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위에 선 미국 - 이슬람의 도전과 사라지는 강대국들
마크 스타인 지음, 현승희 옮김 / 인간사랑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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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난 미국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미국이라는 거대욕망의 정체가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그렇고 슈퍼경찰국가랍네 자유주의를 무기로 휘두르는 것을 보면 그리 호감이 가지 않는다. 명분은 그럴싸하지만 돌아서면 뒷맛을 구리는 게 영 아니올시다. 하지만 국내 정서는 아직까지 미국에 대해 우호적인 편이다. 부시정권이 들쑤셔 놓은 각종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젊은 피 오바마가 이어받은 뒤론 호감도가 다시 상승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것 같은 미국의 파워가 나날이 약해진다는 사실이다. 동서 이데올로기의 붕괴이후 통합된 이념적 실체를 드러내며 대항할 강력한 권력(국가)의 실체가 없었다는 것도 미국을 독주하게 만든 원인이다. 이후 중국의 자유화로 인한 성장잠재력이 미국에게 대항할 그나마 설득력이 있는 대안이나 약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렇게 막강하던 미국의 권력이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로 치닫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무엇이 미국과 대치되는 안티가 되고 반대세력이 되는 현실인지 곱씹어 볼 가치가 충분하다. 그래서 미국이 전통우방에게서 조차 곱상한 시선을 받지 못하는 깡패국가처럼 분류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 책의 저자가 밝힌 이슬람 대 미국의 관계는 불편한 진실의 한 부분인지 모른다. 미국을 비롯한 주류 선진 강대국들의 슬로건은 개방, 자유, 포용이었다. 다문화주의에 대한 관용은 인권을 무기로 한 평등사상에 도취되어 차별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역으로 수출된 이슬람주의는 미국과 서방세계의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건이 되어 버렸다. 무차별적으로 급진적 이념으로 무장한 젊은 이슬람의 피가 흐르는 그들이 미국으로 유럽으로 돌진하는 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위험스러운 현실은 이슬람주의에 경도된 자국민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한 모든 주제가 바로 이슬람의 번성과 궤를 같이한다. 미래를 가르는 최고의 화두가 일할 인구, 즉 대체인력의 보유다. 하나 둘 채워 나가기 시작한 유럽의 이슬람 이민은 이제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뺄 만큼 수가 증가하였다. 사실 우리에겐 강 건너 불구경이다. 다문화주의에 대한 배척의 골이 높은 민족이 우리 말고 또 있을까. 하지만 시나브로 스며드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경고는 넘겨들을 일이 아닌 것은 확고하다. 그래서 미국이란 나라가 처한 현실을 벼랑에 섰다는 극단의 시선으로 빗댄 저자의 경고를 무시할 수 없다.

실제 2001년 9월 11일 쌍둥이 빌딩 자폭테러는 이슬람을 주적으로 모는 결과를 도출하였다. 미국이 이라크를 상대로 벌인 명분은 자국민을 보호하고 악의 축에 대한 응징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부시정권의 실리를 채우는 야욕이 숨어 있다는 뻔뻔함만 제대로 보여 주었다. 이처럼 미국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앞 세워 내지른 오만방자함은 자가당착의 덫에 빠졌는지 모른다. 따라서 노암 촘스키가 그의 저서 <촘스키, 변화의 길목에서 미국을 말하다>에서 밝힌 바와 같이 중동평화의 걸림돌은 바로 미국과 이스라엘이다.

유럽이 노쇠하고 사회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의 늪에 빠졌다는 것도 저자가 짚은 현실이며 설득력이 높아 보인다. 영국으로 이민 온 사우디계 영국인의 이슬람 전통의 고수가 이곳이 기독교의 본산이 맞는지 실소를 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금을 타내기 위해 죽은 노모를 끌어안고 산다면 이게 올바른 사회보장제도일까. 이미 붕괴된 유럽의 기존 체재전통은 더 이상 가까운 미래에는 흔적을 찾기 힘들지 모르겠다. 이 책에서 밝힌 이슬람에 대한 시각은 미국인들에 대한 준엄한 경고다. 미국이 유래가 없는 불량국가로 전락한 위험천만한 현재를 대변한다.

하지만 이 책은 읽어 내기가 수월치만은 않다. 주절주절 덧붙인 인용과 은유가 오히려 이해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분량에 비해 쉽게 앞으로 나가질 못했다. 번역과정의 어려움보다 원서의 산만함이 오히려 이유지 싶다. 그리고 저자의 통찰이 신선해 보이는 것에 반해 극단으로 치우친 면이 되레 지나쳐 보인다. 또한 무엇보다 가장 불편하게 만든 이유는 결국 미국이라는 패권국가가 과거의 영광을 현재에도 장래에도 이어가겠다는 야망을 드러낸 속내다.

중동의 모래바람이 미국을 덮어 버리기 전에 자각하고 깨어나라는 주문이다. 중동의 그들이 선동적이고 혁명적인 이론으로 무장할 때 미국과 유럽은 늙어 간다는 현실을 직시하자는 논리다. 지극히 보수적이고 신자유주의에 푹 적셔진 사상의 추출물이다. 물론 저자의 논의가 현실적 문제를 반영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슬람주의가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기 전에 제대로 바라보고 치유하자는 격양된 논거에 다름 아니다.

이렇듯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를 둘러싼 강호들의 몰락을 넋 놓고 보고자 함은 아니다. 예의 주시해야 하는 현실은 서방세계와 긴밀하게 연결된 우리의 역학관계라는 진실이다. 미국이 좋든 싫든 북한과의 대치상황에서 현실적 타개책은 체제옹호를 위한 확고부동한 이념적 무장이다. 다소 과장된 이슬람문화에 대한 저자의 주장을 간과할 수 없는 현실도 우리에게 닥쳐오는 이슬람의 시선이다. 이슬람문화로 무장한 그들의 가미가재식 돌격대가 우리에게도 촉각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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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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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을 해야 할까? 너무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면 진저리가 난다고 했던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말은 부작위(不作爲)를 의미한다. 실정법 상 유기죄는 대표적인 부작위범이다. 작위의무가 있음에도 능동적인 구호조치를 취하지 않는 행위를 벌하겠다는 법리다. 이것도 법적 안정성이라는 테두리 내에서만 가능한 일이겠으나 어찌 생각해보면 누구도 자유로울 순 없다.




내가 무진에 사는 자애학원의 천인공노할 일을 목도한 시민이었다면 어찌할 수 있었을까? 진실은 항상 불편하다는 작가의 말처럼 침묵으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알 수 없는 논리로 넘어가야 할까? 아니면 농인들을 대변하던 강인호나 서유진 인권센터직원처럼 불의에 맞서 항거의 몸부림이라도 해야만 할까?




읽을수록 불편한 마음은 더부룩 답답하기만 하다. 명치 언저리 쯤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딱 그 짝이다. 속 시원하게 활명수 한 병 들이킨다고 달라질까마는 그런다고 해결될 수 있음 정말 좋겠다. “잘못했다면 벌을 받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나서야 한다 그러나......“로 돌변하는 그 젊은 목사의 매캐한 말이 ‘진실이 덮이고 눈을 감는 것은 시간문제구나’하는 생각이 비단 이것만은 아니리라.




명백한 범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권력구조를 따져 보고 이권을 재는 것의 밑바탕은 이 사회가 윗대로 물려받은 요상한 대물림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라면 희망도 신념도 얼마쯤 뚝 떼어 나누어 팔 수 있겠다. 진실은 결코 개들에게 던져 줄 수 없다는 작가의 말도 이해 못하는바 아니나 이런 현실이라면 침묵하는 저들을 무엇으로 바꾸겠는가. 




제 아무리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 기본권과 존엄성의 가치가 단 일 그램의 오차범위 없이 모두에게 동일성을 부여한다고 할지라도 달라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저주스런 한국식 온정주의에 물든 메커니즘이지 싶다. 이른바 힘의 불균형에서 오는 구조적 차별이자 모순이다.




작가가 강인호를 통해 보여준 소시민적 모습은 나를 보는 불편함이다. 권력을 향한 소리 없는 외침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공허함이다. 무진에 짙게 깔린 해무(海霧)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보지 못하는 그들과 무엇이 다를까? 신체의 장애가 아니라도 마음의 장애는 그 크기나 형태가 똑같다. 그것을 현상의 다름에서 오는 차별로 인식할 뿐 마음에서 오는 소리는 외면하기 때문이다. 침묵의 카르텔이 생산하는 눅진한 끈적거림은 원래부터라는 논리로 인정해 버린다.




자애학원의 농인들도 보편적 인간의 유전자구조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인면수심의 그들의 짐승만도 못한 행위를 버젓이 보고도 내버려 둔단 말인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인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분개하고 관심을 가지고 그러다 시간이라는 명약(?)이 우리를 서서히 가라앉게 만들고 타협하게 만들 것이니 말이다. ‘적당히’라는 그것으로 말이다.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메커니즘이 이런 것일까? 온정주의로 무장한 적당히 눈 감아 주는 것이 과연 미덕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 드러난 구조적 모순은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이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치부를 드러내더라도 할퀴고 물어뜯는 야만성은 희망을 얼어붙게 만든다. 야비하다 못해 역겹기까지 하다. 가진 자들의 연대가 이토록 견고한 철옹성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것이라면 깨트리기 힘든 요새나 진배없다.




가진 자가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에너지는, 가지지 못한 자가 그것을 빼앗고 싶어 하는 에너지의 두 배라고 한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의 쾌락과 가지지 못한 것의 공포를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거짓말의 합창은 그러니까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어서 맑은 하늘에 천둥과 번개를 부를 정도의 힘을 충분히 가진 것 이었다.(p-246)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과 인권침해는 명백한 사회적 부작위다. 장애와 비장애를 나누는 기초적인 기준부터 새롭게 바꾸고 개선해야 한다. 그들이 조금 불편한 신체적 특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 하나만으로 지금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방치된다는 것은 ‘더불어 사는 사회’의 참된 의미를 곡해한 처사다. 자연이 가진 놀라운 자정능력을 이제라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시스템의 문제가 아닌 인식의 문제며 포용의 요구다. 왜(Why)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How) 바꿀 것인가의 문제로 직시해야 한다.




높은 도덕적 연대의식은 공공의 선을 만드는 기준이 되며 이러한 작동원리는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순환하고 피돌기를 하게 만드는 버팀목이 된다. 저자의 사상적 맥락 또한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소시민적 변화를 희망한다. 비록 각색에 의해 한 꺼풀 낮춘 이야기로 탈바꿈 되어 아비규환의 세상이 <도가니>로 내려앉았으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공지영작가의 평소 철학 그대로 담고자 한 것은 담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렸기에 그저 독자들의 눈물샘이나 자극하자고 펜을 들진 않았으리라 본다.


분명 어떻게 받아 들일까하는 것은 읽는 사람의 자유의지다. 작가의 엔딩에 담긴 이 사회를 향한 거대한 바람처럼 나는 소망해 본다. 밀알처럼 키위 일궈낸 희망의 싹이 갈아엎은 대지 사이로 다시금 잎을 틔웠다는 바람처럼, 홀로 더불어 꿋꿋하게 살아가겠다는 홀더의 바람처럼 그렇게 모두 행복해지기를 말이다. 비록 세파에 시달리고 가난이라는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현실에 치이고 멍이 들더라도 희망만은 사라지지지 않는 그것으로 남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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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게임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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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의 책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의 파괴력은 그 어떤 이미지보다 더 강하다. 한 줄 한 줄 엮인 글자의 움직임은 무에서 유로 나아가는 경이적인 방법이다. 하여 천재작가가 쓴 이 책의 감흥은 수초처럼 온몸을 감싸는 치명적인 유혹과도 같다. 버둥거릴수록 빨려 들어가는 보이지 않는 공포의 위력이다.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표현은 이럴 때 써야 할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극한의 공포심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을 때 써야 한다. 무서움이 자극하는 인간을 향한 원형의 감정을 통해 그 상태 그대로 숨이 멈출 것 같은 두려움과 홀로 조우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소 공포물을 달가워하지 않는 이유도 물론 있겠지만 이 책이 던진 시선의 모든 것이 인간내면 심연에 깃든 어둠을 향한다. 하드 보일드한 문체에 숨은 플롯의 빼어난 전개의 간결함을 통해 감정전이의 격랑을 온몸으로 받아 내야한다는 것도 큰 이유 중 하나겠다. 놀라운 것은 끔찍하고 호러적인 요소가 극히 드물다는 점이다. 단지 행간 사이사이에 숨어 알알이 박힌 감정의 연결고리를 작가의 순발력과 창의력으로 인해 가공할 만한 상태로 이끈다는 것이며 헤집어 버린다는 것이다.

<천사의 게임>은 기대하지 못한 반전의 패러독스와 거미줄처럼 얽힌 알고리즘의 치밀함에 저항 없이 굴복당하는 모종의 쾌감을 주는 책이다. 감춰두었던 두려움의 원형과 실체를 조심스럽게 수면위로 끌어 올려 해부하고 자세히 관찰해 그대로의 상태를 보여 주는 사실적 묘사에 근접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데블스 에드버킷>에서 타락한 변호사로 등장한 어리석은 인간의 탐욕을 꿰뚫어 본 악마의 치명적인 유혹처럼, 이 책 또한 인간의 본성에 엉겨 붙은 악의 유혹처럼 타락천사 루시퍼의 욕망의 굴레에 사로잡힌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는 내홍으로 불타던 시절이었다. 과도기적 상황과 불안정한 정치구조는 당시의 시대상황이 저주받은 도시처럼 암울한 시기였음을 말해준다. 침통하고 냉소적인 당시상황을 감안한다면 잊힌 책으로부터 연결고리를 찾은 저자의 모티브는 시의적절함을 넘어 딱 들어맞는다. 감정을 억압당하고 권력을 향한 폭정은 닮은꼴처럼 엇비슷하다. 따라서 불가피하든 그렇지 않든 반영되는 작가의 경험적 소산은 이야기의 얼개를 만드는 틀과 같다.

글을 쓰는 작가의 로망이라면 글로부터 촉발하는 독자와의 짜릿한 교감의 순간을 갈구하지 않을까. 이야기를 만들고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바란다. 창작의 고통을 오롯이 이겨내고 혼을 담은 글쓰기를 통해 타자를 사로잡는 공감의 무엇을 생산해 낸다면 오르가즘처럼 짜릿한 쾌락의 순간일지 모르겠다. 저자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은 책에 영혼이 담긴다는 철학으로부터 사유했다.  

다비드의 타자를 위한 삶은 목적과 방향을 혼동한다.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는 얄궂은 운명에 유린당하고 고통당하는 나약한 순간을 통해 천사인지 악마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유혹은 너무도 인간적이다. 여기에 몽환적이고 암울한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배열하며 연결하는 서사구조는 인간 내면 심연의 원초적인 모습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기에 적합해 보인다. 책에 담긴 사유의 바다가 영혼을 지배하고 삶을 통제하는 판도라 상자가 된다는 발상이 전환이 신선하다.

이처럼 초자연적이고 종교적인 색채가 첨가된 작품들은 인간의 본질에 초점을 맞추어 탐구하는 공통점이 있다. <파우스트>의 괴테가 그랬듯 <천사와 악마>의 댄 브라운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과 매우 근접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유혹의 손길을 뻗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대천사가 하느님의 명을 거역하고 반란을 일으켜 지옥으로 떨어졌다는 루시퍼의 출현과 일맥상통한다. 루시퍼를 통해 인간이 접할 수 있는 모든 운명의 순간을 나선형 구조로 배열하고 그 속에서 번민하고 집착하는 인간의 욕망과 고뇌를 드려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비드를 둘러싼 크리스티나, 이사벨라로 묶인 애정관계 또한 이야기의 생동감을 불어 넣는 좋은 재료이자 기교적 장치다. 또한 우호적인 인물들을 배치하고 뜻밖의 인물의 등장과 출현을 통해 반전의 효과를 기대하는 구조는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하지만 반전의 순간이 호락호락 예측가능하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마치 덫에 걸린 것처럼 막다른 골목에 몰린 외길을 가는 확신의 순간을 불측의 미로 속으로 밀어 버리는 것이 진정으로 예상을 뒤엎는 반전이지 않겠는가. 하여 섣부른 추리로 예단하다 작가의 필력에 농락당하지 마시기를.  

어스름한 밤 혼자 읽으면 괴괴함에 오싹해진다. 칠흑의 어둠 저편으로 누군가가 바라보며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릴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힌다. 마치 저주받은 도시로부터 날아든 천사의 밀랍이 봉인된 편지로부터의 유혹이 시간을 마비시키는 팜므파탈의 매혹과도 같다. 이로써 우리는 다비드를 따라 투영되는 세계가 현실처럼 쏟아지고 시리도록 차가운 어둠의 공포가 대기를 얼게 만든다. 밤늦은 시각 이 책을 읽지 마시라. 검은 피처럼 퍼지는 무서움에 몸서리치는 공포가 엄습할 것이며 뜬눈으로 지새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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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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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는 일견 섬뜩한 말이다. 지극히 은유적 표현임에도 드러난 상태는 두렵기 그지없다. 자유롭지 못하다면 죽음보다 못하다는 감추어진 의미를 차치하고라도 직설적이고 자극적이기까지 하다. 읽는 내내 편하질 못하다. 야릇하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이것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마음 한편 애써 누른 저릿한 동통이 동반해 온다. 낯익지 않은 정경으로부터 오는 혼동일까? 아니면 단단한 껍질에 갇힌 불편한 진실일까?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다양한 상념에 물들게 한다. 무엇을 그리고 어떤 것을 담았기에 이토록 절절할까하는 의구심부터 성큼성큼 내지르게 만든다. 두 남자, 이수명과 류승민의 기막힌 삶. 그들은 인간으로부터 절절히 미치고 붙들려 갇혀서 제대로 미쳐 버렸다. 양극단을 오고 가는 곡예단과 같은 삶에 피멍든 20대 끊어 넘치는 열정의 영혼이다. 그런데 그들은 존재감이 상실된 무형의 인간이자 잉여인간이다. 인간이 인간을 가둘 작위적인 명분에 의해 분류된 수리희망병원 인내반 아무개에 지나지 않았다.


저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그들을 통해 자유를 향한 원초적인 오랜 물음에 답을 구하고자 하였다. 익숙지 않은 배경을 무대로 도두라진 상호대비감을 극대화하였으며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효과를 기대하였다. 이야기는 씨줄과 날줄이 맞물려 돌아가 듯 치밀한 구성과 전개로 진하게 우려 낸 감동을 자아낸다. 한 번에 몰아치는 호흡이 아닌 여러 번에 나누어 걸친 호흡과 템포는 절정으로 향할수록 거침없이 달뜬다. 그들에게 자유의 본질을 구하는 순간부터 예견된 신념을 향한 여정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다. 아니 어쩌면 여유를 잃어 버렸는지 모른다. 이미 승민과 수명의 만남 그 순간부터 운명처럼 드리워진 삶의 무게였는지 모른다.


더욱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들이 선 곳은 정신병원이다. 그들을 둘러 싼 군상들 또한 정상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나눈 편견에 불과했다. 오히려 위선도 가식도 없는 순수함에 더 가까운지 모른다. 단지 마음이 아플 뿐이지 다른 것은 어떤 것도 없다. 우리는 살기 위해 자유를 조금씩 양보하고 내어 준다. 그 속에서 정체성의 현기증에 타협하고 순응하며 언제 있을지 모를 미래의 그날을 갈구하며 그렇게 영혼을 갉아 먹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이른바 정신병자다. 심각한 공황장애와 적응장애로 진단된 부적응자다. 그들은 정상의 삶을 살지 않았음에도 너무도 정상에 가깝다. 타자로부터 빼앗긴 자유의 항거는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행복추구를 위한 몸부림이며 처절함이다. 수명과 승민을 이렇게 만든 현실은 진정한 애정과 교감이 결핍된 소통과 공존의 부재에서부터다. 이해와 신뢰가 절실하였음에도 그들에게는 사치이며 벼랑 끝으로 밀려 나기에 급했다.


극단의 우울증을 앓던 어머니를 유기하여 죽음으로 던진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명의 삶에 사생아로 태어나 이복형제들과의 유산다툼에 휘말린 승민의 기구한 운명은 자신을 지배하던 통제된 삶의 전형이다. 사실 정신병원은 눅진하고 괴기스러운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제 아무리 좋게 봐 주려해도 꺼림칙한 것이 사실이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상이 단조롭지 못하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인간이 만든 전체를 가르는 구분에 우리는 편견의 벽을 쌓고 사는지 모른다. 그들에게 단순히 장애는 정신질환이다. 몸이 아파 병원에서 치료를 받듯 정신이 병들고 힘든 상태다. 하지만 엄청난 충격에 의해 입은 내상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묻히기 쉬우며 다름을 식별할 수 없다. 편견이 생산한 착각이자 오만이다. 오만은 구속을 합리화하고 폭력에 무뎌지게 한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그들도 인간임을 뒤늦은 깨우침을 얻는다. 정신지체를 가진 한이와 지은이를 통해 인간의 기본권마저 철저히 유린당한 영혼에 분개하고 생니를 송두리째 뽑아 내 버리는 것으로 울분을 토로하는 한이의 절규에 인간을 혐오하게 한다. 누군가에게 군림한다는 것은 영혼마저 앗아 오는 것으로 인간을 오염시키는 오랜 망령이다. 이처럼 수리정신병원에 수감된 영혼들은 구구절절한 사연을 하나쯤은 간직한 힘없는 영혼들이다.


저자의 경험칙에서 불러 온 그들을 통해 차별을 목도하고 수명과 승민을 통해 자유를 보았다. 청춘에게 받치는 거창한 헌사가 아니라도 당당히 나설 명분을 얻는다. 인간의 내밀한 본성을 치밀하게 소환해 낸 저자의 필력이 대단하다. 비열, 외면, 위선, 두려움의 원형은 껍질에 불과하며 세상과 맞서기 위한 수단에 불과함을 이토록 멋지게 담아 낸 그녀의 역량에 차재의 행보가 기대된다.


말랑말랑 굳어 버린 그것은 바로 자유를 향한 치열한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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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원리 - 스마트버전
차동엽 지음, 김복태 그림 / 동이(위즈앤비즈)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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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자기계발은 마음으로부터의 시작이다. 내가 변화되지 않고는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 제 아무리 위대한 꿈과 비전도 사소한 하나의 행동에서부터 출발이다. 나 스스로 긍정을 품고 변화를 주도한다면 성공의 티켓을 움켜쥐게 된다. 이러한 변화의 모토가 원리를 만들고 삶을 자극하는 동기는 될지언정 의식과 습관을 바꾸지 않고는 사상누각(沙上閣)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의식의 변화는 근본적인 개혁이다. 하지만 변화의 시작이 쉽지만은 않은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도움을 받고 그 속에서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 책 <무지개 원리>는 입소문을 타고 독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시중의 자기계발서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 현실임을 감안할 때 대단한 성과다. 아마도 차동엽 신부의 진실한 믿음과 그만의 철학이 오롯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식 정서에 맞아 떨어졌다는 것도 이 책을 성공으로 이끈 견인차다. 이처럼 대중의 반향을 일으키고 변화의 물꼬를 튼 이 책의 핵심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무지개 원리로 대변되는 7가지 원리로만 설명하기는 더욱 어렵다.

사실 이 책과 대등한 위치에서 인기를 이어가는 론다 번의 <시크릿>이나 박지성 작가의 <꿈꾸는 다락방>처럼 그 얼개나 형태는 얼추 비슷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믿음으로부터의 자기변화가 세상을 바꾸고 꿈을 이루게 되며 성공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러한 본질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는 공통분모에 있다. 하지만 이 책이 그들과 다른 커다란 차이점은 우리의 의식과 태도를 지배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실제 성공의 주된 요인 중 하나인 긍정의 힘은 이제 식상한 키워드인지 모른다. 부정적 사고를 극복하고 역경을 뛰어 넘는 행동의 힘이 바로 긍정이다. 이러한 긍정의 힘에 대한 중요성은 보편타당한 원칙이다. 그래서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기에 변하지 않는 초석이 된다. 사고의 경직은 성공의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고 도전정신을 꺾어 버리는 암초와 같다. 그러므로 변화의 시발점은 긍정으로부터다.(무지개 원리 1.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지혜는 험난한 인생을 항해하는 도구인 등불과 같다. 난관을 돌파하고 단점을 장점으로 체질개선을 하는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지혜는 교만과 자만을 경계해야 한다. 외우고 익혀 지식으로 단순히 쌓는 것과 지혜로 만드는 것은 천양지차다. 무엇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더불어 사는 상호공존의 지혜의 기준이기 때문이다.(무지개 원리 2. 지혜의 씨앗을 뿌려라.)

이렇게 형성된 좌뇌의 숨은 지성계발을 통해 발견한 진리를 토대로 저자는 우뇌의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영역을 개발하기를 주문한다. 바로 목적을 실현하는 꿈을 품으라는 원리로 직결된다 하겠다. 꿈은 비전이며 미래의 의지이다.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천이 바로 미래의 꿈이다. 꿈은 지속적이며 생생하게 시각화를 통해서 가능하다. 이러한 원리는 확대 재상산되며 가치를 이루는 근본이 된다. 끌어당기고 상응하고 소통하는 것의 의미 또한 신념의 확고한 의지표현이다.(무지개 원리 3. 꿈을 품으라.)

의지가 행동의 밑바탕이 되는 꿈을 세우는 것이라면 믿음은 결과를 돕는 행위다.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은 신념을 재충전하고 자극하는 자양분이다. 저자는 확신을 위한 행동으로 3P를 통한 긍정적 사고를 요구한다. 즉, 긍정적(Positive)이고 현재형(Present)이며 개인적(Personal)이어야 한다.([p.134) 그러나, 타인을 위한 행위가 아닌 나를 위한 행위여야 한다. 충전된 기대감은 변화를 주도하는 新에너지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무지개 원리 4. 성취를 믿으라.)

이 책에서 소개된 <탈무드>의 명언 중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과 ’가장 선한 것’으로 인간의 ’혀’를 꼽는다. 말은 행동을 지배하고 인격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부정의 언어보다 긍정의 언어를 선호해야만 하는 이유는 지극히 간명하다. 내뱉은 말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 우리은 이러한 부정적 영향을 간과하고 묵살하는 경향이 크다. 이미 발생한 결과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고 과거에 집착하는 현실은 미래를 바꾸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안다는 것과 실천한다는 것의 차이는 실로 엄청나다.(무지개 원리 5. 말을 다스리라.)

생각이 말을 바꾸고 말이 행동을 바꾸고 행동이 습관을 바꾸고 습관이 인격이 된다고 하는 무지개 원리 전도사 차동엽 신부의 말은 가히 촌철살인이다.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어찌 보면 모든 것을 바꾸는 계기이자 시초인지 모른다. 인간이 습관을 들이기에는 대개 21일이 걸리고 습관으로 정착하는 데는 100일이 걸린다고 한다. 이처럼 생각의 파급효과는 어떻게 사느냐의 방식으로 집중됨을 의미한다.(무지개 원리 6. 습관을 길들이라.)

아울러 이 책은 인생의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는 근원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가치를 정립하고 목적을 분명하게 세울 것을 바라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보면 성공의 키워드가 확고한 믿음과 의지로부터 발현됨을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배양된 목적은 불굴의 의지와 실천으로 포기를 극복하는 시금석이기 때문이다.(무지개 원리 7.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이렇듯 의식의 전환을 통해 길러 낸 무지개 원리는 나약한 체질을 개선하고 변화시킨다. 더 나아가 꿈을 성취하고 성공으로 충만하는 긍정의 물결이 넘치기를 바란다. 동시에 항상 감사하는 자세로 더불어 사는 참다운 삶의 지혜를 깨닫기를 바란다. 이러한 공존의 세상은 우리 모두의 원대한 희망이자 진정한 목적이다. 저자가 고안해 내고 제시한 무지개 원리는 이제 그의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담대한 목표이자 행동지침이다. 분명한 것은 꿈을 이루는 모든 것의 첫걸음은 사소한 하나의 움직임에서 부터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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