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양사 편력 1 - 고대에서 근대까지
박상익 지음 / 푸른역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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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역사를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옛 것을 주로 다루기 때문이다.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나의 성향과 잘 맞다. 새 것보다 손때 묻은 물건에 애정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것들이 현실의 나를 움직이는 중요한 동력원이 된다. 옛것을 통해 현실을 보는 즐거움은 이루다 말하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박상익 교수의 위 책은 의미가 깊다. 많은 일반인들이 역사는 옛날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역사가 비록 옛것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기는 하지만 현실이라는 기반이 없으면 존재의 의미가 없다. 위 책은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쉬운 문체와 내용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우리는 흔히 문화재 파괴와 관련된 용어로 ‘반달리즘‘이라는 표현을 쓴다. 무지에 의해서든 의도적이든 인류의 유산을 해할 경우 로마를 파괴한 반달족을 예로 그런 표현을 쓴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은 오해이며 그보다 후대 로마인들에 의한 파괴가 더 크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로마를 건설하기 위해 옛 로마를 무너뜨린 것이다. 이는 한국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 90년대까지 서울 서민들의 사랑을 받던 음식골목 ‘피맛골‘은 조선시대부터 형성된 대표적 문화유산이다. 근대화의 바람을 타고 이곳에 수차례의 개발 시도가 있었지만 뜻있는 사람들의 저지로 번번히 무산되었다. 하지만 저 유명한 쥐박이 서울 시장이 2003년에 밀어버리고 현대식으로 탈바꿈 시켜버렸다. 결국 겉모습도 사라지도 음식맛도 퇴락해버렸다. 사람들의 발길과 오래된 가게들도 하나둘 떠나버렸다. 저자는 이 역시도 반달리즘의 한 형태라고 본다.

여기에 영화, 음악, 인접 학문까지 저자는 다양한 분야와 역사를 접목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설득력이 있고 무언가 내면의 변화를 추구하게 만든다. 역사를 지적 즐거움이 아니 실천의 학문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의 글이 참 좋다. 저자의 2006년 작인 <번역은 반역인가> 역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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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2-11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덕분에 밀턴이 위대한 지성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knulp 2016-12-11 13:01   좋아요 1 | URL
그러셨군요. 저 역시도 이 책 덕분에 서양사의 이면을 경험하게 되어 참 좋았습니다. 독서의 즐거움을 안겨준 책^^

서니데이 2016-12-23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nulp님, 2016 서재의달인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세요.^^

knulp 2016-12-23 22:24   좋아요 1 | URL
감하합니다만, 서재의 달인이 뭔가요? 저는 잘 몰랐네요. ㅎㅎ

서니데이 2016-12-23 22:26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서 매년 연말에 서재의 달인을 선정해요. knulp님의 서재 오른쪽 메뉴가 있는 하단에 앰블럼이 있어요. 자세한 내용은 알라딘 서재지기님 블로그에서 보실 수 있을 거예요.^^

knulp 2016-12-23 22:51   좋아요 1 | URL
그런가요. 정보 감사합니다. 함 구경 가볼게요.
 
조선의 아버지들 -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진정한 아버지다움
백승종 지음 / 사우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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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를 해결하겠다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개인적 욕심만 넘치는 나에게 당연한 의무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조선의 아버지들은 좀 다를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지만 그들은 어떻게 자녀들을 양육했을지 궁금증이 컸다.

이 책에는 12명의 아버지가 나온다. 거칠게 말해 11명은 나름 자녀 교육에 성공적(?)이었고 단 한 명만 실패한 사람으로 나온다. 성공적이라는 말은 상대적일 수 있겠으나 대체로 자녀들과 교감하고 그들에게 정상적인 애정을 쏟은 아버지들이다. 그리하여 자녀들이 시대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찾아가도록 이끈 모델들이다(정약용, 이황, 박세당, 김숙자, 이익, 유계린, 김장생, 김정희, 이순신, 김인후, 이항복). 나머지 한 명은 그 유명한 영조다. 자신의 의지로 자식을 뒤주에 넣어 죽인 인물.

그런데 재밌는 것은 앞의 11명은 대체로 자녀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지 않고 살갑기까지 하다. 하지만 영조는 그 관심이 지나치다 못해 병적이다. 이러한 영조의 불안한 심리가 사도세자에게 이어져 그는 정신병적인 행동까지 한다. 좋은 아빠의 모범들을 읽은 뒤라 영조의 행동은 공감은 커녕 비난받기 쉬워 보였다. 그렇기에 더욱 좋은 아버지에 대한 집착이 강해졌다. 그러면 좋은 아버지란 무얼까? 책을 읽으며 혼자 한 생각들을 정리해 본다.

첫째, 자녀에게 공감을 해줄 수 있는 아버지다. 억지로 시키거나 채근되지 않는다.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최대한 부드럽게 하되 기다리는 미덕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이미 자신이 인격적으로 갖추어진 인물이기에 가능했으리라.

둘째, 우습게 보일지 몰라도 좋은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편지를 자주 보냈다. 말로는 힘든 내용을 그 속에 담아 전했다. 물론 전통시대의 성격상 원격지의 자녀와 교류가 원활치 않아서 편지를 자주 했겠으나 아버지의 마음을 담은 편지는 자녀를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다산 정약용의 경우 그 편지를 엮어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셋째, 좋은 아버지는 자녀의 모범이었다. 위에 밝힌대로 11명의 아버지들은 인격적, 학문적으로 인정받는 실천적 지식인들이었다. 결코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이 아니었다. 오늘날의 아버지들이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도 자녀들에게 말은 하지만 자신이 모델이 되지 못하고 강요자만 되고 있기 때문 아닌가. 혹은 자녀들과의 교류의 끈이 끊어졌거나.

마지막으로 좋은 아버지들은 시대와 타협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엄격하지만 남에게는 너그러웠던 사람들이다. 그래서일까. 이 책에 소개된 인물들 중에는 비주류의 남인들과 초기 사림들이 대부분이다. 타협하면 좋은 위치에까지 올라갈 수 있었지만 그들은 지조를 지키고 불의를 멀리했다. 이러한 행동을 자녀들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좋은 책은 읽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이 없이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 책 역시도 그렇다. 전형적이고 틀에 박힌 아버지상이 아니라 11명의 따르면 좋은 아버지 모델과 1명의 따르면 나쁠 아버지 모델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어떤 아버지일지.

오늘도 나는 딸을 눈물 흘리게 했다. 좋은 책을 읽은만큼 최대한 목소릴 낮추고 자기 스스로 잘못을 알고 뉘우치도록 다독였다. 엄마에게 큰 잘못을 한 딸은 야단치는 아빠를 멀리하고 다시 엄마와 손 잡았다. 나는 바로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좋은 아빠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인격수양부터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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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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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민음사, 2002.

예전에 푸른역사 출판사에서 <속물교양의 탄생>이란 책이 출간되었었다. 교양서적이란 누구의 기준에 의해 선정되고 출간되는가라는 의문을 던져준 책이다. 결국 교양서적은 출판사에의해 임의적으로 선정되어 독서계에 던져져지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양서적은 하나의 지식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책을 집에 구비해두어야 지식인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속물교양은 탄생되었다.

그런데 슬프게도 나 역시 그런 속물교양의 자발적 수요자이다. 그런 정도는 읽어야 중간은 할 것 같은 알 수 없는 내적 강요에 의해 무작정 읽어댔다. 수준 높은 교양을 가진 지식인이 되고픈 게 나의 꿈이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허위 의식인지 한참 뒤에서나 깨닳았다. 부끄럽지만.

<설국>을 안 지는 30년도 넘었을 것이다. 제목도 대략적 줄거리도 도저히 내게 와닿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제서야 책을 읽게 되었다. 마치 묵은 숙제를 해치운 느낌으로.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이 책을 소개하는 글이라면 어디에서나 나오는 대목이다. 책의 첫구절이기도 하다. 특히 일본근대문학 전 작품을 통틀어 보기 드문 명문장으로 손꼽힌다는 찬사가 이어진다. 또한 일본 최고의 서정소설이라는 안내도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소개는 책읽기를 무척이나 방해한다. 개별적 경험을 가진 나의 독서이력은 무시되고 타인의 주장만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양서적 읽기는 자주 실패하게 된다. 너무 뜸을 많이 들여 물러터진 밥이 되버리 것이다.

<설국>에는 뚜렷한 줄거리가 없다. 일본식 여관 주위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에 대한 주인공 내면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부모의 유산으로 무위도식하는 시마무라와 그를 사랑하는 게이샤 고마코, 그리고 시마무라가 잠시 눈길을 준 요코가 주된 등장인물이다. 시마무라는 나쁘게 말해 정말 할 일 없는 그리하여 인생의 허무에 빠진 듯한 인물이다. 그런 그의 주위를 맴도는 고마코는 불행한 듯하지만 씩씩한 여인이기도 하다. 나는 이 둘을 통해 무엇을 배웠을까? 아니 배웠다기보다 무엇을 느꼈을까?

사실 이 소설은 내게 그다지 큰 감흥이나 독서의 즐거움을 주지 못했다. 그보다 일본, 그것도 소설의 주된 무대인 니가타에 대한 커다란 환상을 심어주었다. 소설에 묘사되는 설국의 정경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눈이 지붕까지 쌓이거나 오로라가 나타나는 풍경은 날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기차가 터널을 지나 눈의 고장에 들어섰고 밤의 밑이 하얘졌다는 저자의 묘사가 와닿았다. 갑자기 일본 니가타현에 가고픈 심정이 되었다. 이 소설은 내게 소설 자체가 주는 즐거움보다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새로운 길라잡이가 되었다. 그 주제는 ‘눈‘이었다. 나는 추위를 그토록 싫어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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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116호 - 2016.가을
역사문제연구소 엮음 / 역사비평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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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여름과 가을호에서 `새롭게 보는 정조와 19세기`라는 주제로 기획 특집을 다루었다. `정조`라는 주제는 예나 지금이나 핫이슈임에 틀림없다. 세월이 흘러도 그에 대한 평가만 달라질뿐 그는 여전한 역사 연구의 중요 주제다. 그런 면에서 조선사에 큰 자국을 남긴 그의 역사성을 의미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근래 들어 정조에 대한 찬양일변도 주장들이 줄어들고 그 시대를 냉철하게 다시 보려는 시각들이 증가하고 있는 듯하다(백승종,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푸른역사, 2011이 대표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재밌는 현상으로 본다. 역사를 다양한 시각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흠없는 인간이 어디 있으리!

오늘 읽은 대목 중 다음 부분이 눈에 깊이 들어왔다.
˝정조가 일관되게 추진한 재상권의 강화는 그 시기에 정부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공헌하였겠지만, 높고 낮은 관인들이 서로 견제한다는 조선 정치체제의 전통을 변화시켜 고위 관원들에게 권한을 집중시킨 것이었다. 19세기 권세가들이 측근인 고위 관원들과 함께 권력을 독점하던 구조는 정조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의 재상권 강화정책에 연결된다. 그러한 정조의 정책 속에서 당하관이 공론을 조정에 반영하던 구조와 삼사의 언론 활동은 매우 침체되었다. 19세기에도 외척 가문들이 권력을 집중시킨 배경에는 공론과 언론의 현저한 퇴조가 자리잡고 있다. 19세기 세도정치를 가능하게 한 언론의 퇴조 역시 정조의 본래 의도에 관계없이 그의 정책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오수창, <오늘날의 역사학, 정조 연간 탕평정치 및 19세기 세도정치의 삼각대화>, <<역사비평>>116, 224~225쪽에서 인용)

결국 정조의 죽음과 연이은 세도정치의 출현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즉 정조가 추진한 정책의 결과라는 점이다. 바로 여기서 정조 정치의 한계를 찾을 수 있겠다. 비록 정조의 위대함이 깍일 수 있겠으나 한 개인의 치열한 노력만으로 역사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음도 깨닫게 된다. 나는 이런 점에서 역사가 재밌다.

글을 읽으며 다시 이런 생각도 든다. 언젠가 이 주장들도 다시 재해석되고 뒤집힐 날이 올 것이라는 점 말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글은 다시 쓰여지고 역사의 논쟁은 심해지리라. 답이 정해진 역사만큼이나 재미 없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나의 노년에 다시 정조 부활의 역사를 읽을지도.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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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
심재훈 지음 / 푸른역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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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엄밀히 말해 전문 연구서라기보다 역사학자의 (역사)수필에 가까워 보인다. 자신이 전문 연구자가 되기까지의 내력과 경험담을 재밌고 서술하고 있다. 인연일지, 운명일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이들과의 만남 그리고 성장에 대한 이야기글. 수필이 반드시 전문 글쟁이들의 소유물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신의 소중한 인생담과 진솔한 감정이 수필의 중요한 덕목일테니.

대체로 책의 전반부는 위와 같은 내용들이지만 후반부는 내용을 달리해 저자의 연구 영역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류를 이룬다. 중국 선진(先秦)시대나 청동기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고대 중국사를 연구하며 알게 된 고대 한국사와 일본사들을 쉬운 글로 풀어내고 있다. 사실 저자는 이 글로 인해 적잖은 심리적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의 글은 학부 시절 스승이었던 윤내현 교수의 주장을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인터넷으로 검색해 봐도 밑도 끝도 없이 그를 배신자라고 주장하는 경우들이 많다. 소위 말하는 유사역사가들이나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저자의 심재훈 교수의 주장에 동의할까? 이유는 하나다. 즉 역사는 문헌과 유물이 일치할 때 믿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백제가 중국 요서 지방을 공격해 점령했다고 중국 문헌에 남아 있으나 그와 관련된 유물이 없다. 그것은 다시 말해 중국 북조에 반대한 남조의 세력이 역사를 위조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진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글쓴이의 의지가 들어간 이야기(담론)이기 때문이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유물만으로는 정확한 역사를 쓰기 힘들다. 언제든 조작이 가능하다. 작금의 고조선 연구가 바로 그 상황이다. 그럼에도 유사 역사가들은 고조선의 영역을 자꾸만 넓히더니 급기야는 중앙아시아까지 진출했다고 하는 허무맹랑한 주장들을 늘어놓고 있다.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다.

특히 저자의 주장 중 나의 머리를 때린 것은 중국 문명에 대한 것이다. 유럽 각중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공유하며 자신들의 문화를 발전시켜 나간 것처럼 우리 역시도 고대 동북아 문화의 요람이었던 중국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이것은 민족적 우열도 아니고 문화의 주도권 전쟁도 아니다. 그저 고대 문화의 흐름을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나는 이에 긍정한다. 한반도 문화의 대부분이 중국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우리식대로 소화하기는 했지만.

마지막으로 그에게 공감을 한 것은 비주류 역사학자라는 그의 넋두리다. 나의 개인적 성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늘 비주류를 자처해왔다. 그가 느낀 학계와 사회의 모순들을 나는 심정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 동종교배만이 살 길 인양 자기 끼리 어울리는 그들의 모습에 비웃음만 날리던 나. 이런 사회와 학계에 맨 몸으로 부딪히는 저자의 도전 정신에 나는 감동한다. 그가 더욱 분발해 좋은 글과 활동을 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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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1-05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독자평점이 낮은 이유가 그거였군요. 안 그래도 많이 궁금했었어요. 운 좋게 크눌프님의 리뷰 덕분에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knulp 2016-11-05 16:48   좋아요 0 | URL
책의 절반이 개인시여서 일반 독자들에겐 그다지 와닿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같은 역사전공자에게나 도움이 되었겠죠^^...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