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 섹스칼럼니스트의 사랑방정식
김경순 지음 / 문학수첩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현대사회에서 남녀의 구별없이 주어지는 동등한 기회와 여건은 남녀평등을 넘어 능력있는 여자들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각종 언론과 매스컴은 이른바 골드미스, 알파걸이라는 신조어들을 양산해내며 더이상 결혼이라는 제도가 현대여성의 최종 목적지가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우리들의 현실에 있어 골드미스와 알파걸은 그저 때를 놓친 노처녀들 아닐까.

 

그렇게 김경순의 소설 <21>은 골드미스도 알파걸도 아닌, 단지 나이만 먹은 경쟁력 없는 이력을 가진 서른넷 노처녀 지희의 연애담을 경쾌한 필치로 담아낸 연애소설이다. 70년대생인 지희는 자신이 성문화에 있어 60년대생처럼 순응적인 스타일도 아닌, 80년대생처럼 도전적이며 자유스럽지도 않은 중간에 끼인세대라고 생각한다. 마음만은 이후의 세대처럼 자유롭지만 행동은 여전히 이전 세대가 갖고 있는 웬지모를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전형적인 70년대생의 기질을 갖추었음을 한탄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연애담 역시 늘 실패의 연속일뿐 이었다. 대학때 적어도 자신은 시니컬하다고 생각했던 복학생 선배에게 뒤통수를 맞은 기억은 어쩌면 그 시작이었을 것이다. 10년만에 우연히 만나 늘 편안하게 생각하던 대학동창 H가 어느날 갑자기 여동생 지영의 애인이 되어 버리기까지 어쩌면 늘 누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남자만 좋아했던 그녀의 남모를 습관때문은 아니었을까.
"진경은 이런 나를 보고 욕망을 욕망하는 스타일이라고 결론지었다. 욕망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욕망을 보고 욕망을 품는 스타일이라는 것

이다.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타자의 입장에서 인생을 사는 사람의 특징이란다."

 

그래서일까 지희의 직업은 아이러니하게도 섹스칼럼니스트이다. 적어도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가 그런 일을 한다면 사회적으로도 관심의 대상이 되겠지만 그녀의 칼럼이 연재되는 주간신문 <산업과 도시>는 그러한 경쟁력은 없어 보인다. 게다가 칼럼의 밑천이 되어야 할 연애의 경험조차 일천한 그녀이기에 늘 원고마감은 그녀에게 부담이다. 대신 현대인의 친근한 벗 인터넷이 그녀의 일의 원천이 되고 있고 어쨋든 그덕분에 그녀의 통장에도 꼬박꼬박 원고료가 들어오고 그것으로 그녀는 늘 만족해 할 뿐이다. 일찍 돌아가신 엄마 대신 동생 지영에게 엄마노릇 하려 노력했고 스스럼없이 재혼을 선택한 아버지를 편하게 하기 위해 대학을 졸업하면서 바로 독립했다. 어느샌가 동생이 합류하면서 둘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겠다던 동생은 지금 브래지어 디자이너가 되어 가끔 언니를 실험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지금은 동생의 애인이 되어버린 H는 가끔 그녀들의 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그때마다 모든 준비는 지희의 몫이다. 그것이 불편해 보여서였을까 지영이 어느날 소개팅을 주선한다. 피가 물보다 진하리라는 믿음을 갖고 한강이 보이는 분위기 좋고 값까지 싼 와인바에서 그를 만난다. 그녀의 표현을 빌자면 바야흐로 억만년만의 데이트가 시작된 것이다. 마과장이라는 그는 동생의 직속상관이기에 그 역시 브래지어 디자이너다. 여자 섹스칼럼니스트와 남자 브래지어 디자이너의 만남 누가 봐도 특이한 만남이다. 그와 만난 다음날 지희는 웬지 S를 떠올린다. 스물아홉에 만나 결혼까지 결심했던 그였지만 사소한 상품권 문제 때문에 그와 헤어지고 만다. 서로에게 지우지 못할 아픈 상흔만을 남긴채 그녀는 그렇게 서른을 넘겨버렸고 그는 결혼을 했다. 매너좋고 사람좋은 마과장과의 데이트가 이어질무렵 S에게서 연락이 온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그녀의 생일을 그만은 기억하고 있다. 그를 만났지만 지희는 이내 돌아서고 만다. 이제 그녀의 옆에는 그녀가 시마과장이라 부르는 남자가 생겼다. 하지만 난생 처음 해본 지영과 H 커플과의 더블 데이트는 그녀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 이제 그녀도 사랑을 찾아내려 하나보다.

 

 

전형적인 칙릿소설이긴 하지만 소설에는 이들 자매의 가족 이야기가 빠질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희에게 지영이 어떤 동생이었고 지영 역시 지희를 어떠한 언니로 여겼는지 서로가 알게 되는 것이 어쩌면 작가가 의도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게 어쩌면 먼 길을 돌아 그녀들은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작품의 제목인 '21'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맥주병 뚜껑의 톱니바퀴가 21개라는 것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소설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확연히 드러내지는 않는다. 실제 맥주병의 뚜껑이 21개인 것은 대단히 과학적인 계산에 의한 것임을 어느 방송에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과 이 작품을 연결시키기엔 조금은 난해해진다. 대신 S와 마지막으로 만난 날 둘의 대화가 아마도 그 힌트가 되진 않을까. 같은 숫자를 두고 누구나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때에 따라서 그것에 큰 의미를 둘 수도 있고, 그저 아무것도 아닌 그저 숫자에 불과한 기억일 수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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