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글리 - 못생긴 나에게 안녕을 어글리 시리즈 1
스콧 웨스터펠드 지음, 송경아 옮김 / 문학수첩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외모가 개인 간의 우열과 성패를 가름한다고 믿어 외모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외모지상주의를 일컫는 용어를 루키즘[Lookism]이라고 한다.(네이버 사전인용) 외모에 대한 집착이 만든 폐해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잘 나고 못 나고의 문제를 떠나 이젠 생존의 문제에까지 이르렀다. 바비 인형처럼 늘씬하게 생기고 귀공자처럼 간지 나게 생기길 누구인들 마다할까? 문제는 그 정도가 과해도 너무 과하다. 어딜 가나 외모로 인한 편견과 압박에 시달리는 세상이니 어찌 온전해 보이겠는가. 지나친 엄격화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성형의 시대를 산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사이보그에 다름 아닐지 모른다.

이 책 <어글리>의 저자 스콧 웨스터 펠드는 공상과학에나 어울릴법한 미래의 사회를 아주 상세하고 밀도감 있게 창조하였다. 현재의 인류가 환경오염으로 인해 기상이변과 변태식물의 출현으로 멸망하자 살아남은 신생 인류에 의해 새롭게 개척된 고도문명사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SF소설이다. 그런데 그가 창조한 미래사회가 역설적이게도 한편의 블랙 코미디를 보는 것과 같다.

24세기 미래 사회는 부의 척도, 즉 경제력의 과소에 의한 차별은 무의미하며 단지 외모의 잘남과 못남만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 매개체다. 16살이 되면 모두 못난이의 탈을 벗고 고도로 발달한 성형술에 의해 예쁜이로 태어나 즐기고 마시고 놀기를 일삼다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 누구도 이 과정을 피해 갈 수 없는 복종과 통제된 인위적인 삶 그 자체다. 외모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집착이 다양성을 말살하고 개성을 상실한다면 진정한 미의 기준은 무엇이 될까? 모두 예쁜이로 완벽한 체형과 이목구비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미의 기준은 이미 판단기준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

이 책의 주인공 텔리와 셰이는 못난이의 삶을 청산하고 예쁜이로 변신을 꿈꾸고 있는 최종단계에 이른 상태였다. 그러나 셰이의 일방적인 현실의 모순으로부터의 갈등과 자유로운 삶을 향한 희망은 텔리에게 미묘한 영향을 미치게 되며 그들을 미지의 세계로 이끌게 된다. 그들에게 펼쳐진 녹슬이의 세계는 잃어버린 인간본성의 심연이다. 그 속에 자유를 열망하며 모여 든 스모크인 들은 자연의 법칙을 체득한 사람들이다. 획일적이고 판박이처럼 똑같은 삶이 아닌 자연과 호흡하며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유가 부여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래사회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이 책의 핵심은 인간본성의 회복에 바늘을 가리키고  있다. 정보매체를 통해 날마다 확대 재생산되는 미인들의 세상은 사회의 가치기준을 오도하고 공공의 선을 외면하게 한다. 또한 패배감과 상실감으로 물젖게 만든다. 과유불급의 경고다. 실제 우리 사회가 과도한 외모집착의 문제에 대해 냉철하고 자성적인 반성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저자의 허상이 한낱 공상으로만 그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먼 미래가 아닐지라도 가까운 장래에 실현가능한 현실이 될 것 같은 착각마저 드니 말이다.

재미있는 책이다. 흥미와 생각거리를 동시에 잡았다.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 상상력으로 뭉친 이야기다. 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 내지는 않았겠으나 영화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괜찮다. 공중보드를 타고 넘나드는 스릴감과 예쁜이들로 넘쳐나는 세상의 풍경은 어디서도 보기 힘든 진귀한 세상일게다. 전지적 작가시점에 의한 인물의 상세묘사는 시선처리의 혼동을 막아준다. 시리즈물의 첫 편인 <어글리>의 탄탄한 얼개와 구조를 가늠해 볼 때 후속 또한 놀라운 반전과 재미가 가득할 것 같다.

조물주가 인간을 모두 다르게 창조하였을 때는 그 쓰임새와 용도가 필요에 의해 다르게 사용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내면보다 외부로 드러난 것에 집착하다가는 동굴의 우상에 빠져 허우적댈지 모른다. 성형으로 인한 부작용이 겉으로 드러난 상처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생채기 난 상처가 더 깊고 아픔을 깨우쳐야 할 때임은 분명하다. 아울러 개성과 인성을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소중하게 가꾸고 생각한다면 미모의 허상에서 조금은 가벼이 벗어나지 않을까? 그래도 미모는 나의 힘이라 역설한다면 뭐라 반박할 말이 없는 세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벼랑 위에 선 미국 - 이슬람의 도전과 사라지는 강대국들
마크 스타인 지음, 현승희 옮김 / 인간사랑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솔직히 난 미국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미국이라는 거대욕망의 정체가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그렇고 슈퍼경찰국가랍네 자유주의를 무기로 휘두르는 것을 보면 그리 호감이 가지 않는다. 명분은 그럴싸하지만 돌아서면 뒷맛을 구리는 게 영 아니올시다. 하지만 국내 정서는 아직까지 미국에 대해 우호적인 편이다. 부시정권이 들쑤셔 놓은 각종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젊은 피 오바마가 이어받은 뒤론 호감도가 다시 상승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것 같은 미국의 파워가 나날이 약해진다는 사실이다. 동서 이데올로기의 붕괴이후 통합된 이념적 실체를 드러내며 대항할 강력한 권력(국가)의 실체가 없었다는 것도 미국을 독주하게 만든 원인이다. 이후 중국의 자유화로 인한 성장잠재력이 미국에게 대항할 그나마 설득력이 있는 대안이나 약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렇게 막강하던 미국의 권력이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로 치닫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무엇이 미국과 대치되는 안티가 되고 반대세력이 되는 현실인지 곱씹어 볼 가치가 충분하다. 그래서 미국이 전통우방에게서 조차 곱상한 시선을 받지 못하는 깡패국가처럼 분류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 책의 저자가 밝힌 이슬람 대 미국의 관계는 불편한 진실의 한 부분인지 모른다. 미국을 비롯한 주류 선진 강대국들의 슬로건은 개방, 자유, 포용이었다. 다문화주의에 대한 관용은 인권을 무기로 한 평등사상에 도취되어 차별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역으로 수출된 이슬람주의는 미국과 서방세계의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건이 되어 버렸다. 무차별적으로 급진적 이념으로 무장한 젊은 이슬람의 피가 흐르는 그들이 미국으로 유럽으로 돌진하는 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위험스러운 현실은 이슬람주의에 경도된 자국민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한 모든 주제가 바로 이슬람의 번성과 궤를 같이한다. 미래를 가르는 최고의 화두가 일할 인구, 즉 대체인력의 보유다. 하나 둘 채워 나가기 시작한 유럽의 이슬람 이민은 이제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뺄 만큼 수가 증가하였다. 사실 우리에겐 강 건너 불구경이다. 다문화주의에 대한 배척의 골이 높은 민족이 우리 말고 또 있을까. 하지만 시나브로 스며드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경고는 넘겨들을 일이 아닌 것은 확고하다. 그래서 미국이란 나라가 처한 현실을 벼랑에 섰다는 극단의 시선으로 빗댄 저자의 경고를 무시할 수 없다.

실제 2001년 9월 11일 쌍둥이 빌딩 자폭테러는 이슬람을 주적으로 모는 결과를 도출하였다. 미국이 이라크를 상대로 벌인 명분은 자국민을 보호하고 악의 축에 대한 응징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부시정권의 실리를 채우는 야욕이 숨어 있다는 뻔뻔함만 제대로 보여 주었다. 이처럼 미국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앞 세워 내지른 오만방자함은 자가당착의 덫에 빠졌는지 모른다. 따라서 노암 촘스키가 그의 저서 <촘스키, 변화의 길목에서 미국을 말하다>에서 밝힌 바와 같이 중동평화의 걸림돌은 바로 미국과 이스라엘이다.

유럽이 노쇠하고 사회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의 늪에 빠졌다는 것도 저자가 짚은 현실이며 설득력이 높아 보인다. 영국으로 이민 온 사우디계 영국인의 이슬람 전통의 고수가 이곳이 기독교의 본산이 맞는지 실소를 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금을 타내기 위해 죽은 노모를 끌어안고 산다면 이게 올바른 사회보장제도일까. 이미 붕괴된 유럽의 기존 체재전통은 더 이상 가까운 미래에는 흔적을 찾기 힘들지 모르겠다. 이 책에서 밝힌 이슬람에 대한 시각은 미국인들에 대한 준엄한 경고다. 미국이 유래가 없는 불량국가로 전락한 위험천만한 현재를 대변한다.

하지만 이 책은 읽어 내기가 수월치만은 않다. 주절주절 덧붙인 인용과 은유가 오히려 이해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분량에 비해 쉽게 앞으로 나가질 못했다. 번역과정의 어려움보다 원서의 산만함이 오히려 이유지 싶다. 그리고 저자의 통찰이 신선해 보이는 것에 반해 극단으로 치우친 면이 되레 지나쳐 보인다. 또한 무엇보다 가장 불편하게 만든 이유는 결국 미국이라는 패권국가가 과거의 영광을 현재에도 장래에도 이어가겠다는 야망을 드러낸 속내다.

중동의 모래바람이 미국을 덮어 버리기 전에 자각하고 깨어나라는 주문이다. 중동의 그들이 선동적이고 혁명적인 이론으로 무장할 때 미국과 유럽은 늙어 간다는 현실을 직시하자는 논리다. 지극히 보수적이고 신자유주의에 푹 적셔진 사상의 추출물이다. 물론 저자의 논의가 현실적 문제를 반영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슬람주의가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기 전에 제대로 바라보고 치유하자는 격양된 논거에 다름 아니다.

이렇듯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를 둘러싼 강호들의 몰락을 넋 놓고 보고자 함은 아니다. 예의 주시해야 하는 현실은 서방세계와 긴밀하게 연결된 우리의 역학관계라는 진실이다. 미국이 좋든 싫든 북한과의 대치상황에서 현실적 타개책은 체제옹호를 위한 확고부동한 이념적 무장이다. 다소 과장된 이슬람문화에 대한 저자의 주장을 간과할 수 없는 현실도 우리에게 닥쳐오는 이슬람의 시선이다. 이슬람문화로 무장한 그들의 가미가재식 돌격대가 우리에게도 촉각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너무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면 진저리가 난다고 했던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말은 부작위(不作爲)를 의미한다. 실정법 상 유기죄는 대표적인 부작위범이다. 작위의무가 있음에도 능동적인 구호조치를 취하지 않는 행위를 벌하겠다는 법리다. 이것도 법적 안정성이라는 테두리 내에서만 가능한 일이겠으나 어찌 생각해보면 누구도 자유로울 순 없다.




내가 무진에 사는 자애학원의 천인공노할 일을 목도한 시민이었다면 어찌할 수 있었을까? 진실은 항상 불편하다는 작가의 말처럼 침묵으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알 수 없는 논리로 넘어가야 할까? 아니면 농인들을 대변하던 강인호나 서유진 인권센터직원처럼 불의에 맞서 항거의 몸부림이라도 해야만 할까?




읽을수록 불편한 마음은 더부룩 답답하기만 하다. 명치 언저리 쯤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딱 그 짝이다. 속 시원하게 활명수 한 병 들이킨다고 달라질까마는 그런다고 해결될 수 있음 정말 좋겠다. “잘못했다면 벌을 받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나서야 한다 그러나......“로 돌변하는 그 젊은 목사의 매캐한 말이 ‘진실이 덮이고 눈을 감는 것은 시간문제구나’하는 생각이 비단 이것만은 아니리라.




명백한 범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권력구조를 따져 보고 이권을 재는 것의 밑바탕은 이 사회가 윗대로 물려받은 요상한 대물림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라면 희망도 신념도 얼마쯤 뚝 떼어 나누어 팔 수 있겠다. 진실은 결코 개들에게 던져 줄 수 없다는 작가의 말도 이해 못하는바 아니나 이런 현실이라면 침묵하는 저들을 무엇으로 바꾸겠는가. 




제 아무리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 기본권과 존엄성의 가치가 단 일 그램의 오차범위 없이 모두에게 동일성을 부여한다고 할지라도 달라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저주스런 한국식 온정주의에 물든 메커니즘이지 싶다. 이른바 힘의 불균형에서 오는 구조적 차별이자 모순이다.




작가가 강인호를 통해 보여준 소시민적 모습은 나를 보는 불편함이다. 권력을 향한 소리 없는 외침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공허함이다. 무진에 짙게 깔린 해무(海霧)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보지 못하는 그들과 무엇이 다를까? 신체의 장애가 아니라도 마음의 장애는 그 크기나 형태가 똑같다. 그것을 현상의 다름에서 오는 차별로 인식할 뿐 마음에서 오는 소리는 외면하기 때문이다. 침묵의 카르텔이 생산하는 눅진한 끈적거림은 원래부터라는 논리로 인정해 버린다.




자애학원의 농인들도 보편적 인간의 유전자구조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인면수심의 그들의 짐승만도 못한 행위를 버젓이 보고도 내버려 둔단 말인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인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분개하고 관심을 가지고 그러다 시간이라는 명약(?)이 우리를 서서히 가라앉게 만들고 타협하게 만들 것이니 말이다. ‘적당히’라는 그것으로 말이다.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메커니즘이 이런 것일까? 온정주의로 무장한 적당히 눈 감아 주는 것이 과연 미덕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 드러난 구조적 모순은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이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치부를 드러내더라도 할퀴고 물어뜯는 야만성은 희망을 얼어붙게 만든다. 야비하다 못해 역겹기까지 하다. 가진 자들의 연대가 이토록 견고한 철옹성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것이라면 깨트리기 힘든 요새나 진배없다.




가진 자가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에너지는, 가지지 못한 자가 그것을 빼앗고 싶어 하는 에너지의 두 배라고 한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의 쾌락과 가지지 못한 것의 공포를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거짓말의 합창은 그러니까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어서 맑은 하늘에 천둥과 번개를 부를 정도의 힘을 충분히 가진 것 이었다.(p-246)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과 인권침해는 명백한 사회적 부작위다. 장애와 비장애를 나누는 기초적인 기준부터 새롭게 바꾸고 개선해야 한다. 그들이 조금 불편한 신체적 특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 하나만으로 지금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방치된다는 것은 ‘더불어 사는 사회’의 참된 의미를 곡해한 처사다. 자연이 가진 놀라운 자정능력을 이제라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시스템의 문제가 아닌 인식의 문제며 포용의 요구다. 왜(Why)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How) 바꿀 것인가의 문제로 직시해야 한다.




높은 도덕적 연대의식은 공공의 선을 만드는 기준이 되며 이러한 작동원리는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순환하고 피돌기를 하게 만드는 버팀목이 된다. 저자의 사상적 맥락 또한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소시민적 변화를 희망한다. 비록 각색에 의해 한 꺼풀 낮춘 이야기로 탈바꿈 되어 아비규환의 세상이 <도가니>로 내려앉았으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공지영작가의 평소 철학 그대로 담고자 한 것은 담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렸기에 그저 독자들의 눈물샘이나 자극하자고 펜을 들진 않았으리라 본다.


분명 어떻게 받아 들일까하는 것은 읽는 사람의 자유의지다. 작가의 엔딩에 담긴 이 사회를 향한 거대한 바람처럼 나는 소망해 본다. 밀알처럼 키위 일궈낸 희망의 싹이 갈아엎은 대지 사이로 다시금 잎을 틔웠다는 바람처럼, 홀로 더불어 꿋꿋하게 살아가겠다는 홀더의 바람처럼 그렇게 모두 행복해지기를 말이다. 비록 세파에 시달리고 가난이라는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현실에 치이고 멍이 들더라도 희망만은 사라지지지 않는 그것으로 남기를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사의 게임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권의 책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의 파괴력은 그 어떤 이미지보다 더 강하다. 한 줄 한 줄 엮인 글자의 움직임은 무에서 유로 나아가는 경이적인 방법이다. 하여 천재작가가 쓴 이 책의 감흥은 수초처럼 온몸을 감싸는 치명적인 유혹과도 같다. 버둥거릴수록 빨려 들어가는 보이지 않는 공포의 위력이다.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표현은 이럴 때 써야 할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극한의 공포심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을 때 써야 한다. 무서움이 자극하는 인간을 향한 원형의 감정을 통해 그 상태 그대로 숨이 멈출 것 같은 두려움과 홀로 조우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소 공포물을 달가워하지 않는 이유도 물론 있겠지만 이 책이 던진 시선의 모든 것이 인간내면 심연에 깃든 어둠을 향한다. 하드 보일드한 문체에 숨은 플롯의 빼어난 전개의 간결함을 통해 감정전이의 격랑을 온몸으로 받아 내야한다는 것도 큰 이유 중 하나겠다. 놀라운 것은 끔찍하고 호러적인 요소가 극히 드물다는 점이다. 단지 행간 사이사이에 숨어 알알이 박힌 감정의 연결고리를 작가의 순발력과 창의력으로 인해 가공할 만한 상태로 이끈다는 것이며 헤집어 버린다는 것이다.

<천사의 게임>은 기대하지 못한 반전의 패러독스와 거미줄처럼 얽힌 알고리즘의 치밀함에 저항 없이 굴복당하는 모종의 쾌감을 주는 책이다. 감춰두었던 두려움의 원형과 실체를 조심스럽게 수면위로 끌어 올려 해부하고 자세히 관찰해 그대로의 상태를 보여 주는 사실적 묘사에 근접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데블스 에드버킷>에서 타락한 변호사로 등장한 어리석은 인간의 탐욕을 꿰뚫어 본 악마의 치명적인 유혹처럼, 이 책 또한 인간의 본성에 엉겨 붙은 악의 유혹처럼 타락천사 루시퍼의 욕망의 굴레에 사로잡힌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는 내홍으로 불타던 시절이었다. 과도기적 상황과 불안정한 정치구조는 당시의 시대상황이 저주받은 도시처럼 암울한 시기였음을 말해준다. 침통하고 냉소적인 당시상황을 감안한다면 잊힌 책으로부터 연결고리를 찾은 저자의 모티브는 시의적절함을 넘어 딱 들어맞는다. 감정을 억압당하고 권력을 향한 폭정은 닮은꼴처럼 엇비슷하다. 따라서 불가피하든 그렇지 않든 반영되는 작가의 경험적 소산은 이야기의 얼개를 만드는 틀과 같다.

글을 쓰는 작가의 로망이라면 글로부터 촉발하는 독자와의 짜릿한 교감의 순간을 갈구하지 않을까. 이야기를 만들고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바란다. 창작의 고통을 오롯이 이겨내고 혼을 담은 글쓰기를 통해 타자를 사로잡는 공감의 무엇을 생산해 낸다면 오르가즘처럼 짜릿한 쾌락의 순간일지 모르겠다. 저자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은 책에 영혼이 담긴다는 철학으로부터 사유했다.  

다비드의 타자를 위한 삶은 목적과 방향을 혼동한다.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는 얄궂은 운명에 유린당하고 고통당하는 나약한 순간을 통해 천사인지 악마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유혹은 너무도 인간적이다. 여기에 몽환적이고 암울한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배열하며 연결하는 서사구조는 인간 내면 심연의 원초적인 모습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기에 적합해 보인다. 책에 담긴 사유의 바다가 영혼을 지배하고 삶을 통제하는 판도라 상자가 된다는 발상이 전환이 신선하다.

이처럼 초자연적이고 종교적인 색채가 첨가된 작품들은 인간의 본질에 초점을 맞추어 탐구하는 공통점이 있다. <파우스트>의 괴테가 그랬듯 <천사와 악마>의 댄 브라운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과 매우 근접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유혹의 손길을 뻗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대천사가 하느님의 명을 거역하고 반란을 일으켜 지옥으로 떨어졌다는 루시퍼의 출현과 일맥상통한다. 루시퍼를 통해 인간이 접할 수 있는 모든 운명의 순간을 나선형 구조로 배열하고 그 속에서 번민하고 집착하는 인간의 욕망과 고뇌를 드려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비드를 둘러싼 크리스티나, 이사벨라로 묶인 애정관계 또한 이야기의 생동감을 불어 넣는 좋은 재료이자 기교적 장치다. 또한 우호적인 인물들을 배치하고 뜻밖의 인물의 등장과 출현을 통해 반전의 효과를 기대하는 구조는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하지만 반전의 순간이 호락호락 예측가능하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마치 덫에 걸린 것처럼 막다른 골목에 몰린 외길을 가는 확신의 순간을 불측의 미로 속으로 밀어 버리는 것이 진정으로 예상을 뒤엎는 반전이지 않겠는가. 하여 섣부른 추리로 예단하다 작가의 필력에 농락당하지 마시기를.  

어스름한 밤 혼자 읽으면 괴괴함에 오싹해진다. 칠흑의 어둠 저편으로 누군가가 바라보며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릴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힌다. 마치 저주받은 도시로부터 날아든 천사의 밀랍이 봉인된 편지로부터의 유혹이 시간을 마비시키는 팜므파탈의 매혹과도 같다. 이로써 우리는 다비드를 따라 투영되는 세계가 현실처럼 쏟아지고 시리도록 차가운 어둠의 공포가 대기를 얼게 만든다. 밤늦은 시각 이 책을 읽지 마시라. 검은 피처럼 퍼지는 무서움에 몸서리치는 공포가 엄습할 것이며 뜬눈으로 지새우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심장을 쏴라“는 일견 섬뜩한 말이다. 지극히 은유적 표현임에도 드러난 상태는 두렵기 그지없다. 자유롭지 못하다면 죽음보다 못하다는 감추어진 의미를 차치하고라도 직설적이고 자극적이기까지 하다. 읽는 내내 편하질 못하다. 야릇하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이것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마음 한편 애써 누른 저릿한 동통이 동반해 온다. 낯익지 않은 정경으로부터 오는 혼동일까? 아니면 단단한 껍질에 갇힌 불편한 진실일까?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다양한 상념에 물들게 한다. 무엇을 그리고 어떤 것을 담았기에 이토록 절절할까하는 의구심부터 성큼성큼 내지르게 만든다. 두 남자, 이수명과 류승민의 기막힌 삶. 그들은 인간으로부터 절절히 미치고 붙들려 갇혀서 제대로 미쳐 버렸다. 양극단을 오고 가는 곡예단과 같은 삶에 피멍든 20대 끊어 넘치는 열정의 영혼이다. 그런데 그들은 존재감이 상실된 무형의 인간이자 잉여인간이다. 인간이 인간을 가둘 작위적인 명분에 의해 분류된 수리희망병원 인내반 아무개에 지나지 않았다.


저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그들을 통해 자유를 향한 원초적인 오랜 물음에 답을 구하고자 하였다. 익숙지 않은 배경을 무대로 도두라진 상호대비감을 극대화하였으며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효과를 기대하였다. 이야기는 씨줄과 날줄이 맞물려 돌아가 듯 치밀한 구성과 전개로 진하게 우려 낸 감동을 자아낸다. 한 번에 몰아치는 호흡이 아닌 여러 번에 나누어 걸친 호흡과 템포는 절정으로 향할수록 거침없이 달뜬다. 그들에게 자유의 본질을 구하는 순간부터 예견된 신념을 향한 여정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다. 아니 어쩌면 여유를 잃어 버렸는지 모른다. 이미 승민과 수명의 만남 그 순간부터 운명처럼 드리워진 삶의 무게였는지 모른다.


더욱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들이 선 곳은 정신병원이다. 그들을 둘러 싼 군상들 또한 정상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나눈 편견에 불과했다. 오히려 위선도 가식도 없는 순수함에 더 가까운지 모른다. 단지 마음이 아플 뿐이지 다른 것은 어떤 것도 없다. 우리는 살기 위해 자유를 조금씩 양보하고 내어 준다. 그 속에서 정체성의 현기증에 타협하고 순응하며 언제 있을지 모를 미래의 그날을 갈구하며 그렇게 영혼을 갉아 먹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이른바 정신병자다. 심각한 공황장애와 적응장애로 진단된 부적응자다. 그들은 정상의 삶을 살지 않았음에도 너무도 정상에 가깝다. 타자로부터 빼앗긴 자유의 항거는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행복추구를 위한 몸부림이며 처절함이다. 수명과 승민을 이렇게 만든 현실은 진정한 애정과 교감이 결핍된 소통과 공존의 부재에서부터다. 이해와 신뢰가 절실하였음에도 그들에게는 사치이며 벼랑 끝으로 밀려 나기에 급했다.


극단의 우울증을 앓던 어머니를 유기하여 죽음으로 던진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명의 삶에 사생아로 태어나 이복형제들과의 유산다툼에 휘말린 승민의 기구한 운명은 자신을 지배하던 통제된 삶의 전형이다. 사실 정신병원은 눅진하고 괴기스러운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제 아무리 좋게 봐 주려해도 꺼림칙한 것이 사실이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상이 단조롭지 못하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인간이 만든 전체를 가르는 구분에 우리는 편견의 벽을 쌓고 사는지 모른다. 그들에게 단순히 장애는 정신질환이다. 몸이 아파 병원에서 치료를 받듯 정신이 병들고 힘든 상태다. 하지만 엄청난 충격에 의해 입은 내상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묻히기 쉬우며 다름을 식별할 수 없다. 편견이 생산한 착각이자 오만이다. 오만은 구속을 합리화하고 폭력에 무뎌지게 한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그들도 인간임을 뒤늦은 깨우침을 얻는다. 정신지체를 가진 한이와 지은이를 통해 인간의 기본권마저 철저히 유린당한 영혼에 분개하고 생니를 송두리째 뽑아 내 버리는 것으로 울분을 토로하는 한이의 절규에 인간을 혐오하게 한다. 누군가에게 군림한다는 것은 영혼마저 앗아 오는 것으로 인간을 오염시키는 오랜 망령이다. 이처럼 수리정신병원에 수감된 영혼들은 구구절절한 사연을 하나쯤은 간직한 힘없는 영혼들이다.


저자의 경험칙에서 불러 온 그들을 통해 차별을 목도하고 수명과 승민을 통해 자유를 보았다. 청춘에게 받치는 거창한 헌사가 아니라도 당당히 나설 명분을 얻는다. 인간의 내밀한 본성을 치밀하게 소환해 낸 저자의 필력이 대단하다. 비열, 외면, 위선, 두려움의 원형은 껍질에 불과하며 세상과 맞서기 위한 수단에 불과함을 이토록 멋지게 담아 낸 그녀의 역량에 차재의 행보가 기대된다.


말랑말랑 굳어 버린 그것은 바로 자유를 향한 치열한 도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