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 - 다윈의 자연선택론과 적자생존의 비밀
프란츠 M. 부케티츠 지음, 이덕임 옮김 / 이가서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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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쟁이, 우리는 루저라고도 부른다. 이와 같은 믿음은 인간의 오랜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그것은 불확실한 현실에 대한 그림자와 같다. 누구나 신념으로부터 오는 용기의 순간을 겪는다. 그 과정을 어떻게 수용하고 극복하느냐에 따라 선택의 방향은 바뀐다. 비열할 것인가 아니면 용감할 것인가의 선택이다. 이러한 믿음은 관념이 되었고 부동의 가치로 작용한다.



비겁함의 그 수치스러움이 세상을 지배한다면? 쉽게 와 닿지 않는 거리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생경한 주장을 하는 프린츠 M. 부케티츠의 <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호기심의 촉수를 자극한다. 그는 빈 대학교의 생물과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진화ㆍ인지생물과학의 전문가다. 그가 펴낸 이 책의 골자가 제목에서 드러나듯 소위 겁쟁이예찬론 정도 되지 않을까. 겁쟁이에 대한 새로운 시선, 그 패러다임을 풀어 나가는 이 책은 의구로 시작해 동감으로 변한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진화의 웅장한 프레임을 거스르지는 못한다. 자연계의 험난한 투쟁의 과정을 뚫고 반복과 학습의 쳇바퀴를 진화라는 물결을 흐르고 또 흐른다. 이러한 과정에서 살아 남은 진화의 법칙, 적자생존이라고 한다. 환경에 친밀하고 빠르게 적응하고 뒤쳐진 종은 자연도태된다는 H. 스펜서의 이론이다. 때로는 돌연변이라고 하지만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경제적 효용성의 결과다.



그런데,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더 정확하게 따져 보면 판을 보는 관점의 차이다. 적자適者로 비유되는 종은 강하고 빠르다는 현상에만 치우쳤지 평균적인 수명이 긴것과는 대체로 무관하다.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라는 혁신적인 관념의 시작이다. 살아남은 동물은 어떤 의미에서 생존에 유리한 특별한 재능을 획득했다는 논거다. 실제 동물의 세계에 거짓말과 속임수, 기만과 조작이 만연한다는 사실은 새로울 것이 없다. 이는 윤리적 잣대나 감정의 기준으로 바라볼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세계로 국한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인간은 윤리적이고 감정의 지배를 받는 호모 사피엔스다. 윤리는 도덕적 관념을 낳고 기만과 거짓을 배척한다. 이러한 잣대는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과 진화의 상관관계는 더 복잡하고 미묘해진다. 인간의 유전자에 기록된 그 틀은 고정된 부동의 역사인지 모른다.



문제는 윤리의 벽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에 있다. 저자가 밝혔듯 회의적인 시각을 멈출 수 없는 이유 또한 비겁함의 옹호를 차치하고라도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이 스스로 고립된 섬처럼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오늘날의 사회진화의 영향도 물론있겠거니와 감정의 기준점이 허락하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비겁한 겁쟁이가 어떻게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개인적 이기주의자는 정치적 조직 또는 이기적인 단체의 이합 형태와 자기 사이에 놓인 분명한 선을 구분짓고 다양한 자유주의를 사랑하고 추상적인 개념에 자신을 구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논거의 핵심이다.(P-228)



분명한 것은 자아우선주의와 배타적 감정의 충돌에서 오는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것이다. 때로는 자아우선이 사회문화적 동력이 될 것이고 혁신을 구동하는 매개가 된다는 의미겠다. 그러나 이기적 행태와의 구분은 중요하다. 현재 우리 사회의 문화적 병리현상은 심각하다. 대중매체와 매개된 광고의 힘은 자기중심적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자텔베르거의 이념처럼 '신봉건주의의 범람' 또는 '신병리학적 자본주의 현상'의 욕망의 뒤틀린 깨달음 현상을 맛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도덕적 개인주의자에 대한 패러다임을 달리 쓰고자 한다. 그들이 개인적 이익을 중요시하는 반면 다른 사람도 그 자신의 이익을 따른다는 상호연관성을 수용한다. 또한 그들은 자신만의 개인적 삶의 방식을 선호하며 '자아발전'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사회에 통용되는 법을 따른다. 그 속에는 타인을 배려하고 통념의 가치를 이끄는 행동규범으로서의 선이 존재한다. 그들에게서 삶은 목적에 충실한 작은 물결에 미동하지 않는 의연함을 작은 모욕을 물리치는 안정된 삶을 견지한다.



이와 같이 저자의 겁쟁이예찬은 오랜 통찰과 고민의 흔적이 빗은 결과물이다. 그가 이론이 생경하고 낯선 변방의 목소리를 대변하지만 그 발상의 전환은 신선한 자극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새로운 방식이나 견해를 학계에 보고한다는 것은 오히려 보수의 고착화된 사고를 허무는 계기가 된다. 그의 도덕적 근본바탕에 버무려진 진화의 패러다임, 곱씹어 볼 주제다.



비겁자란 여러 상황 속에서 숨거나 도망쳐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들이며 용기를 증명하려 들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가능한 한 오래 살아남으려 하며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며 자신이 방해받거나 위협받지 않는 한 타인에게 적대감을 품는 일이 없으며 국가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그에 대한 보복조차 묵묵히 감수하며 그 결과 세속에서 물러난 삶을 사는 사람이다.(p-239)



물론 도덕적 이념이 바탕이 되지 못하다면 한낱 겁쟁이를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선택의 순간을 지배하던 이념의 허구 앞에서 애써 외면한 숨겨진 가치를 발견한 것과 같다. 쉽게 동요하지 않고 생물학적 생존경쟁의 불가피성을 떠올린다면 도덕적 개인주의와 윤리적 이기주의의 이상은 진화의 경계에서 중심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대안이 되지 않을까? 미덕이란 지속적인 실천이 모여 구축된 삶의 태도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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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1 07: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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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1 08: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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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자라는 집 - 임형남.노은주의 건축 진경
임형남.노은주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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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자기 자신의 실현이다. 집은 자기 손으로 지어야 한다. 건축가는 집주인의 이야기를 정리해 주는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p-285)




집은 목적에 따라 그 모양이 변한다. 공간에 담긴 관념은 거주보다는 소유의 양립에 우선한다. 그것은 경제적 메커니즘에 따라 대차대조표상 이해득실이 갈린다는 의미다. 투자라는 가치는 거주의 만족한계선마저 행복의 질감마저 왜곡한다. 틀에 박힌 공동주택, 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행복을 끌어 올리는 일일까? 자산을 소유하고 가치를 불리는 일이 자유를 희생시키는 기회비용보다 높을까?




우리는 해답을 안다. 대안이 없다는 현실적인 명분에 의해 합리화라는 포장재로 휘감고 있는지 모른다. 땅을 밟고 햇살이 가득 퍼지는 초라한 슬래브 지붕집일지라도 정서적 안정이 가득 고여 행복으로 발했다. 그 시절, 누구나 그랬고 딱히 나을 것 없던 그런 풍경이었다. 하지만 풍요는 왜곡된 가치변형을 촉발하였으며 그것은 개인에 대한 울타리를 켜켜이 세우는 출발점이 되었다. 가난과의 결별, 편리한 공간적 자유는 수요를 달구는 구심점이 되기에 충분했음이다.




이러한 가치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공동주거형태가 발달한 나라, 대한민국은 부동산에 미쳤다. 마음속 노스탤지어가 자라는 공간의 개념은 이상향에서만 존재하는 한낱 꿈으로 전락했다. 도태를 부르는 냉혹한 현실을 무시하기에는 상실감이 너무 무겁다. 나 또한 그 대열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욕망의 바보로 산다. 이 책의 저자 임형남, 노은주 부부가 직시하는 도시공간의 산유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저 꿈으로만 지었다 허물기를 반복하는 공상가에 불과하다.




실제 집에 대한 피로감은 상당하다. 엇비슷한 출발선상에서 취업을 하고 돈을 모으고 청약저축에 가입해서 어마 무시한 경쟁률을 뚫고 분양에 성공하면 편리에 결부된 이 시대가 희망하는 공간으로 입성하는 기회를 부여받는 그 왜곡된 순환과정에서 오는 피로감. 집이 주거로서의 가치보다 투자로서의 가치가 우선시되는 현상에서 집을 조망한다는 것은 암실에 들어 앉아 사물을 보는 것과 같음이다. 여기에는 경쟁이라는 성장의 미덕이 작용했음은 분명하다. 경쟁은 앞 서 나가야 하기에 고독은 그림자처럼 늘어진다. 악순환의 고리는 집의 패러다임을 왜곡하는 요인이 된 현실, 원인 없는 결과 없음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발산하는 저자의 생각이 빚어 만든 청량감은 상쾌한 전망대에 올라 세상을 품는 그것과 같다. 밀어내기에 급급했던 집에 대한 바른 생각, 회복과 치유의 힘이 그득하다. 이 땅 위에 집을 짓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외양이 바뀌었을지라도 집은 사람을 닮고 자연을 품었다. 이 땅 곳곳의 살림집이든 절집이든 인간과 융합되고 조화를 이룬다. 그것으로 인해 집은 나무처럼 사람과 함께 더불어 자라고 추억의 부산물로 정서의 층위를 단단하게 붙드는 주춧돌이 되었을 테다.




가벼운 산문으로 시작해 집을 설계하고 다듬는 동안 스며든 관념의 실체를 맛깔난 언어로 풀어내는 글맛은 단정한 고택처럼 살갑다. 시간의 속도에 비례해 집이 사람을 향한다는 부부의 생각은 빛과 공간이 만나 잘 배합된 묵향처럼 은은하게 피어오른다. 관계와 관계 속에서 마찰된 삶의 불확실한 순간의 화학작용을 희석하고 또 순화한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물결의 흐름을 헤아리는 자정의 시간처럼 피로는 소멸된다.




고민과 명상의 기록이 부부의 생각으로 시작했으나 끝은 함께 맺어가는 개별의 시간을 제공한다. 시간과 존재, 성장의 맞물려 돌아가는 얼개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들, 아니 그 자리에 있었으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막연하게 비롯된 불안감의 정체를 위안 받고 매몰되어 희미해진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작가가 굳이 상산마을 김 선생의 집짓기의 흐름을 보여 준 것도 같은 경계에서 와 닿는다. 집을 설계하고 조율하고 소통하는 동안 우리네 정서에 담긴 소중한 삶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작가는 집을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체로 조망한다. 그 속에 시간의 윤활제가 날 서고 각진 부분을 다듬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상생의 의미를 부여한다.




최근 땅콩주택이 입소문을 바람처럼 타고 번진다고 한다. 땅콩주택은 말 그대로 한 필지의 땅 위에 두 채의 집을 지어 나누어 생활하는 신개념주택이다. 마당이 있고 같은 공간 속에 가족 구성원 각자의 삶이 융화되고 매개하는 휴식의 개념이 우선인 인간다운 집을 표방한다. 비록 굴절된 가치판단으로 인해 그 진정한 의미를 훼손당하고 폄훼하는 시선이 있기는 하지만 집 본연의 가치를 복원하는 의미 있는 일이다. 이렇게 모여 마을을 이루고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세포분열처럼 건강한 신호이며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갈등의 문제를 푸는 하나의 대안점이 되리라 본다.




이들 부부가 제시하는 잘 지은 집은 나무처럼 자라고 들꽃처럼 피어나는 집이란다.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헛된 욕망이 절로 소멸되는 자연스럽고 맵시 있고 건강한 그런 집이다. 부부가 들려주는 집이야기에 홀릭처럼 빠져든다. 집은 집다워야 한다는 그 다움에 희망을 기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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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6-15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어제 신랑이 땅콩 주택 아느냐고 묻더군요.
모른다 하니까 얼마나 잘난체를 하면서 설명해주는지... ^^

예전에 정말 집은 돈벌이 수단이다 라는 생각에 쫒겨 살았어요. 지금 사는 집도
그렇게 구입했죠. 지금 살기 시작한지 6년 되었는데, 돈을 생각한다면 지금 이사하는게 맞겠죠.
하지만 한 곳에서 정착한다는게 이렇게 좋은지 몰랐어요. 그리고 내 집이라는 생각으로
베란다를 정글로 만든데다 엄청난 책 때문에, 평생 살아야할 거 같아요. ㅎㅎ

穀雨(곡우) 2011-06-17 09:15   좋아요 0 | URL
베란다가 정글일정도라면 집이 푸름으로 상큼하겠습니다. 전 정성이 부족해서인지
금세 시들시들해져 남아 나는 식물이 없답니다.ㅠ.ㅠ
해서 잘 키운 화초가 많은 집은 늘 선망의 대상이랍니다.^^
 

감동은 사소함으로부터 온다. 기대를 잔뜩 머금은 감동은 부피만큼 확장된 몸짓 탓에 되레 허무해진다. 부지불식간에 찾아드는 감동의 순간, 존재 위에서 피어나는 말간 꽃처럼 향기롭다. 때로는 그것이 미미한 몸짓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그것이 행복을 향한 신호임을 안다. 감동의 자장을 일으키는 신호는 삶의 모든 곳에 퍼져 있다. 그 크기나 밀도는 다르지만 전해 오는 떨림은 엇비슷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감동을 어떻게 낚아채느냐의 문제, 마음을 다루는 자세에 있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 물질임에도 그 모양이나 질감이 천양지차로 변한다.

 

나는 마음이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소프트웨어라고 본다. 마음이 공명하지 않으면 감동은 사치에 불과하다. 아이의 맑게 갠 틈 사이로 피어나는 웃음 언저리에서도 대하는 마음은 다르다. 그곳에 삶의 던적스러움이 포개져 덧칠을 한다면 마음은 절로 암울해질 테고 때로는 그것이 삶을 추동하고 일으키는 커다란 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어떤 상태에 있느냐의 문제 이전, 어떻게 마음을 다루느냐의 문제겠다.

 

올 봄 우리 가족에게는 새 아이가 찾아 왔다. 연년생으로 키워 내 초등학교에 입학한 큰 아이와  이제 태어 난 아이와의 터울은 기다면 길다. 아이와 함께 한 살가운 시간 동안 경험이 부족해서 혹은 낯설어서 넘겨 버렸던 그 아쉬웠던 감동의 편린들이 지금 다시금 새록새록 하다. 나는 행복 위를 걷는다. 행복이 사소한 감동에서 나와 모여 이루어 진 것임을 안다. 그 감동의 시발점은 배려와 믿음, 사랑에서 기인한다. 세 아이가 쏟아 내는 믿음의 목소리는 맑고 고운 청음처럼 순결하다. 끊임없이 발산하는 감동 에너지의 고갱이인 셈이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이자 감동을 유인하는 행복의 전령이다. 이것은 모든 보편적인 믿음에 근접하는 명제에 가깝다.

 

이처럼 감동을 조련하는 방식은 피크 앤 밸리, 굴곡의 협곡을 걸어가는 다리와 같다. 삶의 길 위에 매달린 그 아슬아슬한 다리 위에서 맛 볼 수 있는 달콤한 부표는 바로 감동의 열매다. 그래서 힘들고 지칠 때 퍼져 오는 위로의 열매는 단단한 힘이 되는 충전재가 된다. 하지만 마음을 조련하기란 매우 까다롭다. 감동이 추상적인 언어로 기록되듯 마음 또한 형태를 알 수 없다. 부단히 마음을 수련하는 이유 또한 그것이다. 나는 마음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탐욕이라 본다. 탐욕은 있는 상태를 넘어 선 욕망이 잉태한 부산물이다. 나는 아이를 위해 더 나은 환경, 조건을 바란다. 결국 아이를 위한 수고는 뭉개지고 얄팍한 상술에 뒤엉킨 물욕만 남는다. 이것과 저것의 재고 견주는 시간을 비교 속에 흘려보내고 나면 돌아오는 것은 실망뿐이다. 더 갖지 못 한 것에 대한 불만, 더 누릴 수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나는 마음이 빚어 낸 이러한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목적이야 어떻든 그 과정을 위해 수단을 구실화해서는 안 된다. 이럴 때, 나는 사소한 감동의 순간을 소환해 내어 마음을 치환하는 길라잡이로 삼는다. 준비 없이 셔터를 누르고 띄워 본 미소가 숨 쉬는 가족사진, 꼬물거리는 손으로 비뚤비뚤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 오는 정성이 가득한 편지, 어디론가 사라진 셔츠의 단추를 어느새 달아 놓은 아내의 손길에서 감동은 춤을 춘다. 비록 나는 감동의 순간을 자주 잊는 망각의 덫에 씌어 있지만 그 순간은 추억이라는 앨범을 통해 퇴색되지 않는 불멸함이 있다. 만약 이러한 모든 사소한 것들이 소멸되어 사라진다면 삶은 의미 없는 순간의 연속이리라.

 

감동은 마음을 움직이는 그 행위를 위한 선행조건인 배려가 토양이 된다. 배려는 믿음과 사랑을 자양분 삼아 무럭무럭 기쁨과 환희의 순간을, 깊은 감동을 자아 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나를 위해 의심 없이 믿어 줄 가족이 있는 그 자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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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5 10: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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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5 15: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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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6-15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서 잘 크고 있나요?
뒤늦은 막내가 너무 이쁘신가봐요.

저는 아이가 어릴 때는 괜찮았는데, 초등학교 5학년으로 사춘기 증상이 보이기 시작하니
불안이 스멀스멀 몰려옵니다. 그러게요, 불안에서 자유스러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네, 곡우님의 평화로운 가족 그림이 그려져서........ 저도 편안합니다.

穀雨(곡우) 2011-06-17 09:16   좋아요 0 | URL
ㅋㅋㅋ 너무 이쁘다는 표현보다 더 더 더...^^(오버했습니다..^^)
이 아이로 인해 많은 것이 변하고 흐름도 변했습니다. 약간의 적응혼란이
있었지만 지금은 무탈하게 잘 흘러 가고 있습니다.
 

한 동안 세파에 시달렸다. 읽기만 하고 토해 내질 못했으니 응어리가 단단해 이물감마저 든다. 소통할 수 없는 것과의 불편한 조우, 어색함은 독버섯처럼 자란다. 모르긴 몰라도 괜실히 날씨탓으로 내 몬다.

모든 것이 다 귀찮고 무료할 때가 있다. 힘듦이 없어서도 아니겠고 배 부른 자의 소회라고 치부할 수 있겠으나 에너지가 고갈된 느낌이다. 서걱서걱 밟히는 바람에서도 불안은 쉽게 잠들지 않는다. 휴식을 취하라는 신호이겠지만 그것도 마음 먹은 대로 쉽게 되지 않는다.

달빛이 부서지듯 곱게 내려 앉은 간 밤, 물끄러미 자는 아이를 한참을 보았다. 창백한 달빛에 아이의 얼굴은 곱디 곱다. 막 피어 난 꽃봉오리처럼 투명하다. 이제 밤이 무섭다는 아이의 투정으로 작디 작은 손으로 목덜미를 꼭 끌어 안고 잠이 들었다. 무엇이 무서운 것인지 아이는 알까? 보이지 않는 헛것이 두렵다고 하지만 사실 보이는 것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까? 지나간 시간의 층위는 살인적인 등록금에, 생존을 위협당하는 불안정한 그 처절한 생존의 현장에 어찌 존재하지 않는 헛것과 비교하겠는가. 

잠 들지 못한 밤, 토해 내지 못한 날 것들에 불편했으며 침잠한 마음에 자조 섞인 위로를 보내 다, 어느 새 나인투파이브를 꿈 꾸는 지루한 안정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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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6-13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만 읽고 살고 싶어요......
제가 한동안 그랬었지요. 내 맘을 다독이는 수밖에요.
힘내세요. 님

穀雨(곡우) 2011-06-14 10:43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세실님의 응원에 불끈....^^
감사합니다. 그냥 마음이 그랬나 봅니다.

2011-06-13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4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3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4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1-06-14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만 읽고 살고 싶어요.2.

근데 있잖아요, 그런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해요.
아무것도 안 하고 책만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전 아무것도 안 하고 온전히 책만 읽을 수 있을까요?
주어진 시간의 귀중함 따위는 모르고...또 그렇게 그렇게 흘려보내게 되진 않을까요?

그냥...내가 책 읽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하면서 보내는 시간들도 중요하다는 최면이 필요했고,
그래서 몇 자 끄적거려 봅니다.

穀雨(곡우) 2011-06-15 09:17   좋아요 0 | URL
잘 지내셨어요...^^ 양철댁님...
멍석 깔아주고 모든 환경이 허락해도 그리 되지 않는 게 사람인가 봅니다.
바쁜 와중에 피어 오르는 바람이 더 절실하듯 그래야 하나 봅니다.
딜레마입니다. 딜레마....^^

blanca 2011-06-14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우님 돌아오셨군요. 이제는 곡우님의 정갈한 리뷰를 고대해 봅니다. 아이도 그간 많이 자랐겠지요.

穀雨(곡우) 2011-06-15 09:19   좋아요 0 | URL
돌아왔다는 기별이 엉성해도 진심으로 환대해 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여물어 가고 있습니다. 신기하고 또 신기합니다.
예전에 미처 몰랐던 세상입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 인생도처유상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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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에 대한 향수는 개인의 역사와 밀접하다. 나고 자란 산천의 얼이 담긴 강산의 생명은 이 땅 위에 숨 쉬고 살아가는 또 다른 의미가 된다. 그렇다. 역사란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시작된 작은 몸짓이 세월이라는 물질을 터전 삼아 피었다 지기를 반복한 흐름의 시간이다. 그러니 역사에 대한 인식은 알든 모르든 이미 우리의 얼에 새긴 정신적 지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유홍준 교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이처럼 살가운 이유도 그러하다. 처음 책이 출간된 1993년 그 해, 나는 미래를 포부 하던 청춘이었다. 선생의 간결한 글은 여태껏 알던 얕은 지식은 뭉개버리고 새롭게 쓰는 계기가 되었다. 깨닫기 위해 배운 것이 아닌 통과하기 위해 알아야 했던 그 모든 역사의 층위를 갈아엎어 버린 선생의 글은 명징했다. 제도권 교육이 형식의 구태에 포위당하고 명분에 허덕일 때, 선생의 답사기는 이 땅위에 태어난 사실에 자랑스럽게 만드는 중심이었다.

이제 다시 문화유산답사기 시즌2가 돌아왔다. 꼭 10년만의 귀환이다. 오래 묵힌 장일수록 맛은 더 진해진다는 진리처럼 이 땅의 문화를 관망하는 깊이가 더 깊어지고 우려진 기분이다. 봉숭아물처럼 어여쁘게 퍼진 글은 선생의 감성조각과 너무도 잘 배합되어 읽는 맛을 개운하게 해 준다. 누구나 한 번 쯤은 해 보았을 그 물음의 공통성을 어찌 그리도 잘 솎아 내고 다져 빚었는지, 실로 이것은 읽는 이의 축복이다. 진심이 없다면 해 낼 수 없는 선생의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리라.

책은 경복궁을 필두로 선생의 제2의 고향 부여를 정점으로 막을 내린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선생의 묵직한 가르침처럼 청맹과니에 불과했던 눈과 귀를 열리게 한다. 때로는 살랑대는 바람처럼, 때로는 정수리로 쏟아지는 햇살처럼 글은 완급을 조절하며 치환의 역사를 새롭게 쓴다. 버려졌거나 망각된 유산의 복원은 진실과 마주할 때 비로소 열린다. 그것은 근정전 앞마당에 박힌 박석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핍박에 의해 훼철되고 도륙에 의해 유린된 이 땅의 유구한 역사와 슬기로운 조상의 지혜와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선생의 이 책은 새롭게 쓴 역사교과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선생이 직접 경험하고 체득한 모든 역사의 기록이 연대기에만 사로잡힌 기형적인 현실의 허물을 벗는 시작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우리네 문화유산에 담긴 오묘한 진리를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로 풀이해 낸 선생의 시선이 애틋하게 다가온다. 유상수에는 구들장의 슬기나 구전되는 농사의 기술처럼 대대손손 이어져 온 선조의 지혜를 엿보게 하며 삶을 대하는 처세도 곁으로 배우게 된다. 길 위에서 만나고 연을 맺은 장인들의 숨결을 통해 그 옛날 그 자리에 새겨진 역사의 숨결을 더불어 깨닫는다.

아울러 선생의 글은 에세이를 쓰듯 편안하게 비뚤어지고 굳어 버린 생각의 우듬지를 교정해 준다. 이것은 문화재청장으로 재임하던 선생의 경력이 단단히 한 몫에 했으리라 본다. 문화재청장으로 재임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스미듯 용해시켜 유연하고 부드럽게 해 준다. 여기에 산천에 자생하는 나무, 풀, 꽃이야기는 재미있기도 하거니와 그 하나하나에 담긴 거룩한 뜻에 감복하게 된다. 그 과정이 명쾌하기도 하지만 놓치기 쉬운 생각을 익숙하게 펼쳐 놓는 단정함이 알알이 배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이 단순한 기행문과는 격이 다른 결이 곱고 바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우리의 역사를 회고할 때 아픈 기억의 시간을 떠올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일제강점의 시간 동안 우리의 문화는 철저하게 파괴되고 손실되었다. 그것은 도시의 형태를 바꾸고 삶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역사의 본질은 변화시키지 못했다. 우리의 역사가 그네들의 조각배 같은 역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생래적으로 강인했던 이유는 반듯한 정신, 즉 얼에 있다. 선생의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건만 대강의 모양새만으로 조상의 슬기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신묘해서도 아니고 나름의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선생이 다녀오고 밟은 영암사 쌍사자 석등의 우뚝함에 서 관망할 수 있다. 은진미륵으로 불리는 관촉사의 기이한 4등신의 불상에서도 매 한가지다.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2010.9.1. 김정봉] 

또 다른 함의는 선조들의 수려한 건축, 토목, 조각술에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모든 건축물은 건물로서의 단순한 덩어리가 아닌 자연과 조화를 이룬 예술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이것은 비단 궁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살림집의 역사에도 그 하모니가 단아하게 피어난다. 선생이 귀향한 부여의 반교리 폐허를 허물고 지은 휴휴당의 세칸집이 그것과 같다. 휴휴당에 머물며 농촌의 고단한 일상 속에 깃든 풍광을 사색하는 것은 경계의 안으로 들어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 속에서 매몰된 돌담길을 복원하고 우리네 정서를 회복하는 치유의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매한 시간이다. 

이처럼 풍성한 우리의 역사에 담긴 시각을 넓힌 선생의 책은 부족함이 없다. 선생의 글로 인해 거창에 가면 아픔의 학살현장 외에도 동계고택을 떠올리게 될 것이고 순천 선암사에 들러 유쾌한 해우소에 들러 근심 한 자락 풀어 낼 것 같다. 또 낙화암의 풍광에서 더 이상 영욕의 백제의 의자왕과 삼천궁녀를 떠 올리지 않을 테고 그 너머의 역사를 떠올리지 싶다. 따라서 답사는 아는 것에 더해 숨어 있던 세상과 조우하는 신실한 기쁨이 될 테다. 

한 시대, 한 민족의 문화는 건축이라는 나무에 미술이라는 꽃으로 남게 된다.(p.366)

다시 문화유산을 생각해 본다. 선생의 지기 이강승이 쓴 편지 한 꼭지에 소개된 "바람도 돌도 나무도 산수문전 같단다."에 깃든 의미처럼 다양한 문양과 형상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그 돋을새김 하나에 깎이고 패인 세월의 흔적을 따라 유구하게 흘렀던 그 정신이 오롯이 피어나지 않을까.

반갑다, 나의 문화유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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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011-05-12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 큼큼 .
 

穀雨(곡우) 2011-05-12 18:15   좋아요 0 | URL
책내음이라면 아주 좋아요. 선생님의 책.
길가에 핀 코스모스향이 날 것 같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