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와 성녀 - 마성과 성성을 키워드로 한 중근세 유럽 여성사
아케가미 슈운이치 지음, 김성기 옮김 / 창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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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의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이 걷잡을 수 없는 화염처럼 지역 곳곳에서 일어났던 ‘마녀사냥’이었다. 악마의 기원자이자 추종자로 불린 ‘마녀’. 그런데 동시대에 한편에서는 뭇사람들의 성스러운 추앙을 받으며 여신처럼 떠받들어진 ‘성녀’가 등장하였다. 그녀들은 환시를 보고 예언을 하고 신체에 기적적인 이변을 일으켰다. 이런 마녀와 성녀는 언뜻 극단적인 관계로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 약간의 차이로 성녀가 마녀로 전락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런데 이처럼 마녀와 성녀가 동시에 그것도 한 시대에 극단적인 여성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일까. 성녀와 마녀는 어떻게 구분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들을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양극화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녀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이 책의 중심 테마인 마녀사냥은 중근세 유럽에서 가장 활성화되었는데 당시의 시대 배경은 십자군 전쟁 실패 후 사회불안과 종교적 위기로 인해 권력층과 교회가 주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죄 없는 사람을 마녀 혹은 악마의 사도로 몰아 대대적인 재판을 벌인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당시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닌 ‘마녀’와 ‘성녀’의 구분이 모호한 가운데 마녀사냥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렇다면 마녀와 성녀는 왜 탄생한 것일까. 여성을 향한 멸시와 숭배의 역사는 어떻게 비롯된 것일까.

여기에는 악마학의 탄생과 더불어 당시 농촌 사회의 변화에도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인구의 증가와 화폐 경제의 발전으로 농촌 내부의 계층이 분화되고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어 사람들은 위기의식에 사로잡혔다. 농민들이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마을의 아웃사이더인 여성들이었다. 그녀들은 신비한 직관력을 지니고 종종 의학적인 지식으로 병이 나거나 다친 사람들을 치료했다. 또한 여성의 다산을 돕거나 낙태를 돕는 이른바 ‘여성 주술사’였다. 그런데 그것을 사법기구와 교회가 이용함으로써 비로소 마녀가 탄생한 것이다. 더 나아가 그녀들은 엘리트가 지니고 있는 강박관념의 희생양이기도 했다. 도시의 엘리트인 사법관이나 교회 개혁자들의 눈에는 그녀들이 도덕의식도 정치적인 의지도 없는 성가신 존재로 비춰졌다. 그녀들이 주민을 이교의 그릇된 교리에 물들게 할 뿐 아니라 기본질서까지 위협한다고 여긴 까닭에서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놀라웠던 점은 마녀사냥이 활성화된 것이 16, 17세기라는 점이다. 어째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그리고 과학혁명이라는 근대의 여명을 고하는 대사건이 일어난 시기에 그런 믿기 어려운 흉악한 일들이 대규모로 일어났던 것일까. 교황과 탁발 수도사, 프로테스탄트의 개혁자, 종교개혁에 대항하는 가톨릭 성자, 법률가, 의사 등 그 시대를 대표하는 엘리트들이 합세하여 마녀를 만들어낸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유럽 최고의 지성이라는 사람들이 비과학적인 논리로 시대의 희생양을 만들어낸 것일까. 거기에는 분명 마녀에 대한 비밀을 풀 열쇠가 숨겨져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악마학자나 재판관들, 특히 더 진보적이어야 할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조차도 사로잡혀 있던 ‘여성에 대한 공포’를 지적할 수 있다. 다소 우스울지 몰라도 거기에는 서양 남성의 사탄에 유혹당한 하와(이브)에 대한 막연한 편견도 내재해 있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지금은 인류의 조상이라 불리는 그녀에게......

하지만 <마녀와 성녀>의 또 다른 재미는 마녀와 성녀에 대한 이야기뿐만이 아니다. 그간 우리는 일반적으로 민중 문화와 엘리트 문화의 충돌은 종종 입에 오르내리지만 남성 문화와 여성 문화의 대립은 그다지 문제 삼지 않았다. 이 책에는 중?근세시대의 남성과 여성의 문화적 차이에도 적지 않은 부분을 할애하였다. 지금까지 생각지 않았던 중?근세 유럽 여성들만의 문화와 생활에 대한 기술은 그간 우리가 얼마나 역사를 남성 중심적으로 배워왔으며, 또한 역사를 다르게 보면 새로운 눈이 트인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중세 시대 유럽의 여성 활동은 마녀와 성녀라는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끊임없이 억압받고, 길들여지고, 농락당했다. 이에 따른 증거로, 중세 말부터 근세에 걸쳐 여성의 지위는 부쩍 낮아지고 활동 범위는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남성의 가치관에 대한 수동적인 반응이나 평등에 대한 요구가 아닌, 여성들 자신이 적극적으로 창출한 새로운 가치관은 없었을까. 여성 멸시나 여성 숭배를 초래한 남성의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낼 장소나 기회는 그녀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것일까.

중세 시대 세속의 여성들은 그들만의 공간인 여성의 방(기나에케움)에 모여 일을 했다. 중세 말에서 근세까지 농촌이나 도시의 여성들은 함께 일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울 기회가 많았다. 그녀들은 겨울밤에 함께 일하면서 서로 지혜를 나눠주고 새로운 지혜를 생각해냈다. 여성에게는 타인과 대화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고,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것은 감정생활을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귀중한 정보를 교환하는 힘이 있었기에 남성들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다.

이처럼 고대 이래로 여성들은 남성의 침입을 거부하고 그녀들만의 작지만 확고부동한 세계를 지켜왔다. 그 속에서 그녀들은 생활에 꼭 필요한 지혜들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감정을 아름답게 표현해냈다. 주로 수다를 통해 연결된 여성들의 세계는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남성 문화와는 다른 새로운 문화를 꾸준히 형성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내내 한국사를 생각했다. 아직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여성사 관련 서적이 없다. 특히 하나의 키워드로 본 독특한 형식의 책은 더욱 그렇다. 전통시대 여성들이 남성에 종속되고 억압받는 상황에서, 그녀들에 대한 자료와 유물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도 않아 제대로 된 글을 쓴다는 게 힘들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사는 이 시대의 요구사항이기도 하다. 여성의 눈으로 본 역사. 그것은 아마도 기존의 남성의 역사에 대한 ‘대단한 도전’이 될 것이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체계가 완전히 뒤집히고 붕괴될 수도 있기에 말이다. 그렇기에 역사가 재미있지 않은가!

예전에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는 책이 있었다. 맞는 말이다. 이는 역사에도 적용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시선을 바꾸면 역사는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여자의 눈으로 본 역사, 노비의 눈으로 본 역사, 일반 병사의 입장에서 본 임진왜란, 기생의 입장에서 본 남성사 등. 이를 굳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혹은 민주화된 사회의 영향이라도도 말하지 않겠다. 역사는 다양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자신의 생각으로 쓰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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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와 정치 - 개신교 정교 분리 원칙의 변용 과정
김용민 지음 / 소명출판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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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 상호 침범하지 않는 관계가 되어야할까 아니면 서로에게 조언하며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좋을까? 개인적으로는 전자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정치와 종교는 서로 다른 영역이고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다 할 때 세상이 아름다워질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정치와 종교는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걸까?

이런 내 의문에 대답을 해주는 성경 구절이 있다. 로마서 3장의 내용이다.
˝훌륭한 시민이 되십시오 모든 정부는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평화와 질서가 있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중략) 정당하게 세워진 권력 기관이라면 여러분이 정당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지 않는 한, 무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중략) 시민으로서 여러분의 의무를 다하십시오. 세금을 내고, 청구서를 지불하고, 지도자들을 존중하십시오.˝(메시지 신약에서 옮김)

일제 시대 미국 선교사들도 그랬고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도 그랬다. 현재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저항하지 않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그 근거는 위의 로마서 13장이다. 모든 정부는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그리고 이것은 과거 유럽에서의 ‘왕선신수설‘의 모태가 되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읽다 슬몃 반발이 들었다. 그렇다면 불의한 권력에도 무릎을 꿇어야 하나?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며 죽은 것처럼? 그렇다면 프랑스혁명과 4.19의거는 무엇이 되는가? 그래서 나는 이 부분에 주목해 보았다. ‘정당하게 세워진 권력 기관이라면‘하는 부분. 혹은 ‘정당하게 세워졌지만 이후 불의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 정부‘라고 넓게 이해했다. 그들은 하늘이 준 권력을 오용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들이다. ‘하나님은 질서를 유지하는 일에 관심이 있으시고(로마서 13장)‘라고 하셨으니 그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행위의 조정을 받아 마땅하리라. 즉 현재의 정치에 문제가 생기고 지탄을 받고 있을 때, 기독교계는 어떻게든 하나님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그 불의함에 항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떨까?

이 책은 저자의 이런 현실적 고민에서 시작한다. 저자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이명박 정권 초에 사회에 깜작 등장하여 그 이름을 알렸다. 그 유명한 ‘나는 꼼수다‘에서. 그후 총선에 발을 들였으나 낙선한 경험도 가지고 있다. 그는 나름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 충실히 그 정신을 실천하고 살았으나, 이땅의 집권자들과 교회 권력은 한통속이 되서 사회 정의를 저버렸다. 이에 저자는 왜 한국에서 이런 문제가 생겼으며 그 역사적 연원은 어디에 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저자의 비판은 매섭다. 물론 무턱대고 모든 현상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 선교사들과 한국 목사들의 일제에 대한 부저항, 역대 정권과 그들에 협력한 소수 대형 교회의 부정의, 저항적 개신교계의 무기력까지. 조금은 당황스럽고 주관적인 해석이 나오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저자의 지적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이땅의 기독교가 현재 처해 있는 현실을 보면 알 수 있다. 떨어지는 사회적 신뢰도, 감소하는 신자수는 그 대표적 사례다. 사회적 영향력을 잃어가는 유럽의 기독교를 닮아가고 있다. 다른 세력의 탓이 아니라 기독교계 스스로가 자초한 면이 크다. 이를 타개 위해 기독교계는 공공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이러한 신학을 ‘공공신학‘이라 부른다.

정권과 교회는 이제 상호불가침의 영역이 아니다. 사회 모든 영역이 영향을 주고 받는 현실을 인정한다면 정권과 교회 역시도 상호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거처럼 반공을 위해 모순과 비리를 눈감고 권력자 개인을 위해 헌신하는 일은 없어져야 할 것이다. 이제는 공공을 위해 봉사하는 신학이 필요한 것이다. 스택하우스는 ˝루터와 칼뱅을 비롯한 개혁 교회의 전통˝ 위에 선 교회는 ˝소명의 공동체˝이며, ˝사회의 질서와 경제, 정치 제도들은 하나님의 뜻과 사랑과 목적에 일치하도록 변혁시킬 책무˝가 부여됐다고 밝혔다.(252쪽) 바로 이점이 공공신학이 또는 현재의 교회가 나아갈 바 아닌가 싶다.

개교회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대형화의 굴레를 벗어나 온 사회를 교회당화하는 열린 신앙이 절실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공동체성의 회복을 통해 나아가야 한다. 교회의 보수화, 대형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결핍될 수밖에 없는 공동체성은 지금의 사회와 교회가 회복해야 할 중요한 과제다. 저자는 이를 강하게 주장한다.

그렇다고 이 책은 기본적으로 한국의 개신교를 중심으로 정교분리 원칙이 어떻게 적용되고 변용되었는지를 시대별로 탐구했다. 따라서 한국근현대사와 교회 권력의 역할에 대해 비판적이다. 익히 알려진 목사님들의 이면을 알게 되면 적잖이 놀라게 된다. 이점 유념해서 읽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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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우리 신화 - 우리 신들의 귀환을 위한 이야기 열두 마당
신동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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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흔, <살아있는 우리 신화>, 한겨레출판, 2004.

우리네 역사에서 제일 안타까웠던 부분 중에 하나가 신화 영역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로마 신화에 비해 내용이 빈약하고 구조가 허술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윤기의 그리스로마신화>만 해도 5권으로 정리되어 있지만 우리가 정작 알고 있는 한국 신화들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단군신화와 고대의 신화들은 그 대표적인 예 아닐까 싶었다. 세상의 신화 중에 그리스로마 신화만 한 것은 없어 보였다. 사랑, 시기, 질투, 야망 등 다양한 주제들이 버무려진 신화는 나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최고의 주제였다. 그런데 이제 나의 머리를 때리는 흥미진진한 책을 만났다.

신동흔 교수의 이 책은 지금 증보판이 나왔을 정도로 우리의 신화를 잘 소개하고 있다. 놀랍게도 우리에게도 창세 신화가 있었다. 우주가 창조되고 인간이 사는 세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녹아 있다. 어디 물질적인 세상 뿐이랴. 삼신할미처럼 인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주관하는 신도 있고, 저주 받은 인간이 역경의 세월을 이기고 자신을 미워했던 이들을 돕는 바리대기 이야기도 나온다. 백두와 한라를 주름잡던 신들과 세상을 주름잡는 여성신들까지. 세상의 신들 중 가장 재밌는 신은 오직 그리스로마에만 있을 줄 알았는 데 그것은 착각이었다.

우리의 신들은 멀리 있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주변에서 자신들을 알아주길 바랐지만 서양화 되어버린 우리의 시각은 그들을 인식하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의 신들을 잡신이라며 비하하고 무시했는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 무속화되고 주변화 되었을지도. 그리스의 신들도 알고 보면 자기네 동네의 신이었을 뿐 이 지구를 주름잡던 신은 아니었다. 우리네 신들도 철저히 우리 땅에서 우리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몰라주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신화는 단순히 신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신화를 만들어낸 인간의 숨은 내력이 있다. 우리는 행간에 숨어 있는 그 내력을 읽어내고 현대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오랜 기간 인간의 염원과 바람을 신화 속에 녹여 구전 시켜온 생명의 서사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화는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이야기들을 소환해 부를 때 홀연히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이 되어줄 것이다. 그냥 사라지기에는 우리 신화에는 그 속에 서린 에너지가 너무 많다. 결국엔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 신화와 그 속 주인공의 운명 아닐까?

재밌는 것은 육지에 비해 상대적을 좁은 제주도지만 신들의 숫자는 그에 비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신화적으로 보면 제주는 분명 신비의 땅이자 신들의 영역이었다. 이땅에 있었던 신들을 모아 숫자를 센다면 분명 그리스의 신들에 못지 않을 것이다. 그 신들을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이 이땅의 불쌍한 민초들을 위해 헌신한 점은 분명하고 그들의 역사적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서구에 경도된 내 시각을 고쳐야 할 시점이다. 역시 독서란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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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이만열 교수는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거부를 민족주의적 항거라고 지적했었다. 하지만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는 그를 신앙의 본질에 충실했던 사람으로만 평가하고 있다. 조금은 혼란스럽지만 해석의 다름에 흥미를 느끼며 읽고 있다. 다만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 같은 미친 이를 멈추게 하기 위해 행동으로 나선 것에 비해, 주기철 목사는 (신앙의 측면은 제외하고)일제에 항거하지 않았음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종교가 사회 변화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아니면 종교 본연의 자세에만 충실하는 것이 옳을까? 해묵은 숙제다.

1930년대에 주기철은 "주 목사는 대 일본제국의 신민이 아니란 말이냐, 일본국민이기는 하다"라고 했다. 그의 저항이 권력과의 대결이 아니라 개인 신앙의 보수에 국한됐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친 운전자는 차를 세우게 해야 한다‘는 시국 인식 속에 히틀러 암살이라는 극한의 투쟁을 선택하던 본회퍼의 정신과는 이질적이다.
김용민, <한국개신교와 정치>, 소명출판, 2016,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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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117호 - 2016.겨울
역사문제연구소 엮음 / 역사비평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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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19세기 조선의 풍경이다. 지나치게 서울 중심적이고 지방에 대한 차별이 만연하였다. 이로 인해 서세동점이라는 외부의 영향에 주도적으로 대응하기 힘들게 되었다. 서울은 서울대로(개화사상이나 동도서기론), 지방은 지방대로(위정척사론) 대응함으로써 응집력 있는 힘을 보여주지 못했다. 즉 이는 조선 사회가 내외의 위기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아쉽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조선 멸망의 수순이었다.

이와 같이 19세기는 크게 보면 경향분기, 세부적으로 보면 지역적 사상 분기 현상을 보였다. 이는 지역의 균형 있는 발전과 거리가 있었다. 지나치게 서울 중심적이었고, 인적 구성으로 볼 때 노론 중심이었으며, 노론 가운데서도 안동김씨를 중심으로 한 낙론계와 시파 가문들이 중심이었다. 그들은 서울 북촌 등 일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면서 19세기 세도정군을 만들어냈다. 정보, 문화, 재화의 서울 집중은 지식 정보의 심한 불균형과 인재 양성 및 선발의 경향 간 불균형을 연쇄적으로 초래하였다. 이는 다시 서울과 지방의 문화적 격차 확대를 촉진하였다.
조성산, <19세기 조선의 지식인 지형>, <<역사비평>>117, 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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