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고양이를 부탁해 걷는사람 에세이 7
김봄 지음 / 걷는사람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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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제목을 보고는 아무런 정보도 없었기에 조금은 당황했었다.

언제부턴가 보수와 진보 대신

좌파와 우파라는 말이 오가면서

괜스레 ' 좌파'란 말이 뭔가 더 폭력적이고 삐딱하게 여겨져 피로도도 있었던 참이라.

다른 책들에 매몰해 있다가 한 번씩 쳐다보면서

어느 서정의 끝자리에서 이 책을 만나야 하는가를 고민했었다.

이웃 블로거의 리뷰를 보고 제목만큼 심각한 책이 아니란 걸 알았다.

쥐를 혐오해서, 쥐의 공격을 받아서,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했다는 작가 '김봄'은

사십대의 미혼 작가이다. 그녀의 이름 봄은, 계절이 아니라, 바라봄의 봄이다.

다섯 자녀 중 셋째로, 혼자만 미혼이라 부모의 손과 관심이 더 가는 아픈 손가락이자

만만한 자녀인 셈인데

그런 그녀가 경상도 출신의 보수 엄마와 사사건건 부딪치는 이야기이다.

정치적으로 진보 성향인 그녀와, 보수 성향의 엄마 '손 여사'가

아이를 한 번도 낳아보지 못한 그녀와 다섯이나 쑥쑥 낳은 엄마가

미혼인 그녀와 기혼인 엄마가

젊은 그녀와 노년의 엄마가

전혀 다른 속도로 하루를 사는 그녀들이..

다르지만, 결국엔 하나로 연결된 모녀의 충돌들이 너무 귀엽고 발랄하다.

아주 짧지만 강렬해서 경쾌하다.

뒤끝 없는? 책이랄까?

소소하고 맛깔나다.

(중간 생략)

 

그나저나 민감하다면 엄청 민감할수있고.치열하다면 무지 치열할수 있는 소재로 이렇게 경쾌하게 쓰기 있기? 없기?

그녀가 작가의 말에서, 그녀의 솔직함이 '손 여사'와 가족들에게 혹여 폐가 될까 걱정하면서 전하고자 했던 말은,

누군가의 딸로 충만했던 그 마음을 함께 나누고 싶다고, 좌파와 우파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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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촌수필 문지클래식 1
이문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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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촌은 충청남도 보령시, 대천의 한 마을이다. 제목이 착각하기 딱 좋게 수필이란 이름을 내세웠지만, 작가의 실제 어린 시절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연작 소설집이라 하고, 해설에서는 느슨한 연작이라 하지만, 그 느슨함이 별개의 단편소설집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이지만, 전체적인 골자가, 작가가 어려서 성장한 관촌과 관촌 사람들의 이야기이므로, 또 연작이라 할 수도 있겠다.

1973년부터 1977년까지의 작품들을 1977년도에 묶어 출판한, 8편의 작품이 실려있다.

제목이 모두 사자 성어로 이루어져서, 갸우뚱거릴 차, 단락마다 첫머리에 달아둔 뜻풀이를 발견하니, 안심이 되었다.

충청도 사투리와 한자어로 인해, 헤맨다던 리뷰처럼, 토속어와 비속어, 지금은 사라진 고어들의 향연을 애쓰면서 즐겨야 했다.

일락서산(日落西山)-서산에 지는 해. 1972년 발표.

양반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조부로부터 친구관계나 행동거지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자라, 자신의 근본적인 고립을 조부의 영향이라 한다.

이미 기울고 퇴색해 가던 가문이 6.25사변을 겪으면서 쑥대밭이 되는데, 남로당의 지역 지도자였던 아버지와 형들을 잃고, 전쟁 중 돌아가신 사대부의 후예 할아버지의 유언은 '족보만은 잘 간직해라'이다. 작가 가족의 실제 이야기로, 중학을 졸업하고 일찌감치 서울로 올라온, 주인공이 장성하여 할아버지 성묘를 가면서 '내 심신의 통치자' 할아버지와 옛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의 서정을 디테일하게 묘사한다.

작가는 후기에 [일락서산]을 자기소개라고 하여, 첫 순서로 놓았다고 밝혀둔다.

화무십일(花無十日)- 열흘 가는 꽃이 없다. 1976년 발표.

전쟁 이후 서울로 돌아가던 피난민들의 길목인 관촌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주인공의 집에도 일행들이 하룻밤씩 묵어가게 되는데, 윤영감네 일가족과는 인연이 되어 한참 동안 지내게 된다.

남자들이 없어진 집안의 살림에 윤 영감 내외가 큰 보탬이 되지만, 그들의 젊고 예쁜 며느리가 여관 종업원으로 취직을 하면서 패가망신에 이르고, 그 며느리를 찾겠다고 행상에 나섰다는 윤영감네의 그 이후를 궁금해하면서, 소반 장수의 외침을 통해 떠올려 본다.

행운유수(行雲流水)-떠가는 구름과 물. 1973년 발표.

자신의 집에서 부엌일을 돌보던 열 살 연상의 '옹점이' 이야기, 그녀와 유독 따뜻한 추억이 많은데,,

그녀가 장성하여 시집을 갔고, 남편이 군인 가서, 홀로 모진 시집살이를 살다가 쫓겨났다는 소문을 들어왔는데

약장수를 따라나서 노래를 부르고 다닌다더니, 그가 대천장에서 그녀인듯한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데,,

녹수청산(綠水靑山)- 청산녹수, 푸른 골짜기에 흐르는 맑은 물. 1973년 발표.

주인공을 챙겨주고 위해주던 여남은 살 연상의 '대복이' 이야기,

그를 따라다니면서 온갖 구잡스러운 놀이들을 하게 되는데

미군들에 의해 대천 해수욕장이 개발되고, '대복이'는 미군들의 심부름을 하면서 물건을 훔치고 마을에서는 소문난 사람이 된다.

그의 행실에 물들까, 주인공에게 경고들을 하지만, 어머니의 묵인처럼, 자신을 끔찍이 챙기는 '대복이'가 딱히 해될 것은 없고,

또 무엇보다도 그를 너무도 좋이 여기는데, 점점 '대복'의 도벽은 대담해지고 두려워질 무렵, '대복이'가 유치장에 가게 된다.

전쟁이 발발하자, 옥문이 열려서 출옥하게 된 '대복이'는 공산당 활동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강간 미수로 잡히게 되는데,,

공산토월(空山吐月)- 빈 산이 달을 토하다. 빈 산에서 떠오른 아름다운 달. 1973년 발표

일가친척의 행랑아범을 살던 신 서방의 장남으로 태어난 신 석공의 결혼 스토리와 그가 자신의 집안에 행한 의리를 떠올린다.

어머니가 그 아들을 빗대어, '빈 산의 달이 뜨기를 저런 아들을 둘 수 있냐'던, 성실하고 반듯한 신석공,,

- 추석을 마중 가는 길이라서 반달은 물색없이 밝기만 했다. 마치 석공이 작아던 날 밤, 온 하늘에 가득하던 그 예전 달같이........아, 별들은 또 어찌 그리도 고대 숨넘어가듯 가물거려댔던 걸까. 별빛은 보면 볼수록 불안스럽기만 했다. 정말 요망스러운 망상이니라 하면서도 자꾸 불안스럽기만 했다. 정말 요망스러운 망상이니라 하면서도 자꾸 불안해지던 가슴, 그 중의 어느 별이라도 깜뭇 꺼져버린다면 석공의 숨소리 또한 그와 동시에 멎어버릴지도 모른다 싶던 그 두려움, 그 이겨낼 수 없던 시시각각의 공포와 초조로움. 268 (공산토월)

관산 추정(關山芻丁)-고향에서 꼴 베는 사람, 고향의 옛 친구. 1976년 발표.

두 살 연상의 소꿉동무 '복산이', 그의 아버지 '유천만'은 추접스럽구, 우스운 사람이었지만, 징용을 다녀왔던 사람으로 죽다 살아난 이후로 가사를 돌보는 것은 점점 억척스러워지는 아내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유천만'도 남들이 아주 꺼리는 일은 도맡아서 하게 되는데,,

그 아들 '복산'은 아직도 그들의 고향 관산에 살고 있다.

관산이 고향을 지키고 있어서 고향에 가려면 반드시 거치지 않을 수없는 산(사마천의 사기)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주인공에게 있어 '복산이' 그런 존재이다.

도깨비불을 보고 변하지 않은 게 있다고 좋아하던 차,

낚시꾼들의 간드렛불(candle)이었음을 알게 되고 변해가는 고향 이야기, 사람약의 정체, 그리고 인간 공해..

- 세월은 지난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새로 이룬 것을 보여줄 뿐이다. 나는 날로 새로워진 것을 볼 때마다 내가 그만큼 낡아졌음을 터득하고 때로는 서글퍼하기도 했으나 무엇이 얼마만큼 변했는가는 크게 여기지 않는다. 무엇이 왜 안 변했는가를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관촌 부락을 방문할 때마다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 325(관산추정)

여요주서(與謠註序)- 별것 아닌 일에 대한 설명, 또는 그저 그런 이야기에 관한 해설. 1976년 발표.

역전에서 '장부식( 늘 몰라~)'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신용모'를 만나게 된다.

야생조류 금지법 위반에 휘말려 재판을 앞둔 어리숙하고 무식한 그의 재판 이야기,

사연인즉슨, 오해할 수밖에 없이 처신한 것만 잘못인셈인데,,

야생동물에게 물격이 있다면, 자기도 야생인간인 셈인데, 자신에게도 야생의 인격이 있다면서, 물격보다 거시기 하지 않겠느냐는 호소가 너무 황당하고 웃겨서, 폭소가 터졌던..

월곡후야(月谷後夜)- 월곡 동네의 밤중부터 아침까지. 1977년 발표.

* 후야:밤중에서 아침까지를 이르는 말, 불교에서 새벽 한 시부터 다섯시까지의 시간

유령 출판사에서 번역의 위조일을 하던 '김희찬'이 고향에 내려가려고 일단 몸을 섞던 애인 '조미애'를 따돌리고

두메산골 월곡면으로 들어가 동생 '수찬'과 함께 과수원 일을 하며 사는데

그는 주막의 과부와 관계를 하였고, 그 과부의 첫딸과 자신의 동생 '수찬'과 눈이 맞은 듯한데..

마을엔 14세의 '순이'가 개에 물려 낙태한 사건이 발생하였고,

'순이'를 겁탈한 자는 '순이'의 동무 아버지로 폐결핵을 앓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순이'의 엄마와, 거금 삼만원과 땅문서로 합의를 보고 덮기로 하자

'수찬'과 또래의 청년들이 모여 도덕적인 응징을 가해 그자를 마을에서 쫓아내고자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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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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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의 집들이 차 찾아간 돈암동에서 그녀가 예전에 살았던 곳, 자신이 살던 집터를 어렵게 감만 잡은 후, 그 남자네 집을 떠올려본다.

전쟁 전, 살림의 규모를 줄여서 이사해왔던 자신의 집 근처에 엄마의 외가 쪽 친척 집도 이사를 오게 된다.

그리고 자신보다 어린, 그 집의 막내아들을 보면서 그녀는 설레는 자유에의 예감을 느낀다.

전쟁이 나자 그녀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고 미군부대에 취직을 했다.

아버지와 오빠는 좌익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그 남자의 형과 아버지는 월북을 했고, 그 남자는 전쟁에 나갔다가 상이군인이 되어 명예제대를 한다.

폐허가 된 서울 거리를 쏘다니면서 그들은 어울린다.

철없고, 자신을 돌보려 월북하지 않은 엄마를 원망하던 그 남자는 '정지용'과 '한하운'의 시를 낭송하고 음악을 듣는다. 암울하고 극빈하던 흉흉한 전시를 견디게 하는 것은 시였노라고..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드는 통에 의식주의 절대 부족으로 그야말로 서울은 아가 사리 끓듯 한 모습이었다.

맨날 붙어 다녔지만, 손 한번 마주 잡은 적 없는 사이였고, 손아래, 먼 친척뻘 동생과의 어울림은 양가에서도 전혀 의심받을 일 없는 사이였지만, 그들에겐 연애였고, 서로가 첫사랑이었다.

그녀는 그 남자와의 거리가, 순결의 중요성보다 임신의 두려움으로 인한 거리였다고도 한다.

그리고 그녀는 전쟁통에 같이 미군부대에서 일하던 은행원과 결혼을 한다.

자상하고 속 깊은 남편과 대단한 음식 솜씨를 지닌 홀시어머니와 살면서, 문화가 다르다느니, 남편이 쪼잔하다느니, 미신을 믿는 시어머니의 음식에 대한 열정과 호사를 탓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남편과 시어머니는 매우 좋은 사람들이었다. 단지 그녀의 불만은 변화를 꿈꿀 수 없는 안정감이 주는 막막한 권태였고 일종의 사치였다.

남편의 배려로 엄마와 하숙을 치던 올케가 동대문에 포목점을 열게 되어, 가끔 들러보던 어느 날, 그 남자의 큰누나를 우연히 만난다.

그녀에게 이끌려간 다방에서 그 남자가 많이 힘들어한다고, 건강상의 이유로 휴학을 하고는 발작처럼 소란을 피우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녀가 자신의 첫사랑이었노라고도 말했다고 한다. 그 남자의 누나는 자신의 막냇동생이 힘들어하는 이유가, 그녀의 결혼에 대한 충격이었다고도 생각되어, 그녀더러 한 번씩 자신의 동생을 만나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밀회가 시작된다.

행복한 밀회가 거듭될수록, 그녀는 자신의 시집살이가 한결 부드러워진다고 느낀다.

그때 신문에 연재되던 소설이 그 유명한 [자유부인]이다.

남편은 유독 다음 횟수를 기다리면서 읽기를 즐기고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회사 동료들 사이에선 그 소설 속 여주인공 이야기가 매우 중요한 화젯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의 그 화제가 불편했고 읽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처녀 시절 읽던 [보바리 부인]을 찾아 책장을 뭉텅이로 넘기면서 몇 구절 읽는 걸로 떠돈다.

그 남자가 어느 날, 마석에 있는 자신의 선산에 나들이를 가자고 한다. 둘이 청량리역에서 만나기로 한 날, 그는 결국 나타나지 않는다.

하루 종일 기다림에 지친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몇일동안 독감을 앓고, 그리고 그 남자의 병소식을 듣는다.

뇌 수술과 실명, 그리고 벌레 이야기..

그와의 사랑이 그 남자의 머릿속에 들어있던 벌레들이 시킨 일이었는지.. 엉뚱한 회의를 품어보지만,

그녀는 아이를 낳고, 또 낳고

나이를 먹는다. 취업한 자녀들에게 용돈을 받을 만큼의..

그리고 그도 늦은 결혼을 했고.

그 남자의 어머니 장례에 찾아가서 울던 그를 안아준다.

그와의 결별은 그것으로 족했노라고, 신문을 통해 그 남자의 부음을 듣고 문상을 가지 않겠다 한다.

전쟁 이후를 살아가던 청춘의 이야기,

'광수'라는 먼 친척과, 그녀의 뒤를 이어 미군부대에 취직했으나, 결국엔 양공주가 되어, 자신의 가족을 책임졌지만 사랑은 없었다는, '춘희의' 이야기도 병행한다.

그 힘든 시절의 청춘, 그리고 사랑, 불륜일 뻔했던 사랑 이야기를 참 담백하게 그녀답게 이야기한다. 그런 작가만의 여백으로 인해 감성의 에너지를 줄여 더 몰입할 수 있달까 ..

 

 

 

첫사랑이란 말이 스칠 때마다 지루한 시간은 맥박 치며 빛났다. 그 남자를 다시 만나기까지는 일주일이 나 남아 있었지만 오래간만에 맛보는 기다림의 시간은 황홀했다. 무엇을 입고 나갈까. 첫사랑이 긴 치마를 허리띠로 동여매고 시장바구니를 들고 나타난다면 그 남자가 얼마나 실망할까. 나 또한 그 남자가 첫사랑이거늘. 그건 첫사랑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나는 이것저것 좋은 나들이옷을 꺼내 입고 거울 앞에서 나를 비춰보았다. 어떤 옷은 점잖아 보이고, 어떤 옷은 촌스러워 보이고, 간혹 요염해 보이는 옷도 있었다.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남자가 나에게 해준 최초의 찬사는 구슬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구슬 같은 처녀이고 싶었다. 169

- 우린 틈틈이 만났다. 언제 만나자는 약속을 못 지킬 적도 없지 않았다. 전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붓하던 우리의 연애질이 어쩔 수없이 산만해지고 있었다. 연애질보다 급하고 실제적인 일이 우리를 필요로 하면 서슴지 않고 약속을 뒤로 미루었다. 때로는 거짓 일을 꾸며대면서까지 약속을 안 지킬 적도 있었다. 우린 이제 마지막 남녀가 아니라 수많은 남자 여자 중의 하나였다. 한 사람에게 몰두하는 일이 얼마나 집중력을 요하는 중노동이라는 걸 서서히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신경 써야 할 잡무가 많은데도 그게 오히려 휴식이 되었다. 연애질에서 비켜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그 남자에게 싫증이 난 건 아니었다. 연애의 권태기가 온 것 하고도 달랐다. 만일 그 남자를 못 만났더라면 그 시절을 어떻게 넘겼을까. 그 살벌했던 날, 포성이 지척에서 들리는 최전방 도시, 시민으로부터 버림받은 도시, 버림받은 사람만이 지키던 헐벗은 도시를 그 남자는 풍선에 띄우듯이 가볍고 어질어질하게 들어 올렸다. 황홀한 현기증이었다. 이 도시 골목골목에 고인 어둠, 포장마차의 연탄가스, 도처에 지천으로 널린 지지 궁상들의 그 갈피에 그렇게 아름다운 비밀을 숨기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그 남자하고 함께 다닌 곳 치고 아름답지 않은 데가 있었던가, 만일 그 시절에 그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 인생은 뭐가 되었을까. 청춘이 생략된 인생, 그건 생각만 해도 그 무의미에 진저리가 쳐졌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감사하며 탐닉하고 있는 건 추억이지 현실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그 한가운데 있지 않았다. 행복을 과장하고 싶을 때는 이미 행복을 통과한 후이다. 그와 소원해진 사이에 느낀 휴식감도 절정감 못지않게 소중했다. 긴장 뒤엔 반드시 이완이 필요한 것처럼. 그러나 한번 통과한 그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전적인 몰두가 사람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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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의 봄 : 김동인 장편소설 한국문학을 권하다 20
김동인 지음, 구병모 추천 / 애플북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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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지 [창조]를 발간한 '김동인', [감자], [배따라기], [발가락이 닮았네] 등의 단편소설로만 접했던 그의 장편소설 [운현궁의 봄]..

6학년 국사시간에 담임샘이 언급하셨던 이 책을 이제서야 읽는다. 햇살 좋은 날~, 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는 희미하지만, 칠판을 등지고 역사의 맥락을 짚어서 줄줄이 이야기해 나가시던 그 샘께서, 문득 이 책을 언급하셨다. 그냥 그런 책이 있노라고.. 국사시간과 문학 시간이면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펴던, 그 꼬마 아이는 또 그런 것에 꽂혀서 아쉬워했지만 그냥 지나가는 언급일뿐이었다. 그 후로도 이 책은 국어시간이 아닌 국사시간에 한 번씩 등장하였다.

미술 공부를 했던 '김동인'은 마약중독으로 피난을 떠나지 못한 채, 6.25전쟁 중 사망하였다.

이미 '김훈'작가의 역사소설에 눈뜬지라, 일부러 찾지 않던 역사소설이란 장르의 재미 짐을, 이제사 발견하고 이 소설 역시 어릴 때 보았던 사극과, 배웠던 국사 지식을 총동원하여 전후의 맥락을 연결 지으며 흥미진진하게 읽게 된다. 극심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한 소설 쓰기와 병마에 시달렸던 작가가 병석에 누워 죽어가느라, 중단되었다는 또 다른 역사소설 [을지문덕]에 대한 아쉬움도 생겨났다.

운현궁의 때이른 봄날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 이날이 조선 근대의 괴걸이요, 유사 이래 어떤 제왕이든 감히 잡아보지 못하였던 '절대'적 권리를 손에 잡고 이팔도 삼백여 주를 호령하며, 밖으로는 불란서, 미국, 청국 들을 내려 주르고, 안으로는 자기의 백성의 복지를 위하여 그의 일생을 바친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별세한 날이다. 조선 오백 년 역사에 있어서 조선을 사랑할 줄 알고, 왕가와 서민, 정치가와 백성,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지위를 참으로 이해한 단 한 사람인 우리의 위인 이하응이 그 일생을 마친 날이다. 21

귀한 몸이 되기 이전의, 상갓집 개처럼, 술 먹을 일이 있으면 주책없이 찾아다니며, 냉대를 당하기 일쑤이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비록 왕족의 신분이지만, 가난하고 세력이 없어, 끼니 걱정을 하여야 하는 불쌍한 종친의 비루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리고 그의 둘째 아들 '재황'이 임금이 되고 자신의 섭정이 허락되자, 그가 살던 사택이 '운현궁'이란 칭호를 얻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그의 집에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문안 차, 청탁 차,,,

쓸쓸했던 그 '운현궁의 봄'이 시작되는 때, 유달리 화려한 봄이라는 그해로, 소설이 끝나지만, 이미 우리가 아는 역사상의 수많은 스토리들이 막, 머릿속에서 펼쳐진다는 것..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면서 여러 에피소드들이 등장하고, 누군가 구수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극적인 묘사가 읽는 내내 흥미를 붙잡아둔다.

명종 때의 사소한 시비로 서인과 동인이 나뉘고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이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면서 늘 당파싸움에 휘말리던 조정,

정조이래, 순조와 헌종 철종은 어리고 병약하여, 군권을 펼 여력조차 없게 되니, 외척들 김 씨 일가들이 세도를 형성하였고 그런 당쟁의 틈에 낀 왕족들은 가련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 세 임금의 왕비들이 모두 김 씨 일가의 딸 들이었다.

역모의 죄로 엮여져 내몰리는 왕족들을 보면서, '흥선'은 일찌감치 자신을 포장해 버린다.

헌종이 죽었을 당시 제법 괜찮은 종친이 있었음에도, 대왕대비 김 씨는 자신들이 주무르기에 만만한 무지랭이 강화도령을 철종으로 세우고,

유력했던 종친 '이하전'은 역모죄를 씌워 사약을 받게 한다.

무뢰한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 잘 먹고 투전 잘하고 싸움 잘하는 '흥선'은 김 씨 녀들 틈바구니에서 청상으로 늙어가다 대왕대비가 된 조대비와 비밀의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훗날 대립하게 되는 며느리 민비를 중전으로 염두에 두게 되는 배경 이야기도 흥미롭다. 맥락상, 중간중간 등장하는 친숙한 여러 왕들과 인물들의 이야기 역시 재미나다. 이 책의 문학적인 의의는 소소할지라도, 1900년대 초반을 살았던, 작가가 수집했을 역사적인 사실들이 신빙성 있고 특히나 이 소설의 집필 배경이 생활고였음을 강조하던데,, '구병모' 작가의 추천글도 들어있다.

과거- 현재-미래로의 연결고리들이 흥미롭게 반복되고, 아둔한 임금과, 못된 세도정치 속에서 비루한 왕족들 보다 더 처참하게 살았던 백성들 이야기들이, 전면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작가나, 흥선의 시선이 살짝씩 머물게 되는 부분에서 괜히 울컥한다. 지금의 민초들은 그래도 배워서 다행이다. 반항할 줄 알아서 다행이고..그래서 더이상 민초에 비유해서는 안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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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미술관 - 가볍고 편하게 시작하는 유쾌한 교양 미술 방구석 미술관 1
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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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재미나게 읽었다는 서평들을 보고 사둔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그사이 [방구석 미술관 2]도 출간이 되었다는데, 여기서는 한국의 작가들을 다루고 역시나 재밌다는 서평이 떠다니고 있다.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미술이 좋아서 독학으로 공부하고, 유럽 전역을 돌면서 미술관 순례를 했다는 작가는 미술이, 누구나 쉽고 재밌게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길, 미술에 대한 오해와 허례허식을 벗기고 싶었다고 한다. 이 책의 부제처럼 가볍고 편하게 시작하는 유쾌한 교양 미술 서이다.

'에드바르트 뭉크', '프리다 칼로', '에드가 드가', '빈센트 반 고흐',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폴 고갱', '에두아르 마네', '클로드 모네', '폴 세잔', '파블로 피카소', '마르크 샤갈', '바실리 칸딘스키', '마르셀 뒤샹'까지 총 14편으로 나뉘어 그 작가의 생애와, 작품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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