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기별을 안 지 꼭 39주만에
나에게 왔다.
아슬히 까물어지던 출산의 두려움을
살며시 밀쳐 내고 아이는 무사히 세상과
조우했다.
핏덩이에 뒤엉킨 아이, 뜨겁다.
홧홧한 또 하나의 새로운 우주가 이내
흐릿해진다. 목울대를 뻗어 조여오는
압박이 나를 타고 흐른다.
경이로운 이 순간, 나는 충만해진다.
아이가 발산하는 아우라에 오염된 모든 것이
사그라지고 순결의 중심으로 흡수된다.
사랑의 스펙트럼을 쪼갠다면 이곳이
시초이고 터전이겠다.
세상의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세파에
물든 고착된 경험의 찌꺼기가 만들어낸 불안이
찰나에 교차하고 이내 뭉개진다.
그래도 벅차다. 아이의 삶의 끈이 어디로 이어
지든 나는 응원할테다. 그것이 곧, 기쁨일테니...
p.s) 오래도록 자리를 비웠습니다. 아내의 출산이 임박하면서 손 갈 곳이 많아졌습니다. 태어난 아이외에도 이미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을 위해 아내의 자리를 메꿔야 했습니다. 비록 몸은 고단하고 피로감이 엄습하지만 무거워진 몸을 지탱하느라 고생한 아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사이 우리 사회에 엄마로서의 역할이 얼마나 무겁고 큰 지를 새삼 느껴봅니다. 큰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과 공개수업에 참여하면서 아빠의 자식교육에 대한 비협조적인 현실에 올바른 교육의 본령이 어디인지를 되묻게 되었습니다. 무엇답다는 그 무엇이 아이의 세계에는 기성세대의 그늘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았나 봅니다. 물론 습관이 하루 아침에 변하겠냐마는 신선한 자극은 변화를 위한 밑거름이라 믿어 봅니다.
그리고 아내는 걱정하여 주신 님들 덕분에 순산했습니다. 아이를 낳으려면 힘을 비축해야 된다는 지인들의 조언에 고기를 구워 먹고 그 저녁을 보낸 뒤 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늦은 밤 이미 시작된 진통에도 불구하고 몸을 씻고 새사람을 맞을 준비를 마친 후 1시간만에 순풍 건강한 여자아이를 낳았답니다. 그 덕에 아내는 통증을 없애주는 무통주사를 맞을 시기를 놓쳤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저의 시간은 다시 두 녀석의 젖먹이 시절로 회귀했습니다. 이제는 사용할 일이 없을 것 같아 나눠주고 처분해 버린 그 모든 아기용품이 낯설기만 합니다. 마트에 진열된 아기용품에 먼저 눈이 가고 아이의 울음소리에 예민해지는 걸 보면 경험이 참 중요한가 봅니다. 그래도 제가 하는 일이야 서툴고 덤덤해서 아내와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기쁘다는 말, 외에는 떠오르는 단어가 없습니다. 제어할 수 없이 흐르던 눈물에도 기쁨이 용해되어 있었나 봅니다. 가족은 나에게 힘이 되어준다는 명제는 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