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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한때는 인간이었다 - 개정판
막심 고리키 지음, 서은주 옮김 / 큰나무 / 2007년 5월
평점 :
뭔가 회한을 잔뜩 품은 이 적나라한 제목의 책은 '막심 고리키'의 짧은 소설이다. 한때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였다는 [어머니]에 이어 두 번째 만나는 작가이다.
이 책은 [어머니] 보다 2년 앞서 발표되었다.
한때 인간이었던 그들, 지금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는, 짐승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도시 중심부에서 추방된 사람들,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빈곤층에 대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인간 삶의 초라함과 우주의 비정함을 드러내 작가 자신의 종교, 사상, 철학에 대한 관점을 반영했다고 평가받는 이 작품은, 러시아 혁명과는 관련 없어 보인다.
가난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의 외곽, 길이 끝나는 곳에 서있는 2층 집, 마을의 상인 '주다스 페투니코프' 소유의,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커다랗고 오래된 이 집의 본채는 아무도 살지 않고, 한때 대장간이었던 헛간을 '쿠발다'라는 사람이 임대하여 싸구려 여인숙으로 운영하고 있다.
다리를 절고, 늘상 군복을 입고 지내는 40대의 '쿠발다'는 은퇴한 대위이다.
한때는 직업소개소도 운영했다 하고, 귀족 출신이라고도 하는데 담배와 술에 절어 지낸다.
그 여인숙에는 마을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기거하고 있다.
지붕과 벽만 있는 집,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어차피 안락과 사치 따위에는 익숙지 않은 가난한 부랑자들로
오랜 기간 동안 투숙하기도 하고, 나가서 새삶을 살아보려 하다가도 다시 찾아오게 된다.
'쿠발다'는 이들 가난한 투숙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왜냐면 언제나 웃음 짓고 자신들에게 관심을 보이며 농담 섞인 그의 일장 연설이 언제 들어도 좋기 때문이다.
이 싸구려 여인숙에 모여든 사람들은, 진탕 술을 마시고, 가진 돈을 술값으로 모두 써버리며 짐승처럼 지낸다.
숱한 운명의 씁쓸한 장난을 겪으며 삶에서 추방당하고, 생존을 위한 싸움에 지칠 대로 지친 이들은 술과 심술에 절어, 더럽고 추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들도 한때는 인간이었다.
계속된 불행의 규칙을 되풀이하며 자기 인생에 잔뜩 화가 나 있는 이들은
힘들고 고단한 인생 쇠사슬의 고리를 어쩌지 못해 한때는 마누라였던 여자들을 때렸고,
겨울이 다가오는 지금은 두려움으로 서로를 패고 난폭하게 굴면서 더 거칠어져있다.
이들 중, '쿠발다'와 가장 말이 통하는, 서열상 가장 가까운, 선생이라 불리는 '필립'이 있다.
그는 한때는 도시학교 선생이었는데 해고되었고 가죽 공장 등등의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사법시험에도 합격하여 변호사가 되었지만, 술 때문에 운명이 뒤틀려 이곳까지 흘러들어와 여인숙 인생을 살고 있다.
그는 지역신문의 기자로 기사를 써서 돈이 들어오면 절반은 거리의 아이들에게 쓰고 남은 돈으로는 모든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술을 퍼마신다.
-중간생략-
실제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러시아는 유럽에서 후진적인 농업국가에 속해있었고, 크림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해, 본격적인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어 산업노동자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 산업노동자와 혁명의 이야기가 [어머니] 라면,
이 책에서는 어떤 투쟁의 의지가 보이지는 않지만 근대화, 산업화에 도태된 인간들의 소외 내지 상실에 관한 자조적인 작가의 관점이 드러난다.
'쿠발다' 대위가 '그들도 한때는 인간이었다'라고 계속해서 언급하는데 책 속에 반은 친근한 마음, 반은 비꼬는 말투라고 밝혀두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막심 고리키'는 빨갱이 작가로 낙인찍혀, 1987년 6월 항쟁까지 그의 책들은 모두 금서였다.
가난하고 불우한 유년을 보낸 그는 독학으로 글을 깨우쳐,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한 문체 구사로 당시에 비난도 많이 받았다는데
실제 그의 작품들에서 묘사나, 문장의 아름다움을 찾기는 힘들고, 혼란의 러시아, 혁명 시대의 러시아 서민들의 삶을 잘 보여주는데 의의가 있다 보겠다.
러시아인들은 예술적 소질이 풍부하다고 한다.
문학사에서 대문호 하면 당연하게 러시아의 작가들을 떠오르게 하는 것만 보아도 문학사상 러시아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묵직하다.
흔히 '막심 고리키'를 19세기 러시아 문학과 20세기 소비에트 문학을 잇는 교두보로, 20세기 새로운 문학의 기초를 세운 인물로 평가하는데
21세기의 러시아 작가는, 그들에게 흐르는 예술가의 진한 피를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지? 한 백 년쯤은 기다려야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