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후배의 집들이 차 찾아간 돈암동에서 그녀가 예전에 살았던 곳, 자신이 살던 집터를 어렵게 감만 잡은 후, 그 남자네 집을 떠올려본다.

전쟁 전, 살림의 규모를 줄여서 이사해왔던 자신의 집 근처에 엄마의 외가 쪽 친척 집도 이사를 오게 된다.

그리고 자신보다 어린, 그 집의 막내아들을 보면서 그녀는 설레는 자유에의 예감을 느낀다.

전쟁이 나자 그녀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고 미군부대에 취직을 했다.

아버지와 오빠는 좌익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그 남자의 형과 아버지는 월북을 했고, 그 남자는 전쟁에 나갔다가 상이군인이 되어 명예제대를 한다.

폐허가 된 서울 거리를 쏘다니면서 그들은 어울린다.

철없고, 자신을 돌보려 월북하지 않은 엄마를 원망하던 그 남자는 '정지용'과 '한하운'의 시를 낭송하고 음악을 듣는다. 암울하고 극빈하던 흉흉한 전시를 견디게 하는 것은 시였노라고..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드는 통에 의식주의 절대 부족으로 그야말로 서울은 아가 사리 끓듯 한 모습이었다.

맨날 붙어 다녔지만, 손 한번 마주 잡은 적 없는 사이였고, 손아래, 먼 친척뻘 동생과의 어울림은 양가에서도 전혀 의심받을 일 없는 사이였지만, 그들에겐 연애였고, 서로가 첫사랑이었다.

그녀는 그 남자와의 거리가, 순결의 중요성보다 임신의 두려움으로 인한 거리였다고도 한다.

그리고 그녀는 전쟁통에 같이 미군부대에서 일하던 은행원과 결혼을 한다.

자상하고 속 깊은 남편과 대단한 음식 솜씨를 지닌 홀시어머니와 살면서, 문화가 다르다느니, 남편이 쪼잔하다느니, 미신을 믿는 시어머니의 음식에 대한 열정과 호사를 탓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남편과 시어머니는 매우 좋은 사람들이었다. 단지 그녀의 불만은 변화를 꿈꿀 수 없는 안정감이 주는 막막한 권태였고 일종의 사치였다.

남편의 배려로 엄마와 하숙을 치던 올케가 동대문에 포목점을 열게 되어, 가끔 들러보던 어느 날, 그 남자의 큰누나를 우연히 만난다.

그녀에게 이끌려간 다방에서 그 남자가 많이 힘들어한다고, 건강상의 이유로 휴학을 하고는 발작처럼 소란을 피우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녀가 자신의 첫사랑이었노라고도 말했다고 한다. 그 남자의 누나는 자신의 막냇동생이 힘들어하는 이유가, 그녀의 결혼에 대한 충격이었다고도 생각되어, 그녀더러 한 번씩 자신의 동생을 만나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밀회가 시작된다.

행복한 밀회가 거듭될수록, 그녀는 자신의 시집살이가 한결 부드러워진다고 느낀다.

그때 신문에 연재되던 소설이 그 유명한 [자유부인]이다.

남편은 유독 다음 횟수를 기다리면서 읽기를 즐기고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회사 동료들 사이에선 그 소설 속 여주인공 이야기가 매우 중요한 화젯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의 그 화제가 불편했고 읽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처녀 시절 읽던 [보바리 부인]을 찾아 책장을 뭉텅이로 넘기면서 몇 구절 읽는 걸로 떠돈다.

그 남자가 어느 날, 마석에 있는 자신의 선산에 나들이를 가자고 한다. 둘이 청량리역에서 만나기로 한 날, 그는 결국 나타나지 않는다.

하루 종일 기다림에 지친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몇일동안 독감을 앓고, 그리고 그 남자의 병소식을 듣는다.

뇌 수술과 실명, 그리고 벌레 이야기..

그와의 사랑이 그 남자의 머릿속에 들어있던 벌레들이 시킨 일이었는지.. 엉뚱한 회의를 품어보지만,

그녀는 아이를 낳고, 또 낳고

나이를 먹는다. 취업한 자녀들에게 용돈을 받을 만큼의..

그리고 그도 늦은 결혼을 했고.

그 남자의 어머니 장례에 찾아가서 울던 그를 안아준다.

그와의 결별은 그것으로 족했노라고, 신문을 통해 그 남자의 부음을 듣고 문상을 가지 않겠다 한다.

전쟁 이후를 살아가던 청춘의 이야기,

'광수'라는 먼 친척과, 그녀의 뒤를 이어 미군부대에 취직했으나, 결국엔 양공주가 되어, 자신의 가족을 책임졌지만 사랑은 없었다는, '춘희의' 이야기도 병행한다.

그 힘든 시절의 청춘, 그리고 사랑, 불륜일 뻔했던 사랑 이야기를 참 담백하게 그녀답게 이야기한다. 그런 작가만의 여백으로 인해 감성의 에너지를 줄여 더 몰입할 수 있달까 ..

 

 

 

첫사랑이란 말이 스칠 때마다 지루한 시간은 맥박 치며 빛났다. 그 남자를 다시 만나기까지는 일주일이 나 남아 있었지만 오래간만에 맛보는 기다림의 시간은 황홀했다. 무엇을 입고 나갈까. 첫사랑이 긴 치마를 허리띠로 동여매고 시장바구니를 들고 나타난다면 그 남자가 얼마나 실망할까. 나 또한 그 남자가 첫사랑이거늘. 그건 첫사랑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나는 이것저것 좋은 나들이옷을 꺼내 입고 거울 앞에서 나를 비춰보았다. 어떤 옷은 점잖아 보이고, 어떤 옷은 촌스러워 보이고, 간혹 요염해 보이는 옷도 있었다.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남자가 나에게 해준 최초의 찬사는 구슬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구슬 같은 처녀이고 싶었다. 169

- 우린 틈틈이 만났다. 언제 만나자는 약속을 못 지킬 적도 없지 않았다. 전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붓하던 우리의 연애질이 어쩔 수없이 산만해지고 있었다. 연애질보다 급하고 실제적인 일이 우리를 필요로 하면 서슴지 않고 약속을 뒤로 미루었다. 때로는 거짓 일을 꾸며대면서까지 약속을 안 지킬 적도 있었다. 우린 이제 마지막 남녀가 아니라 수많은 남자 여자 중의 하나였다. 한 사람에게 몰두하는 일이 얼마나 집중력을 요하는 중노동이라는 걸 서서히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신경 써야 할 잡무가 많은데도 그게 오히려 휴식이 되었다. 연애질에서 비켜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그 남자에게 싫증이 난 건 아니었다. 연애의 권태기가 온 것 하고도 달랐다. 만일 그 남자를 못 만났더라면 그 시절을 어떻게 넘겼을까. 그 살벌했던 날, 포성이 지척에서 들리는 최전방 도시, 시민으로부터 버림받은 도시, 버림받은 사람만이 지키던 헐벗은 도시를 그 남자는 풍선에 띄우듯이 가볍고 어질어질하게 들어 올렸다. 황홀한 현기증이었다. 이 도시 골목골목에 고인 어둠, 포장마차의 연탄가스, 도처에 지천으로 널린 지지 궁상들의 그 갈피에 그렇게 아름다운 비밀을 숨기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그 남자하고 함께 다닌 곳 치고 아름답지 않은 데가 있었던가, 만일 그 시절에 그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 인생은 뭐가 되었을까. 청춘이 생략된 인생, 그건 생각만 해도 그 무의미에 진저리가 쳐졌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감사하며 탐닉하고 있는 건 추억이지 현실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그 한가운데 있지 않았다. 행복을 과장하고 싶을 때는 이미 행복을 통과한 후이다. 그와 소원해진 사이에 느낀 휴식감도 절정감 못지않게 소중했다. 긴장 뒤엔 반드시 이완이 필요한 것처럼. 그러나 한번 통과한 그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전적인 몰두가 사람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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