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작가는 이 책을 길고 긴 연서를 쓰는 마음으로 썼다고 밝힌다. 그리고 아마도 못생긴 여자와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다룬, 최초의 소설이 될 것이라고..
눈을 맞으며 서 있는 그녀를 만나던 그곳, '의정부' 어디쯤..
그와 그녀 모두 스무 살이 되던 해, 그해 첫눈이 내리던 날, 그의 생일인 날
1986년의 12월이다.
그녀와 들른 카페에서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음반을 생일 선물로 받고
카페에 걸려 있는 그림과 사진 액자들 중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시녀들)] 그림을 본다.
그녀가 가장 좋아한 작곡가가 '모리스 라벨'이고
그 '라벨'이 바로 이 그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작곡했다는 곡이 바로 이곡 파반느(무곡)이다.
'벨라스케스'는 이 그림을 가운데 귀엽고 아름다운 네 살짜리의 왕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훗날 21세에 요절하는 그녀를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지만, 그는 오늘 쪽 강아지 뒤의 검은 드레스를 입은 난쟁이 추녀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실제로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보았던 저 그림, 그 당시 왕궁에서는 난쟁이나 기이한 모습을 한 사람들을 수집하기도 했었다고, 왕족들 가까이 두고, 신기한 장난감 수집하듯 하기도 했지만, 일종의 나쁜 기운이나 병마를 막는 액막이 같은 역할도 주어졌다고 하는 가이드 설명을 들은 바가 있다.
못생긴 추녀를 대하는 자세는 그래왔던 거다.
매우 서정적이고 편지글 같은 대화체로 가독성도 좋은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류인 남성 작가의 서정성이 잘 드러난다.
블로그 이웃 '영*'님의 리뷰를 보다가 단숨에 읽겠다했고,
연말, 12월, 첫눈 내린 언저리쯤 읽게 되어서 정말 다행인 책..
그의 곁에 있는 그녀가, 그가 사랑한 그녀의 모습이 저 추녀만큼이나 못생긴 여인이다.
길 가던 사람들이 놀라서 돌아볼 만큼, 재수 없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남자들 무리 중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그녀에게 말을 거는 것이 끔찍한 벌칙인 만큼,
인간에겐 늘 열광할 만큼의 아름다움이 필요했고
인간에겐 늘 멸시할 만큼이 추함이 필요했다면, 바로 그녀..
하지만 그에게는 저 추한 난쟁이가 왕녀이다.
1985년 재수를 하던 그와 식당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꾸리던 못생긴 엄마, 그리고 무명의 무술배우인 미남 아버지의 배신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버지는 운동으로 다져진, 작고 날렵한 체구, 어머니는 크고 펑퍼짐한 박색으로
그들의 결혼은 어머니 입장에서 아버지는, 그녀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미남이었고, 아버지 입장에서 어머니는, 희망 없는 삼류배우의 숙주 같은..
그런 이상한 삶이었다.
영화사 앞 식당에서 일하던 그녀에게 삼류 배우는 소주잔을 내려놓는 모습도, 오토바이를 타는 모습도 늘 새것처럼 빛나던 구두도 설레었던 존재..
무명이던 아버지가 주목을 받기 시작하자, 집을 나가고 10년 연하의 사업가와 결혼한다는 보도가 뜨고
아버지의 외모를 빼닮은 그는 어머니가 삶을 놓아버릴까 봐 전전긍긍한다.
겨우 추스른 엄마는 이모가 있는 그녀의 고향 강릉에서 식당 일을 하며 자리를 잡아간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그해 여름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짧은 소설들을 쓰기도 한다. 그리고 백화점 주차장에서 알바를 시작한다.
그곳에서 그녀, 세기를 대표하는 추녀를 만난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그의 머릿속에선 요들 송이 들려온다. 특별하다 싶을 정도로 못생긴 그녀를 보며 가슴이 답답해지고, 슬퍼지기도 한다.
그녀는 늘 혼자 일한다.
정규직 비정규직의 구분이 모호하고, 노동자의 권리나 개념 자체도 불투명하던 시절
그리고 뭔가 매우 능숙하지만 매우 특이한 존재 '요한'도 만난다.
'요한'과 가까워진 그는 '캔터키 치킨'이라는 맥줏집에서
함께 빈번히 퇴근 후의 시간을 보내는데
그곳은 beer를 bear로, hof를 hope로 표기해놓은..
그래서 곰을 생각하고 희망을 생각한다.
'요한'의 엄마는 '올리비아 핫세' 같은 미모의, 한때 배우였지만, 이 백화점 회장의 첩이 되어 숨어 있어야 하는 여자였고
결국 회장의 변심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고,
'요한'은 백화점 측의 배려로 그곳에서 일할 수 있었지만,
그의 기질상 박차고 나와 주차장 일을 하게 된, 조증과 울증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
'요한'의 도움으로 그의 마음이 그녀에게 전달되고
상처투성이 청춘 셋은 그렇게 '캔터키 치킨'집에 모여들고
사람들 많은 곳을 피하던 그녀와 유원지 데이트를 나서는데
그녀는 묻는다.
나와 함께 있는 것이 부끄럽지 않냐? 고
-중간 생략-
작가는 고백한다.
자신 역시 세상 모든 남자와 마찬가지로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고..
사랑을 역설하면서 사랑하기를 바란다면서,
그리고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는 자신의 얼굴을 갖기 바란다고..
외모에 대해 추함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박색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나 시선이 이렇게 잔인할 수도 있구나, 이런 상처도 있구나~~
완전 반대 선상에 있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도 떠오르고..
모든 사랑은 오해다.
하지만 오해를 믿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이 부분과 아래 페이지가 가장 강렬하다.
그래도 결국 이 소설의 주제는 사랑이다.
그리고 스무 살이란 그런 것..
'인간의 내면은 코끼리 보다 훨씬 큰 것이고, 인간의 외면은 손바닥만큼 작은 것인데, 왜 모든 인간은 코끼리를 마주한 듯 그 부분을 더듬고 또 더듬는 걸까? 코끼리를 마주한 듯 그 앞에서 압도되고, 코끼리에 짓밟힌 듯 평생을 사는 걸까? '
내면을 볼 수 없음이, 일부라도 보여지는 것이 외모일 뿐임이 몹시 안타깝지만, 이 글을 읽고도 늘 그래왔듯이 외모로, 첫인상으로, 보여지는 손바닥만큼의 것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해버릴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지 않았을 때와는 좀 더 다른 생각도 하기는 할 텐가? 나는..과연 그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