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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평점 :
'책의 뒷면에 '이것은 누아르가 아니다. 이것은 차라리 우리 안에서 늘 끓어넘치고 있는 그 뜨거운 것들에의 송가다. ' 막연했던 누아르.. 범죄와 폭력을 다루면서, 도덕적 모호함이나 성적 동기에 초점을 맞추는 일군의 영화..
'김언수'를 만나는 세 번째이다. [설계자들], [캐비닛].. 모두 강렬했고, [설계자들]의 '래생'은 아직도 오래된 중고서점 어딘가에서 툭 튀어나올 것 같이, 책을 읽는 내내 사로잡혔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이 작가의 책은 '작가의 말'이 너무도 인상 적였던 기억이 있다. 소설을 전부 읽어낸 후에 그가 밝히는 그의 말을 읽으면, 어찌 보면 매력적인 그의 소설보다 더한 매력으로 작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게 한다. 두꺼운 책을 읽어가면서 결론만큼, '작가의 말'은 어떻게 썼을지를 궁금해하며 읽게 되는 책인 셈이다.
[고래]의 작가 '천명관'이, 영화감독자로 나서게 되는데, 그 첫 작품이 [뜨거운 피]라고 해서, 의아했다. 역시나 강렬했던 [고래]도 영화로 충분한 소재이겠거늘, 감독 데뷔작으로 그가 택한 시나리오가 되었다고 해서 궁금했던 책..
무대는 부산의 낡은 항구도시 '구암'.. 시대는 '노태우'정권에서 '김영삼' 정권으로 들어서는 어느 봄, 여름.. 1990년 [범죄와의 전쟁]이 마무리되어가던 때이다.
'구암'의 건달들은 양복을 입지 않는다고, 양복 입고 설쳐대는 건달들이, 추리닝 입고 설쳐대는 건달들 보다 더 먼저 감옥에 가고, 더 오래 감옥에 있다고' 주장하는 '손 영감'은 일제시대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만리장 호텔'의 사장이자 '구암' 암흑가의 두목이다.
그는 건달로서 그저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는 게 성숙하고 아름다운 자태라고, 건달이 폼 나고 이름을 날려봤자 갈 데는 감옥뿐이라고 자신의 오른팔 '희수'에게 늘 말한다.
18세에 건달 세계에 입문해서 50년 동안 살아남은 자신은, 더러운 바다에서 매춘, 밀수, 물건을 훔치고 불법 도박장을 운영했어도, 서슬 퍼런 '박정희 정권', '전두환의 삼청 교육대' 광풍, '노태우의 범죄와의 전쟁'에서도 살아남은 비결을 강조하지만, 마흔의 '희수'는 이런' 손 영감'이 장악한 항구에서 큰돈이 되는 덩치 큰 밀수는 하지 않고, 고춧가루나 깨 등을 밀수하게 하는 처사를 겁쟁이라고 못마땅해 한다.
'만리장 호텔'은 2층짜리 건물로, 1913년 일본인들의 유흥을 위해 만들어진, 일본 야쿠자들이 실질적 주인이기도 했던 곳으로, 구암 원유 주식회사를 만들고 조선 최초의 해수욕장을 만들면서 지어진 곳으로, 일본식 목조건물이었던 것을 한국 전쟁 이후 철근 시멘트로 개보수한 곳이다. 케이블카도 있고, 다이빙대와 구름다리도 있었던 일제시대, 이때가 구암 바다의 최고 전성기였다.
그곳의 바지 사장이었던 '손 영감'의 조부 '손흥식'이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이 패망하자, 슬쩍 삼켜버려 주인이 된 것이고, 그 시절엔 일본인을 주인으로 모시던 마름들이, 혼란한 시국을 틈타 일본의 사업체나 비밀스런 재산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흔했다고도 한다. 해방 직후 1960년대까지, 낮의 대통령은 '이승만', 밤의 대통령은 '손흥식'이 었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엔 '이기붕'에게 밉보여 경찰에 끌려가 맞고 이틀 만에 죽었고, 그의 아들, '손 영감'의 아버지는 미군들과 시비 끝에 칼을 맞고 죽는다.
'손 영감'은 큰 권력 앞에서 설치고 까불면 모난 돌이 정맞아 죽는다고, 건달은 그저 쥐 죽은 듯 조용히 사는 것이 최고라는 좌우명을 갖게 된다. 그래서 개폼도, 똥폼도 잡지 말라고 한다.
그들이 무기 창고라고 부르는 밀수품 보관소에는 손은 많이 가고 돈은 안되는 고춧가루, 마른 멸치. 콩, 들깨 등이 넘쳐난다. 그들은 이것을 소량의 국산과 버무려서 국산품으로 둔갑시켜 차액을 챙긴다.
'희수'는 '모자원'이라고 하는 전쟁미망인들이 자녀를 데리고 자립할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해 선교사들이 지은 시설에서 성장했다.
그의 어머니는 춤바람이 나서, 도망을 갔고, 그곳에서 일곱 명의 동생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제 어머니와 포장마차를 하다가 결국엔 제 발로 '안월동'으로 찾아가 창녀가 된 '인숙'이, 열세 살 때부터의 첫사랑이었다.
변두리 지역 깡패의 중간 간부로, 부하들 몰래 우울증 약을 먹고 있는 전과 4범의, '만리장 호텔'의 지배인이기도 한, 그는 호텔 구석에 달방을 살면서, 담배와 술과, 노름에 빠져 제법 많은 빚도 가지고 있다.
'인숙'에게는 4년 만에 출감하는 아들 '아미'가 있다.
1930년대 부산의 인구는 고작 20만이었고, 부산항은 쇄국정책으로 포구 수준이었지만, 한국전쟁이 터지자 부산의 인구가 급증하여 4백만에 육박했다. 전쟁은 물자를 넘쳐나게 했고, 물자는 큰 항구를 필요로 했다. 부산은 뜨내기와 악에 받친, 자기 몸뚱이 말고는 가진 게 없고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는 피난민들이 만든 곳이다.
'손 영감'이 이끄는 구암 해변이 대부분 토박이 들인데 반해,
'영도'는 부산 폭력조직의 본거지로 한국 전쟁 때 피난 온 건달들로 출발해서 오십 년 가까이 부산을 지배해온, 전국 규모의 조직이 항구를 지배하고 미군 군사물자, 러시아 마피아., 일본의 야쿠자들과 지속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이곳은 '남가주'회장이 지배하고 있다.
'인숙'이 열일곱의 나이에 낳은 아들 '아미'는 190센티의 120킬로그램을 육박하는 거구로 아버지가 누군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성은 주 씨이다.
'영도'의 실세 건달들과 싸움 끝에 감옥에 가게 된 그는 4년 만에 출감을 하고, 도망간 여자부터 찾는다고 강원도로 갔다.
사춘기 시절, 떡잎부터 건달이었던 '아미'는, '인숙'과 친하고, 자신의 학교 방문 등을 대신해 주던, '희수'를 좋아해서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른다.
-중간생략-
재밌게 읽은 책이다. 분량은 많지만..
건달들의 철학과 건달들의 인생사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조폭이 건달이고, 건달이 깡패이고, 깡패가 양아치라고 생각했는데
건달과 양아치는 엄격히 다른가 보다
다들 진정 건달로는 불려도
양아치라고 불리기는 싫어한다.
아예 건달은 뭔가 로맨틱하기까지 하다.
많은 돈을 주무르지만, 결코 부자가 되기는커녕
늘 빚더미에 앉게 되는
'건달식 산수'
'창녀식 산수'가 인상적이고, 안타깝다.
밥처럼 심심한 사람 '손 영감'보다
설탕처럼 단 '양동이'를 선택했던 '희수'
뻔한 조폭 이야기이지만, 심장을 쫄깃거리게 만든다.
올해 개봉한다는 이 영화의 '희수'역은 배우 '정우'이다. '손 영감' 역은 '김갑수'이고,
책을 읽는 내내 '정우'의 표정과 말투로 '희수'를 읽게 된다.
영화 [바람]에서 '정우'의 표정연기.. 결코 잘생긴 배우가 아니지만, 괴물인 배우
'정우'를 클로즈업하면서 표정을 읽게 만드는 '정우표 연기'가 기대되고,
역시나 법상치 않은 '천명관'의 프리즘으로 들여다보게 될 영화를 기대해본다.
안 볼 수가 없는 영화인것이, '천명관'이고, '김언수'이고, '정우'의 삼박자이므로..
영화의 시작은 어디서부터 일까?
'희수'에게 펼쳐질듯한 화양연화, 사무실 신에서부터 일까?
'달자'아저씨의 배에서부터 일까?
'남가주'와 협상하던 '멍텅구리배'부터일까?
아니면 '빨래 공장'부터?
혹시, '이누이트'의 얼음집에서?
그리고 '김언수'작가의 말은 역시나이다.
그린란드의 '이누이트족', 그중 80%가 우울증을 앓고, 매년 천명 중 서른다섯 명이 자살을 한다고. 강인한 유전자로 태어나 동토의 땅에서 강인한 삶을 살아가면서, 얼음집 안에서 사람들의 따뜻함을 지향하던 그들은 관대하고, 인정 많고 유머감각과 잘 웃는 성향이지만, 그리하여 결코 화를 내거나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고 불평도 불만도 말하지 않고, 남들을 간섭하지도 않고 서툰 동정이나 위로 따위도 하지 않고,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거칠고 뜨거운 이 사람들이,
상냥하고 온순하고 평화롭게 지내다가 어느 날 마음에 견딜 수 없는 격정과 우울이 찾아오면 조용히 얼음집 밖으로 나가 혼자서 자살을 한다고, 그리하여 이제 더 이상 뜨겁지 않은, 더 이상 물기 없는 '희수'란 사내는 구암을 잃고 '이누이트'를 닮아간다고. 그리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 사내의 삶이 보기 좋으냐고? 미숙하고 촌스럽고 어른스럽지 못한, 구암의 사람들이, 그 지리 멸렬한 삶이 그립다는 작가, 그 시절엔 차라리 외롭지 않았다고..
- 사람들은 이제 뜨겁지 않다. 뜨거운 것들은 모두 미숙하고 촌스럽고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죄목으로 촌충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구암의 그 지리멸렬한 삶이 그리워진다. 구암의 시절엔 짜증 나고, 애증하고, 발끈해서 술판을 뒤집었지만 적어도 이토록 외롭지는 않았다. 595
- 이 밤에 혼자 소주 병을 따며 나는 상처를 주지 않고 사랑을 건넬 방법을 떠올려본다. 상처를 받지 않고 사랑을 받을 방법을 떠올려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든다. 그런 삶은 없다. 모든 좋은 것은 나쁜 것과 버무려져 있다. 문을 닫으면 악취가 들어오지 않지만 꽃향기도 들어오지 못하는 것처럼. 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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