 열린책들 세계문학 28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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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하여 읽은 모든 책이 독자와 궁합이 잘 맞는다면 환상이겠으나 사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기대했던 내용과 달리 수준이 낮거나 엉뚱한 경우도 있고 저자의 글쓰기에 심히 낙망할 때도 있다. 나의 경우에는 고전문학이 특히 그랬다. 오늘 독후감을 쓸 전망 좋은 방이 내게 특히 그랬다. 장편소설이라고는 하나 읽기 버거울 만큼의 두께도 아니고 내용도 아닌 것을 나는 왜 그리도 힘들게 읽었단 말인가!

 

주인공인 루시와 조지의 사랑에는 강렬함이 없다. 그들이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이 부족하다. 급작스런 첫키스와 영국에서의 재회는 너무나 어색하다. 루시와 결혼할 뻔했던 이탈리아 신사 세실은 너무 외떨어진 존재다. 남들은 테니스 치는 데 혼자 소설을 읽어주고 있다. 대체 왜? 물론 이것들이 20세기 초반의 영국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이해한다. 그래서인지 책표지에 이런 소개가 있다. ‘영국 사회의 계층 갈등과 가치관의 충돌을 날카롭게 지적해 낸책이라고. 세실이 그 대표 인물이기는 하지만 나는 답답함만 느꼈지 작가의 그런 의도를 눈치 채지 못했다. 내가 너무 무딘 걸까?

한편 이 책에 대한 역자의 평에는 아이러니가 넘치풍부한 유머를 담고 있다고 하지만 아둔한 나는 전혀 그런 점을 느끼지 못했다. 대체 나는 무엇을 읽었을까? 고전을 제대로 읽으려면 당시 사회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텐데 내가 그런 점에서 무지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본다. 20세기의 영국 사회를 너무 몰랐기에 소설의 맥락을 제대로 잡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루시의 자유의지도, 청춘의 사랑 이야기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쁜 일상에서도 짬짬이 읽은 소설의 뒤끝이 너무도 허무하다. 사두고 한참을 묵힌 뒤 읽은 책이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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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권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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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선호하는 작가가 있듯, 비선호하는 작가도 있기 마련이다. 내게 코엘료도 그렇다. 뭔가 나의 경험이나 가치관과는 조금 다른 듯하여 그의 글들이 어색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글을 꾸준히 읽고 있다. 나란 사람 참...

이번에 읽은 <브리다> 역시 나에게 울림을 주지 못했다. 호기심 있는 국가인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을 빼면 마녀 전승이나 그와 관계된 서술들이 전혀 공감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책의 말미로 갈수록 조금 집중도가 높아졌다. 그건 주인공 브리다가 자신이 처한 환경을 극복해 나가려는 자세, 두 남자를 사랑해야 하는 운명, 마녀 집단에 대한 호기심 등이 특히 그랬다. 그 중에서도 브리다 엄마가 들려주는 사랑이야기는 인상적이었다. 꾸준히 사랑하고 존경하는 남편이 있지만, 우연과 기회가 닿아 잠시 만나 운명적 사랑을 나눈 남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복선이라도 되는냥 브리다의 상황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브리다는 현실의 남자와 스치는 운명의 남자(소설에서는 `소울메이트`라고 부른다) 사이에서 잠시 갈등을 하지만 결국 현실을 선택하는 쪽으로 마감된다. 나라면? ㅎㅎㅎ

소설을 읽는 것은 삶과 인생에 대한 고민을 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브리다>역시도 그렇다.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 자신이 가야할 길을 찾아 나서며 각종 역경과 어려움을 헤쳐나간다. 비록 내게는 다소간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나라면 어떻게 살아갈 건지 하는 고민을 던져준다. 또한 현실의 사랑과 운명적 사랑 중 어떠한 것을 선택할 것인지 하는 것도 잠시 상상해 본다. 그래서 소설은 눈은 아닌 가슴으로 읽는가보다.

가을인가보다. 이렇게 소설이 땡기는 것을 보면. 가볍게 읽히는 책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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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6-09-20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연금술사와 브리다 사 놓고 읽지 않고있습니다. 불행하게 <불행>까지 샀습니다. 읽지 않으면서도 왜 사 모으는지 저도 알길이 없습니다. 평이 좋습니다. ˝결국 현실을 선택하는 쪽으로 마감된다. ˝에선 그럴 수 밖에 없는 주인공의 마음이 어떨지 찹찹합니다. 현실에 안주해야 하는...

knulp 2016-09-20 11:41   좋아요 0 | URL
방문 감사합니다. 저 역시도 읽지 않고 잔뜩 쌓아두고만 있네요. ㅎㅎ 자꾸만 사들이고 있고... 오늘 또 지르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
정영환 지음, 임경화 옮김, 박노자 해제 / 푸른역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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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상당히 도발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 정영환은 박유하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나아가 일반 국민들에게 화해를 강요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본은 아직 명확히 그것도 공식적으로 식민지배나 전쟁 범죄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한일간의 식민지배 처리 문제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해결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본 정부나 사법부의 공식 입장인 듯하다. 하지만 한국의 헌법재판소나 일반국민들은 이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당시 위안부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으며 불합리한 점이 많은 조약이었기에 개인 청구권은 남아 있다고 보는 편이다. 여기에 박유하는 강하게 반발하며 전후 일본은 꾸준히 사죄하며 세계적으로 우수한 사례를 남겼다고 평한다. 서로 만나기 쉽지 않은 평행선을 달리는 듯한 역사관을 가진 것이다.

그렇다면 박유하는 왜 그리고 많은 비난을 받는 것일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개개인의 이름을 들고 구체적인 사례를 지적하며 이러한 `목소리`도 있었다고 소개하는 데 그쳤다면, <제국의 위안부>가 이렇게까지 피해자들의 격분을 샀을까. `위안부`의 `본질`에 대해 일반화해서 말했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스스로의 명예와 존엄이 침해당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 결국 박유하가 몇몇 사례를 통해 조선인 위안부는 위안을 통해 애국하고 사랑을 나누었으며, 일본군과는 동지적 관계였다고 선언함으로써 생존자들의 존엄을 깨뜨린 것이다. 여기에 나눔의 집 할머니들은 적법한 절자를 거쳐 고소했음에도 논점을 오도하는 일본의 미디어나 지식인들이 `언론탄압`의 가담자라는 오명까지 쓰게 되었다. 이런 점들이 쌓여 박유하는 보호받을 가치조차 없는 부도덕한 지식인으로 내몰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 책에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소개한 사료들을 박유하가 어떻게 곡해했는지 잘 보여준다. 가령 그녀가 ˝위안소는 병사와 위안부가 함께 울 수 있는 `눈물의 공간`˝이었다고 하지만, (박유하가) 그토록 찬양한 센다 가코의 책에는 이런 부분도 나온다. ˝후방에 오니 정말로 `공동변소` 취급인 거야. 장교나 하사관들 중에는 대놓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어.˝ 하지만 그녀는 이같은 대목을 빼버린다. 분명 그녀가 읽었을 부분인데도 자신의 주장에 맞지 않는 것은 지나가버리는 것이다. 연구자의 윤리에 맞지 않는 대목이다. 이런 부분이 수없이 나온다는 것이 정영환의 주장이며 따라서 이렇게 문제 많은 책을 높이 사는 일본 사회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이어 저자는 작년 12월의 한일 양국 간 위안부 합의는 이런 문제점을 안고 있는 박유하 식의 주장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비판한다. 반면 일본 사회와 지식인들은 이 합의를 열렬히 환영한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저자는 서승 교수의 글을 인용하며 면을 이를 일본 지식인과 언론계의 퇴락이라고 강한 어조로 말한다. 솔직히 저자의 이 주장에 억지로라도 절반만 동의하고 싶다. 일본에도 제대로 된 지식인들이 상당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험을 통해 안다.

후련한 듯하면도 답답한 심정이다. 한국과 일본은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지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십 수년 간 교류해온 한 일본 지인과도 이런 차이에 직면해야 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오던 지식인인데 말이다.

나의 말과 글이 무조건 옳다고 치부하지는 않는다. 논리적 결함이 있을 것도 안다. 다만 피해자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외면하고 `반일 민족주의` 운운하며 비판하는 것은 옳지 못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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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13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

knulp 2016-09-13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cyrus님도 즐건 시간 보내세요.
 
제국의 위안부 -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박유하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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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어렵게 초판본을 구하여 읽었다. 법원에 의해 강제로 절판된 책이라 공식적으로는 판매되지 않아서 중고서점을 열심히 뒤져야만 했다. 어느 순간에는 2013년에 왜 이 책을 안 사뒀던가 자책하기도 했다. 논란이 되었을 때도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고 이후에도 무관심한 채로 있었다. 그러다 정영환의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가 푸른역사 출판사에서 출간되며 대립되는 두 의견이 내 눈을 확 끌어, 이참에 나도 위안부 공부를 해야겠다는 욕심마저 들었다. 그리하여 손에 쥔 이 책.

 

대학원 졸업한 이래로 제국의 위안부만큼 꼼꼼히 읽고 밑줄 긋고 필기한 책이 또 있을까 싶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왜 이 책이 논란의 중심일 수밖에 없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으니까. 전문가들이 놓친 부분은 없는지 내가 하나라도 더 찾아야겠다는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우선 서문에 내 눈을 끈 대목이 나온다. 우리 안의 위안부는 그저 가녀린 소녀가 아니면 노구를 이끌고 투쟁하는 투사일 뿐이다. 그러나 그건 실은 그녀들 자신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원한 위안부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이 부분을 읽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언제부터 투사였던가? 그런데 그게 우리가 원하는 모습이었다? 순간 이건 아닌데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과연 한국인들은 위안부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을까? 이게 맞다면 한국인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책에는 정대협이나 일부 정치인들이 그들이라고 하지만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한국인들 모두가 이런 혐의를 받을 것이다.

 

이런 의구심은 첫 장에도 이어진다. 저자는 위안부를 끌고 간 것은 일본군이 아니라 (조선인)업자들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구조적인 강제성(일본군)과 현실적인 강제성(업자)의 주체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연 일본군이 구조적 강제성만 띄었을까? 오히려 이들이 현실적 강제성의 주도자들 아닐까? 즉 군부가 악의 몸통이고 업자는 기생충들인 것이다. 악의 몸통이 움직임으로 기생충들이 날뛴 것이다. 기생충이 아니라 몸통을 잡아야 문제는 해결된다. 아니 결국 이 둘은 공범인 셈이다.

 

위안부들은 창녀였다고 박유하는 말한다. 그래서 일본인 위안부와 비교한다. 그렇다면 조선인 위안부들은 창녀가 되어 돈을 벌기 위해 그 위험한 전쟁터로 갔을까? 이때 박유하는 또 말한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업자들에게 속아서 온 것이며, 일부 일본군의 경우 이런 위안부를 집으로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예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전부일까? 대부분의 일본군들은 이런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업자들에게 귀국을 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병을 우려하고 소독하고 관리한다. 이렇게 되면 슬슬 일본군의 책임이 드러나지 않나?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으니 안가도 된다고 반문할 것인가?

창녀가 된 위안부들은 애국하고 간호도 하고 일본군과 사랑하며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전쟁터라고 하는 극단의 상황에서 함께 어깨를 기댈 수 있는 그런 관계를 가지며 어려움을 나누는 좋은 사이였단다. 그래서일까? 전쟁 후에는 귀국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고. 나는 이 글을 읽으며 왜 그렇게 와 닿지 않았을까? 내가 여전히 기존의 위안부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까 의구심마저 들었다. 위안부들은 정말 자신의 의지대로 애국, 간호, 사랑했을까? 하물며 저자 자신이 강조하듯이 기지촌에서 미군에게 매춘한 행위를 우리 정부도 애국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사실 정부에 의한 폭압 아닌가. 기지촌 여성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폭력. 이 둘만 비교해서 군과 정부의 불법적 비호 아래 일상적 강간이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부인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위안은 가혹한 먹이사슬 구조 속에서 실제로 돈을 버는 이들은 적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수입이 예상되는 노도이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강간적 매춘이었다. 혹은 매춘적 강간이었다.” 이건 학자의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강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되지 않는다. 어떠한 수식어가 붙더라고 강간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루에 수 십 명의 남자를 받아야만 하는 현실을 어찌 업자들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는가. 그건 명백히 관리자인 일본군의 문제이다. 저자는 베트남 전쟁 때 한국군의 행태를 비교한다. 그건 맞는 말이다. 한국군이 만약 일본군처럼 강간적 매춘을 했다면 당연히 역사적 법적으로 처벌 받아야 할 것이다.

 

이어 박유하는 왜 그 많은 위안부들이 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을까 의심한다. 그러면서 그 대부분이 우리가 생각하는 비참함과는 조금 다른 상황에 있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즉 위험하거나 강압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건 정말 대단한 아전인수 아닌가? 그렇다면 위안부의 증거들은 어디에 쓸 것인가? 일본에서 보상금을 받은 위안부들이 아직껏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란다. 그래서 나눔의 집이 불편한 공간이며 사랑의 기억(?)을 품어주는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놀라운 해석이다. 저자는 나눔의 집의 역할에 대해 착각 내지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 그곳은 위안부의 경험으로 인해 고통 받고 힘들어 했던 분들을 돕고 위로하는 쉼의 공간 아닌가. 그러니 당연히 피해의 기억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 곳에 사랑과 같은 개인적, 예외적 경험들은 섞이거나 제거되지 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힘의 논리라 강제하는 것이 아니다. 순전히 개인의 자유의지다. 일본 정부가 제공하는 위로금을 수령할지 말지 판단하는 것처럼. 위안부를 사랑하고 돌봐준 착한 일본군의 미담은 개인의 역할이지 일본군의 공식적 역할이 아니다. 지금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일본군의 공식적 역할이다. 강제성이 없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보상금을 받은 위안부도 그것으로 개인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녀들은 일본 정부의 사과(정확히는 수상 개인의 사과)와 위로금을 수용함으로써 과거의 일을 용서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녀들을 비난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과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남겨진 자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한편 박유하는 위안소가 일본 전통의 유곽, 공창 제도에서 유래되었으며, 이 때문에 일본이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위안소를 고안해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런데 이는 너무나 지극히 일본적인 생각이다. 그렇다고 위안소로 인한 강제성, 폭력성, 반인권성도 이해해야 하나? 특히 이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산실인 야스쿠니 신사도 이해해야 한다. 일본의 우익과 정치인들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추도하는 것은 일본 고유의 전통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가해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수용해야 하나? 그래야 그들과 손잡고 그들의 진정한 사과를 받아 미래지향적 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가?

 

최근 위안부를 지칭하는 용어로 국내외에서는 성노예를 주로 사용하는 듯하다. 이에 박유하는 “‘성노예라는 측면만 집착하는 것은 가까스로 자신의 몸과 마음의 주인이고자 했던 위안부의 노력을 짓밟는 일이 된다.”고 했다. 진짜 그럴까? 내가 보기에 이것은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성노예였기에, 소비되는 물건으로 취급되었으며, 자신들 일본군에게 피해가 되지 않도록 관리하지 않았는가. 아마도 일본 측의 입장에서는 이 성노예라는 표현이 마뜩치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위안부의 역할만 보면 이보다 더 정확한 용어가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오로지 이 책만 읽고 독후감을 쓴다. 관련 신문기사와 책을 읽으며 선입견 가득한 채로 논란의 중심에 선 제국의 위안부를 읽을 게 뻔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완벽히 객관적이지도 않다. 나 역시 이미 기존의 위안부상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도중에 나는 내내 중심을 잡지 못했다. 박유하의 논리를 수용하지 못하니 오히려 거부감이 강해졌고 책의 구석에다가 나름의 반론을 적어둬야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강요받은 숙제도 아닌데 나는 왜 이렇게 어렵게 책을 읽어야만 했을까?

 

사람이기에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이 다른 생각을 법의 잣대에 의해 처벌하는 것도 반대 입장이다. 다만 생존해 있고 직접 피해를 입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이 책은 분명 가혹한 것이다. 이를 학문의 영역에서 풀자고 외치지만 아직 사회적으로 용납이 안 되는 모양이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는 아직 적어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일본의 공식적 사과와 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65년의 한일협상과 같은 졸속, 밀실 협상은 없어야 한다는 데 국민적 공감대가 있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20151228일 또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2차 한일협상을 타결했다. 당사자이 동의하지 않는데 왜 3자가 나서서? 이게 진짜 외부인 아닌가? 정부가 하고 있는 짓거리가.

책이 나온 지 3년이 넘어서야 이런 잡소리를 늘어놓는다. 이제 정영환의 책,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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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나도 알라딘 서점을 그냥 지나칠 수 없구나.
더위를 피해 그곳에서 책을 또 몇 권 샀다.
지난 시엠립 여행의 잔상이 남아 있어 결국 앙코르와트에 관한 것 책으로 구매했다.
아직 국내에 캄보디아나 앙코르와를를 정확하고 다양하게 소개하는 책들이 부족한 것 같아 이제서야 아쉬움을 느낀다.
가기 전에 공부했어야 하는 데, 갔다온 지금에서야 이렇게 난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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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11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부하고 싶은 것이나 제대로 알고 싶은 주제는 어느 순간에 갑자기 나타나는 것 같아요.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거들떠보지 않은 책이 어느 순간에 읽고 싶어져요. 운이 없으면 그 책을 구하기 힘들어요. 참으로 그지같은 타이밍입니다. ㅎㅎㅎ

knulp 2016-08-11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절대공감입니다. 읽고픈 책은 절판인 경우가 참 않았습니다. 지금도 절판된 헌책을 웃돈 주고 사서 읽고 있거든요. 그래서 읽고픈 책이 생기면 온오프라인 서점을 찾을 때까지 집착하게 되네요. 바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