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서 남녀의 구별없이 주어지는 동등한 기회와 여건은 남녀평등을 넘어 능력있는 여자들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각종 언론과 매스컴은 이른바 골드미스, 알파걸이라는 신조어들을 양산해내며 더이상 결혼이라는 제도가 현대여성의 최종 목적지가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우리들의 현실에 있어 골드미스와 알파걸은 그저 때를 놓친 노처녀들 아닐까. 그렇게 김경순의 소설 <21>은 골드미스도 알파걸도 아닌, 단지 나이만 먹은 경쟁력 없는 이력을 가진 서른넷 노처녀 지희의 연애담을 경쾌한 필치로 담아낸 연애소설이다. 70년대생인 지희는 자신이 성문화에 있어 60년대생처럼 순응적인 스타일도 아닌, 80년대생처럼 도전적이며 자유스럽지도 않은 중간에 끼인세대라고 생각한다. 마음만은 이후의 세대처럼 자유롭지만 행동은 여전히 이전 세대가 갖고 있는 웬지모를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전형적인 70년대생의 기질을 갖추었음을 한탄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연애담 역시 늘 실패의 연속일뿐 이었다. 대학때 적어도 자신은 시니컬하다고 생각했던 복학생 선배에게 뒤통수를 맞은 기억은 어쩌면 그 시작이었을 것이다. 10년만에 우연히 만나 늘 편안하게 생각하던 대학동창 H가 어느날 갑자기 여동생 지영의 애인이 되어 버리기까지 어쩌면 늘 누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남자만 좋아했던 그녀의 남모를 습관때문은 아니었을까. "진경은 이런 나를 보고 욕망을 욕망하는 스타일이라고 결론지었다. 욕망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욕망을 보고 욕망을 품는 스타일이라는 것 이다.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타자의 입장에서 인생을 사는 사람의 특징이란다." 그래서일까 지희의 직업은 아이러니하게도 섹스칼럼니스트이다. 적어도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가 그런 일을 한다면 사회적으로도 관심의 대상이 되겠지만 그녀의 칼럼이 연재되는 주간신문 <산업과 도시>는 그러한 경쟁력은 없어 보인다. 게다가 칼럼의 밑천이 되어야 할 연애의 경험조차 일천한 그녀이기에 늘 원고마감은 그녀에게 부담이다. 대신 현대인의 친근한 벗 인터넷이 그녀의 일의 원천이 되고 있고 어쨋든 그덕분에 그녀의 통장에도 꼬박꼬박 원고료가 들어오고 그것으로 그녀는 늘 만족해 할 뿐이다. 일찍 돌아가신 엄마 대신 동생 지영에게 엄마노릇 하려 노력했고 스스럼없이 재혼을 선택한 아버지를 편하게 하기 위해 대학을 졸업하면서 바로 독립했다. 어느샌가 동생이 합류하면서 둘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겠다던 동생은 지금 브래지어 디자이너가 되어 가끔 언니를 실험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지금은 동생의 애인이 되어버린 H는 가끔 그녀들의 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그때마다 모든 준비는 지희의 몫이다. 그것이 불편해 보여서였을까 지영이 어느날 소개팅을 주선한다. 피가 물보다 진하리라는 믿음을 갖고 한강이 보이는 분위기 좋고 값까지 싼 와인바에서 그를 만난다. 그녀의 표현을 빌자면 바야흐로 억만년만의 데이트가 시작된 것이다. 마과장이라는 그는 동생의 직속상관이기에 그 역시 브래지어 디자이너다. 여자 섹스칼럼니스트와 남자 브래지어 디자이너의 만남 누가 봐도 특이한 만남이다. 그와 만난 다음날 지희는 웬지 S를 떠올린다. 스물아홉에 만나 결혼까지 결심했던 그였지만 사소한 상품권 문제 때문에 그와 헤어지고 만다. 서로에게 지우지 못할 아픈 상흔만을 남긴채 그녀는 그렇게 서른을 넘겨버렸고 그는 결혼을 했다. 매너좋고 사람좋은 마과장과의 데이트가 이어질무렵 S에게서 연락이 온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그녀의 생일을 그만은 기억하고 있다. 그를 만났지만 지희는 이내 돌아서고 만다. 이제 그녀의 옆에는 그녀가 시마과장이라 부르는 남자가 생겼다. 하지만 난생 처음 해본 지영과 H 커플과의 더블 데이트는 그녀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 이제 그녀도 사랑을 찾아내려 하나보다. 전형적인 칙릿소설이긴 하지만 소설에는 이들 자매의 가족 이야기가 빠질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희에게 지영이 어떤 동생이었고 지영 역시 지희를 어떠한 언니로 여겼는지 서로가 알게 되는 것이 어쩌면 작가가 의도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게 어쩌면 먼 길을 돌아 그녀들은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작품의 제목인 '21'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맥주병 뚜껑의 톱니바퀴가 21개라는 것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소설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확연히 드러내지는 않는다. 실제 맥주병의 뚜껑이 21개인 것은 대단히 과학적인 계산에 의한 것임을 어느 방송에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과 이 작품을 연결시키기엔 조금은 난해해진다. 대신 S와 마지막으로 만난 날 둘의 대화가 아마도 그 힌트가 되진 않을까. 같은 숫자를 두고 누구나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때에 따라서 그것에 큰 의미를 둘 수도 있고, 그저 아무것도 아닌 그저 숫자에 불과한 기억일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엔 세상을 살아가는 정해진 일종의 법칙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물론 법으로 규정지어진 것도 있겠지만 보다 넓은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정해진 법규만으로 그 모든 것을 제어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법의 범주를 넘어 하나의 사회를 구성하는 그러한 규범과 틀은 어려서부터 배워온 학습의 결과이며 또한 너무나 당연시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세상을 정해진 수순대로만 살아간다면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언제나 변함없는 똑같은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변화를 두려워 한다. 그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도 그리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에 있어 언제나 세상을 변화시켜온 것은 소수의 혁신자들이었다. 물론 그들도 처음부터 세상을 바꾸려 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닥쳐올 미래가 결코 낙관적이지 않음을 알고 보다 적극적으로 맞선 사람들이었다. 이 책 <세상을 바꾼 비이성적인 사람들의 힘>은 오래되고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 탈피해 세상이 근본적으로 변화함을 깨닫고 세상의 경제와 문화를 변화시키는 '사회적 기업가'들을 소개하고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어떠한 힘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는지를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이성적인 사람은 자신을 세상에 적응시킨다. 하지만 비이성적인 사람은 고집스럽게 세상을 자신에게 적응시키려 한다. 그래서 모든 진보는 비이성적인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 이 책은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비이성적인 사람이라는 주제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현대적 개념에 맞추어 그들을 사회적 기업가로 귀결한다. 세상의 모든 기업의 존재목적은 재론의 여지 없이 '이윤추구'이다. 그것을 위해 모든 기업가들은 보다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상품으로 기업들은 시장에서 승부를 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논하는 사회적 기업가들은 이윤을 위한 거래보다 오히려 이상을 실현 시키는 것을 동기로 삼는다. 많은 사람들이 불확신한 미래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고 확신을 가지지 못하지만 이 책에 열거하는 사회적 기업가들은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다. 미래를 두려워하기보다는 미래를 자신에 맞춰 창조하려하고 그러한 여건들을 모아 투자와 자원을 유치하는 가장 좋은 방법들을 연구하려 한다. 그것이야말로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분명한 비전과 의사소통임을 그들은 잘알고 있기 때문이다. 책은 그러한 움직임들이 분명 새로운 패러다임이며 또한 거스를수 없는 대세임을 수많은 혁신적인 기업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의 가장 많은 부분을 들어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베어풋 칼리지, 루비콘, 아라빈드, 세켐 등은 이전의 경직된 사회에서는 분명 생각하기 힘든 도전이며 이윤 이라는 단하나의 목표만으로는 존재하기 힘든 기업형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한 새로운 사업모델들은 세상의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이끌어가는 선도적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책의 저자 존 엘킹턴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과 '문제의 해법을 찾아낼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통해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유일한 현실세계의 해법이 될수 있음을 거듭 이야기 한다. 일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교육, 건강 그리고 삶을 질 까지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그러한 발전적인 형태를 새로운 시대의 기업모델로 이 책은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러한 형태속에서 수익창출이 가능한 발전적 방향으로의 모색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한 수익형 모델은 그저 꿈이 아니라 실제 지금 현재도 세계곳곳에서 실현되고 증명되는 현실이기도 하다. 사회적 기업가와 그들이 이루어낸 실천적 모델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현재에도 우리가 아는 형태의 기업과 견주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오히려 미래를 내다보는 보다 긴 안목으로 볼때 오히려 발전 가능성과 수익성 모두에서 전통적 형태의 기업보다 더욱 강력한 경쟁력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세상을 선도하려 하는 사회적 기업가들의 목소리와 생각 그리고 성취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르는데 도움이 되길 희망한다고 말하고 있다. 실패와 좌절을 딛고 명백한 불가능에 도전하는 그들이야 말로 분명 세상을 바꾸려 노력하는 비이성적인 사람들일 것이다.
루스 베네딕트는 인류학이라는 분야가 아직 제대로 된 학문으로 정립하기 이전인 1919년에 인류학이라는 생소한 분야에 입문하게 된다. 베네딕트의 제자이기도 한 마거릿 미드가 쓴 그녀의 전기에 따르면 그녀가 인류학을 선택하게 된에는 여러가지 개인적인 배경이 작용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한 여러가지 주변 환경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문화의 조각들을 발견해 가면서 조금씩 인류학에 빠져들었고 마침내 문화적 가치의 상대성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녀는 자신의 첫 단행본으로 문화적 통합형태에 관한 책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원시문화든 현대문화든 문화연구 그 자체가 인류학이라는 범위 자체를 넘어서는 중요한 주제임을 알려주는 그녀의 대표작 <문화의 패턴>은 탄생하게 된다. 이 책 <문화의 패턴>은 세 개의 원시부족의 문화와 생활상의 전반적인 고찰을 통해 문화의 상대성과 문화가 개인의 성격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문화의 다양성과 함께 그러한 다양한 문화와 관습을 이해함으로서 당시 팽배하던 민족주의와 인종 우월주의를 비판하며 보다 합리적인 사회질서를 추진하자는 노력의 시작이기도 하다. 실제 이 책이 쓰여졌던 1934년은 1차 세계대전이후 강대국들의 민족주의가 심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그녀는 제도화된 문화의 특성들이 그 문화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개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심을 갖게 된다. 결국 그를 위해서 베네딕트는 인성의 확대(personality writ large)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것은 문화라는 자체가 여러 세대를 거쳐오면서 각 문화별로 이용 가능한 형태들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또한 버리기도 하며 그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개조하여 왔기에 그것은 지금 현재의 문화에서도 현재 그 문화속에 속해있는 사람들의 선택에 의해 문화는 진행된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것은 그녀에게 살아있는 문화를 연구하면서 그 문화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기능 그리고 제도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그녀는 원시부족을 연구하게 된 계기로 "단순한 문화의 객관적 사실들은, 복잡한 사회에서는 파악하기 까다롭고 잘 증명되지 않는 사회적 사실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문명사회보다는 조금이라도 덜 복잡한 원시 사회라는 인구집단내의 사상과 행동을 통해 문명 사회를 분석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렇게 선정된 세 개의 부족이 주니족, 도부족, 콰키우틀족이다. 이미 침입자들에 의해 대부분의 부족들이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을 잃어버렸지만 푸에블로의 주니족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인디언들과는 달리 아주 오래된 동질성의 역사를 갖고 있다. 모든 것을 그들 사회내의 제도화된 형태에 헌신하며 개인의 개성조차도 제도속에 복종시키는 그들의 관습은 서양문명의 시각으로는 분명 이해 하기 힘든 요소였을 것이다. 뉴기니의 도부족은 서로에게 적대적이며 언제나 배신이 난무하고 합법성이라는 서로에 대한 이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당연시되는 문화적 특성을 보여준다. 아메리카 북서 해안의 콰키우틀족은 경쟁자보다 자신이 우월해야 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 모든 서로간의 관계와 종교 심지어 불행한 사건까지도 재산의 분배와 파괴를 통해 이루어지는 우월성의 과시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문화자체가 결정되는 시스템을 가졌다. 세 부족의 생생한 문화에 대한 베네딕트의 서술은 요즈음 우리가 TV화면에서 만나는 다큐멘터리와는 또다른 신비감과 흥미를 안겨다 주기에 충분하다. 또한 지극히 단순하지만 그안에 여실히 보여지는 인간의 심리는 원시사회로 그저 치부할 수 만은 없는 내용들이기도 했다. 그러한 문화적 패턴들을 통해 인간의 잠재적 목적과 동기들을 그녀는 유추해 나간다. 문화를 깊이 인식하면 할수록 우리는 어떠한 문화적 상황에 있어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바탕에 어떠한 요인들이 있으며, 그것은 그동안 어떠한 지역적이고 인공적인 수많은 요소들이 더해져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해 좀더 쉽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문화와 그 울타리가 되는 사회와 함께 우리 개인이 떨어질 수 없는 실체라는 것 역시도 확인하게 된다. 결국 어떠한 개인이라도 자신이 속해있는 문화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어떠한 문화라도 역시 개개인의 공헌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책은 조금 지루하기도 하고 조금은 어렵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 베네딕트가 다룬 세 부족의 이야기로 인해 인해 책은 넘치는 생명력을 얻는다. 발간된지 70여년 이상이 지난 책이지만 사회속의 개개인이 그저 단순히 혼자가 아닌 사회속에서 문화를 진행시키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중국은 이미 세계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할 정도로 성장했고 그 발전 속도 역시 엄청난 인구가 가진 파워만큼이나 막강하기만 하다. 올해 여름 성공적으로 치러낸 올림픽은 그러한 그들의 꿈이 현실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웃나라로서 오랜동안 역사적 관계를 가져왔던 우리에게도 중국은 그저 많은 인구를 가진 잠재력의 나라가 아닌 본격적인 경제 파트너로서로 또한 우리가 개척해 나가야할 무한한 시장을 가진 나라이기도 하다. 중국을 대표하는 경제학자 량사오민 교수는 그러한 성장 일변도의 이면에 감추어진 중국이 당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를 이 책 <량사오민, 중국 경제를 말하다>를 통해 제기하고 있다. 또한 경제학자 답게 경제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보다 본질적으로 접근하여 경제학이 그저 대학이나 기업에서 다루는 계량적인 학문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삶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만드는 살아있는 학문임을 이야기하려 하고 있다. 경제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회적으로 만인의 행복을 실현하고, 개인이 즐거운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이상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들의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것을 위해 저자 량사오민 교수는 경제학에 대해 최적과 선택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시각으로 우선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최적이란 제한적인 조건하에서 가장 좋은 결과를 얻는 것 을 말한다. 또한 선택이란 단순히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결점이 비교적 적으면서 실현 가능한 것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고르는 것이라 정의한다. 결국 그것은 우리의 삶과도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 역시 끝없이 많은 선택의 순간과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치열한 경쟁의 장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은 저자가 중국 경제에 대해 논하고 있는 책이지만 자신의 경험과 분석을 통해 책의 곳곳에서 경제학이 일종의 인생철학임을 우리에게 인식시켜주고 있기도 하다. 성장하는 중국의 근간은 물론 국영기업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저자가 '친아들'이라는 표현을 쓸만큼 정부의 각별한 보호아래 중국의 경제를 이끌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한 이후에도 여전히 구태의연한 과거의 습관이 남아 정부가 기업들을 무조건 감싸기만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 결과 중국 기업들은 짝퉁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지 오래이다. 저자는 그 원인이 품질개선을 기업의 양심에 맡기고 있기 때문이라 꼬집는다. 저가 상품을 통한 세계시장에의 진입은 지극히 정상적인 경제발전의 방식이다. 하지만 그것은 경제 발전 초기에 국한 되어야 하며, 경제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이후에는 더이상 그러한 방식이 통용되지 않는다. 결국 기술개발과 함께 기업에 대한 정당한 압력행사만이 상품의 질을 끌어 올려 자국 제품의 수준을 국제적으로 끌어 올리는 유일한 길임을 저자는 이야기 한다. 또한 저자는 사회적인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는 태도를 가진 지식인의 도덕성과 자신이 축적한 부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사람들로 부터 비난을 받는 일부 부유층에 대해서도 학자적인 양심과 교양으로서 그러한 불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중국이 백년을 기다려 왔다는 베이징 올림픽에 대해서도 의견을 내어 놓고 있다. 물론 올림픽이 국력신장과 국제적 지위 향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잔치이며 동시에 경제적으로도 많은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데는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부정적인 효과들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아직 개발도상국인 중국이 '있는 척'하며 올림픽을 치르는 것 보다는 최대한 절약해야 할 것을 이야기한다. 물론 올림픽은 끝났고 그 경제적 효과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엔 아직 이르다. 웅장한 규모의 호화로운 잔치는 분명 세계인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지만 그 비용에 대해서는 분명 우려를 나타내는 목소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나라 만큼 올림픽 금메달에 대해 집착하는 나라가 있을까 했지만 저자가 이야기하는 중국은 어쩌면 우리보다 그 강도가 훨씬 더 한듯 느껴진다. 실제 지난 아테네 올림픽에서 중국이 금메달 한 개를 따기 위해 들인 비용이 7~8억 위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2005년 발사한 중국의 두번째 유인 우주선 선저우 6호에 들인 비용이 9억 위안이었음을 감안할때 과연 그러한 대가를 들여 금메달을 따낼만큼 그 가치가 있었느냐에 대해 저자는 묻고 있다. 물론 국가적으로 금메달은 소중하고 값진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경제적인 가치로 봤을때 우주선과 금메달은 비교할 수 조차 없다고 저자는 단언하기도 한다. 중국 경제의 급부상은 베이징과 상하이를 비롯한 많은 도시들에 고층빌딩으로 대표되는 현대화의 물결을 안겨다 주었다. 또한 많은 경제 지표들이 발전하는 중국 경제에 대해 장밋빛 전망을 내어놓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 과시성 소비의 이면에는 숨겨진 이기적인 위선과 부적절한 행동이 깊숙히 자리잡고 있음을 저자는 경계하고 있다. 모두가 잘 살기 위해 부의 강압적인 재분배를 꿈꾸기 보다는 유능한 사람들이 기업의 규모를 늘리고 경쟁력을 높여 더 많은 국부를 창출하여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중국은 현재 커다란 변혁의 한 가운데 놓여 있다. 이제 본격적인 시장 경제 체제 속에서 중국의 사회와 기업들은 자본이라는 그들이 지금껏 가져보지 못했던 요소와 함께 새로운 도전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조화와 균형이라는 경제학의 핵심을 잃지만 않는다면 아직 중국에게 기회는 무수히 많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서른 두살의 노처녀 프란체스코의 일상은 단조롭기만 하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형제자매도 없이 그녀는 근엄한 계율을 갖고 있는 수녀원에서 성장한터라 뭐든 혼자 결정하고 혼자 행동하며 혼자 지내는 것을 좋아할 정도로 모든 습성이 자기 중심적인 여자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43인치라는 거대한 가슴때문에 예전에 속옷이나 수영복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광고에 도무지 어울려 보이지 않았던 느낌때문에 지금은 프로그래머로 재택근무 중이다. 괜찮은 게임 소프트를 만들어내며 나름대로 실적을 올리는 생활이 익숙할 무렵 그녀의 왼팔 윗부분에 큼직한 종기가 생긴다. 아프진 않았지만 찜찜한 기분에 그녀는 병원을 찾아가 의사에게 팔뚝을 내보이지만 그때마다 종기는 이상하게도 사라져 버린다. 그러한 지루한 반복이 열번이나 지나고 난 후 갑자기 종기는 부풀어 오르며 사람얼굴의 형체를 띤다. 이른바 '인면창(人面瘡)'의 출현이다. 게다가 황당하게도 이 인면창 이 말까지 할 줄 안다. 히메노 가오루코의 <내안의 특별한 악마>는 늘 외톨이인 프란체스코와 인면창의 동거아닌 동거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종기가 처음 말을 했을때 그녀는 너무 놀라 세상의 각종 종교의 신에게 기도할 정도로 겁에 질린다. 하지만 종기는 각종 독설을 내뱉으며 자신과 공동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말한다. 그러나 그녀에겐 어림없는 일이다. 힌두교도라 생각되는 연예인의 사진으로 인면창의 입을 틀어막은후 붕대로 꼭꼭 싸매 버린다. 붕대를 풀자 인면창은 사라졌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샤워를 하려하던 그녀에게 인면창이 다시 말을 건다. 사라진줄만 알았던 인면창은 그녀의 가장 은밀한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인면창에게 그녀는 '고가'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어쩔수없이 동거를 시작한다. 고가는 그간 오랫동안 처녀성을 간직하고 있는 세계 각국의 여자들에 기생하며 살아왔다고 자기를 소개한다. 그리고 일에 몰두해 남자들이 여자로 바라보지 않던 그녀들이 마침내 여성적인 매력을 발산할때 자신은 떠 날 것이라 이야기 한다. 단조로운 생활과 집 밖으로 잘 나가지도 않는 그녀는 이제 그녀의 손이 닿기만해도 모든 남자들을 남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해버리는 이상한 능력까지 만들어 주기에 이르렀다. 그런 그녀에게 날마다 이루 말할수 없는 독설을 내뿜는 고가의 이상한 동거는 3년째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친구의 부탁으로 북쪽 창가의 방을 밀회장소로 빌려준 이후 그 방은 소문을 타고 많은 연인들이 찾는 명소가 되어 버린다. 프란체스코는 그방을 '엘리제를 위하여'란 이름을 붙여 오로지 타인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 준다. '저주받은 내 체질때문에 혹시라도 연인들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돼." 소박한 그녀의 꿈은 무얼까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황당하기 그지 없는 설정을 만들어낸 작가 역시 그저 한낱 웃음거리로 이 소설을 쓰진 않았을거라 생각된다. 작가 가오루코 는 이런 우스꽝스러운 설정속에 슬픔이 기생한다고 털어놓는다. 다시 말해 우스꽝스러움과 슬픔이 전혀 다른 감정이 아닌 서로 밀접한 관계로 연결된 하나임을 이야기한다. 그것을 그녀는 겸손함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슬픔이 또한 기쁨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하지만 행복을 위해 노력했던 그녀에게 작가가 안겨주는 또한번의 우스꽝스러운 상황은 무엇을 의미할까... "세상에는 이래저래 괴로운 일도 있고, 모두들 이래저래 괴롭기 때문에 자신의 이래저래 괴로운 일을 이래저래 즐거운 일로 바꿔가듯이 다들 이래저래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자신도 이래저래 노력을 해보자고..." 자신이 그레이트하고 퓨어하고 노블하다고 이야기하는 인면창 고가와 함께 말하고 만진 남자들을 임포텐스는 물론 대머리로 까지 만들어 버리는 이상한 능력을 지닌 프란체스코의 동거는 작품 내내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을 길이 없다. 다른 작품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파격적인 표현과 묘사는 작가 가오루코가 왜 '100가지 문체를 쓸 수 있는 작가'로 불리는지 알려주는듯 하기만 하다. 누구에게도 말할수 없는 그녀만의 특별한 악마 고가의 독설을 만나는 것은 어쩌면 누구에게나 있음직한 마음속 진심에 대해 다가서는 또다른 특별함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