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상의 노래 ㅣ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1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평점 :
우리나라의 소설에서 이런 작가, 이런 책은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는 것을 안다. 일찌감치 [식물들의 사생활]을 읽으면서 범상치 않음을 알아봤고,
우리나라에서는 마니악 한 작가라고 하지만, 외국에서의 평가가 더 좋아 많이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하고, 노벨 문학상 후보로 내세운다는 평가도 있어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철학적인 농도가 짙고, 신학적인 세계관이 맞물린 그의 작품은 결코 가볍거나 쉽게는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은 가독성이 좋다. 전작들에 비해 힘을 많이 뺐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드는 차, 그분의 나이를 확인하며 더 많은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해주기를 바래본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포르투갈의 높은 산], [좀머 씨 이야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떠오르는 대목들이 있다. 그리고 흡입력이 좋다.
뻔한 스토리 일수 있지만, 그의 신학적인 사유와 질문은 소름 끼치도록 가볍게 무겁다.
이 작가의 작품들을 제대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에리직톤의 초상]부터 구하려 했는데, 품절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구하고자 한다.
나는 한 작가에게 꽂히면 그의 책을 꾸준히는 읽지만 연달아 읽는 것은 피하고 본다.
더구나 우리나라 작가의 경우엔 더 멀리멀리 간격을 두고 읽는 편인데
비로소 '이승우 작가'의 책에는 확실한 지지와, 확실한 신념이 생겼다.
깡그리 모아 볼 작정을 세워도 본다.
귀한 작가이다.
♣'천산 수도원'..
서해가 내려다보이는 해발 890m의 가파르고 험한 천산 정상에 세워진 수도원은, 폐허 되어 버려진 건물로 우연한 기회에 세상에 알려진다.
'강영호'라는 여행작가는 우리나라의 오지와 사라져 가는 유적지를 소개하고 세상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특별한 여행지들에 관한 출판 준비를 하던 차 폐암 선고를 받고 7개월 만에 죽는다.
그의 동생 '강상호'는 남미 주재원으로 외국회사에 10년째 근무하다가 귀국해 형의 유품을 정리한다. 그리고 형이 출판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 여행지의 마지막 부분, '천산 수도원'에 관한 소개 글이 미완성이었음을 확인한 후 그 원고가 마치 자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형의 투병에 관해 무심했던 죄책감을 덜어보고자 마무리를 위해 휴가를 내어 '천산 수도원'을 방문한다.
'헤브론 성( 이스라엘의 도피 성,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몸을 피하는 곳'), '하늘 집'이라고 불리는 그곳은 전기를 비롯한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지 않은 곳으로, 1970년대 초까지 건재했다 한다. 독특한 믿음을 가진 한무리 종교인들의 공동체였던 이곳의 벽에 씌어진 글자들이 있다. 벽서,, 흙벽에 성경을 옮겨 적은 이 글자들은 구약과 신약 모두의 방대한 분량이었다.
'강상호'의 답사 이후 여행기의 마지막 장을 채워 출판되지만 독자들의 반응은 별로라 잘 팔리지도 않는다.
그런데 부천의 한 신학대학교에서 교회사 강의를 하는 강사가 이 천산의 벽서를 트리니티 대학 도서관에 있는 [켈스의 책]과 견줄만하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 일컫는 [켈스의 책]은 9세기에 만들어진 성경 책으로 송아지 피지에 라틴어로 기록한, 화려한 필체와 그림이 있는 복음서이다.
천산의 벽서 역시 다양한 컬러와 그림으로, 하지만 복음서만 기록한 [켈스의 책]과는 달리 성경 전체를 기록한 것.
교회사 강사 '차동연'은 의문을 품었고 기독교 단체와 소속 학교의 지원으로 연구를 하게 되는데,
요양원에서 죽어가는 '장'이란 사람에게서 연락이 온다. 죽음을 앞둔 그는 죄책감을 덜어내고자 자신이 한일, 본일을 '차동연'에게 들려준다.
1950년대 초에는 전쟁 후 궁핍, 질병, 공허, 혼란이 전국을 뒤덮었던 시기로, 허기지고 상처받고 뒤틀린 영혼들로 가득해 삶의 다른 차원을 갈구하는 열광적인 종교운동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던 때였다.
그리고 이야기는 사랑에 관한, 그것도 첫사랑에 관한 말랑말랑할 것 같은 이야기로 전환된다.
사촌 누이 '연희'를 사랑한 '후', 바닷가 마을에서 마지막 복무 중인 '박 중위'가 읍내 미용실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스무 살의 그녀에게 반해, 막무가내로 들이대는데, '연희'는 시골처녀 특유의 수줍음과 유별나게 강한 자존심으로 아랑곳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십대의 남자 '박 중위'는 고교시절의 첫사랑이었던 여섯 살 연상의 주일학교 여선생의 긴 생머리와, 버스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연희'의 긴 생머리를 오버랩하여 집착하고 집요해진다. 그는 결핍과 좌절의 경험이 별로 없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마약중독자와 사랑에 빠진 사람의 뇌 활동이 유사하다 한다.
고아인 '연희'에게 있어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가족의 배신으로 '박 중위'는 그녀를 유린했고, 버렸다.
그녀는 집을 나갔고,
'후'는 '박 중위'에게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고, 살인을 저질렀다 생각했고, 아버지 손에 이끌려 '천산 수도원'으로 들어간다. 피투성이의 꿈에 시달리면서 불안과 혼란 속에서 형제들의 도움으로 차차 안정을 찾아가는데,,
독특한 믿음을 가진 한무리 종교인들의 공동체인 이곳 '하늘 집'의 근본정신은
각자는 하나님 앞에 단독자이지만, 서로는 서로에 대해 동등한 형제였고 각자가 혼자이면서 전체가 하나인 곳이다.
그들의 특이한 삶의 태도에 처음엔 약간의 경이로움과 호의적인 긴장감을 가지다가 점차 섞여 들어 평안함을 유지하며 '후'는 삼 년 동안 성경을 꼼꼼히 읽고 세 시간 기도하고 하루 한 끼를 먹으며 성경을 필사한다.
그가 마지못해 입으로만 읽고 쓰던 성경에 사로잡힌 데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야기가 있다. '압살롬'이 자신이 누이 '다논'을 범한 아버지의 장남이자, 이복형제인 '암논'을 죽여버리고 아버지의 권력에 도전하는 장면. 훗날, '압살롬'은 자신의 딸이름을 '다말'이라 지었는데 '후'는 그부분을 이상하게 받아들인다. '압살롬'의 다말을 향한 사랑이, 형제애 이상의 것이었는지도 모를일이라 여기며 '후'는 자신을 '압살롬'과 동일시한다. 그에게 성경은 큰 거울이 된다. 성경이 비추지 못하는 것, 비출 수 없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공식적인 자리에서 선글라스를 벗어본 일이 없는 남자 '한정효'..
그는 군사 쿠데타의 중심인물이었다.
'박정희 장군'을 따라 한강을 건넜고,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아내와는 아이가 없었고 그의 아내는 새벽 기도를 열심히 다녔고
그는 며칠에 한 번씩 집에 들어가면서 바쁘게 권력에 최중심에 있는 장군의 그림자 역할에 충실했다.
임파선에 악성 종양이 생겨 죽어가는 아내에게 그녀가 믿는 전지전능자에 대해 반발하고 질문해 보지만
[이하생략]
"혹시 저 무수하게 많은 굉장한 말씀들이 젊은이의 현실에 아무 작용도 하지 않아서 마음 상해 있다면, 주제넘다 말고 내 말을 잘 들어 봐요.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저 굉장한 말씀들은 애초에 이 세상을 이길 힘이 없어요. 세상은 크고 무섭고 힘이 세요. 언제나 그랬어요.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그에 비하면 말씀은 무력하기 짝이 없어요. 그건 말씀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씀이 가진 힘이 다른 힘이기 때문이에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말씀은 세상에 능욕당하고 옷 벗기고 채찍질당하고 창에 찔리고 못이 박혀 죽을 수밖에 없어요. 다른 힘이기 때문이에요. 하찮은 것이 자주 위대한 것을 이겨요. 예수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생각해 봐요. 그분은 땅의 법칙에 철저히 무력했어요. 그분이 무능한 것은 그분의 능력이 땅의 법칙 저 너머에 있기 때문이었어요. 말씀들의 위대함도 땅의 법칙 너머에 있는 위대함이에요. 말씀들이 이 무자비하고 막무가내의 현실을 무너뜨리고 이기고 지배하리라고 기대하지 마요. 말씀이 굉장한 것은 현실을 이기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을 넘어서기 때문이에요. 현실에서의 철저한 무능이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말씀의 능력을 역설적으로 증거하는 거예요. 엉뚱한 데에다 말씀을 들이대지 말아요. 세상은 언제나 악하고 어느 시대나 힘이 세고 어디서나 무자비해요. 그러니까 젊은이, 외람되게 충고하는데, 그 때문에 절망하거나 마음 상해하거나 넘어지지 마요."291-29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