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식목일, 나무들에게 감사하며. 열린책들 '안나 까레니나'(이명현 역) 상권으로부터.

사진: UnsplashOlga KHARLAMOVA


「그러니까, 자작나무 골짜기 너머에서 토끼풀을 파종하고 있다는 거지? 가서 한번 봐야겠군.」 마부가 끌고 온, 몸집 작은 암갈색 말 꼴삐끄에 올라타며 그가 말했다.

「개울을 건너서는 못 가십니다, 꼰스딴찐 드미뜨리치.」 마부가 소리쳤다.

「그럼 숲으로 해서 가겠네.」

레빈은 순한 말의 씩씩한 발걸음에 의지하여 마당의 진창을 지나 문밖 들판으로 향했다. 한참을 마구간에 서 있던 말은 웅덩이만 나타나면 콧김을 힝힝 뿜으며 고삐를 재촉하였다.

가축우리와 곡물 창고에서도 즐거운 기분이 들었지만 들녘으로 나가자 한층 더 흥겨워졌다. 순한 말의 발걸음을 따라 고르게 흔들리면서, 청량한 눈의 향기와 따스한 대기를 들이마시면서, 군데군데 찍힌 발자국들이 희미해져 가고 유해처럼 파리해져 가는 잔설을 밟으면서 숲을 지나는 동안, 껍질 위에 이끼가 소생하고 싹눈이 부풀어 가는 나무들 한 그루 한 그루를 볼 때 마다 그는 기쁨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숲을 벗어나자 그의 눈앞에는 광활한 평원 속에 벨벳 융단같이 보드랍고 평평한 풀밭이 널리 펼쳐졌다. 공지나 습지라곤 단 한 군데도 없었고, 협곡에만 눈 녹은 자국이 점점이 얼룩져 있을 뿐이었다. - 제2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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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류이치 사카모토 지음 / 양윤옥 옮김)의 에필로그가 출처.


정말 행운과 풍요의 시간을 보내왔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내게 주신 분들은 우선 부모님이고 부모님의 부모님이기도 하고 숙부와 숙모이기도 하고, 또한 수없이 만난 스승과 친구들이며 일을 통해 만난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무슨 인연인지 나와 한 가족이 되어준 이들과 나의 파트너였다. 지난 57년 동안 그들이 내게 부여해준 에너지의 총량은 내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 생각을 할 때마다 한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빛조차 닿지 않는 칠흑 우주의 광대함을 흘낏 엿본 듯한 신비한 감정에 휩싸인다.

나는 왜 이 시대, 일본이라는 땅에서 태어났는지,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니면 없는지, 단순한 우연일 뿐인지……. 어린 시절부터 그런 의문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지만, 물론 분명한 해답을 만났던 적은 없다. 죽을 때까지 이런 물음을 던지는 걸까. 아니면 죽기 전에는 그런 물음조차 사라져버리는 걸까.

마지막으로 이런 인간의 개인사를 읽어야 하는 독자들에게 죄송스러운 마음과 함께 "고마워요"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2009년 1월
사카모토 류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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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손보미의 단편 '이전의 여자, 이후의 여자'(악스트 2020년 7/8월호 발표, '사라지는 건 여자들 뿐이거든요' 수록)로부터 옮긴다. 

배롱나무 꽃 By Meneerke bloem - 자작, CC BY-SA 3.0, 위키미디어커먼즈



배롱나무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41XXXXX00021


그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은 녹지 않고 저택 주위의 모든 것들을 꽁꽁 얼리는 데 일조했다. 저택의 벽면은 마치 얼음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금이 가서 무너지지 않을까?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은 산짐승들이 호기롭게 근처까지 내려왔다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다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버렸다. 겨울이 끝날 무렵이 되자, 얼음이 녹아서 포치와 창틀에 물방울이 맺혔다가 땅으로 뚝뚝 떨어졌다. 분수대에 쌓여 있던 눈이 녹아서 물로 변했다. 땅 위에 물이 질척질척거렸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영구하게 생명력을 잃은 것처럼 보이던 노란 잔디들에도 녹색빛이 돌기 시작했다. 저택 근처에 있는 숲, 전나무들도 뾰족한 가지에서 연두색 잎을 토해냈다. 어디선가 나비들이 날아와서 분수대 주변을 빙빙 돌다가 날아가버렸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저택의 뒤편에 우두커니 서 있던 배롱나무에서 진분홍색 꽃이 피어났고, 전나무숲은 온통 초록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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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이 피고 있다. 아래 글은 '작가의 계절'(안은미 역) 봄 편이 출처.


사진: UnsplashMasaaki Komori


[네이버 지식백과] 호리 다쓰오 [堀辰雄]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118226&cid=40942&categoryId=34422


"모처럼 여행을 왔는데 책만 읽는 사람이 어딨어? 가끔은 산 경치라도 보라고……." 이렇게 말하고는 아내와 마주 보고 앉아 그쪽 창밖을 찬찬히 둘러봤다. "여행지가 아니면 책도 제대로 읽을 수 없는걸요."

사실을 말하자면 아내에게 뭐라 불평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잠깐이라도 좋으니 아내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 나랑 같이 근처 산마루에서 새하얀 꽃을 떼 지어 피우고 있을 목련을 한두 그루 찾아내 여행의 흥취를 맛보고 싶을 뿐이었다.

"어머나, 못 보셨구나." 아내는 즐거워 어쩔 줄 몰라 하며 내 얼굴을 쳐다봤다."그렇게 몇 개나 피어 있었는데……."

"어라, 저기 한 그루 있네요." 아내가 갑자기 산 쪽을 가리켰다. "어디?"아내가 가리킨 곳을 재빨리 살펴봤지만 고작 뭔가 새하얀 물체를 얼핏 봤을 뿐이었다. - 목련꽃 _ 호리 다쓰오

「목련꽃」은 1943년 5월 잡지 『부인공론』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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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16가지 꽃 이야기- 계절마다 피는 평범한 꽃들로 엮어낸 찬란한 인간의 역사'(캐시어 바디 지음, 이선주 옮김) 원제 Blooming Flowers: A Seasonal History of Plants and People - 가 아래 글의 출처.


사진: UnsplashKristine Cinate


안데르센 동화 '얼음 처녀'를 읽기 시작했다.

설강화, 스노플레이크snowflake, 스노벨snow bell, 스노 바이올렛snow violet, 듀드랍dew drop, 딩글댕글dingle-dangle, 수줍어하는 처녀…. 스노드롭을 표현하는 다른 이름이다. 식물학적으로 그리스어 갈란투스Galanthus와 라틴어 니발리스nivalis를 결합한 스노드롭의 학명은 눈처럼 하얀 꽃을 떠올리게 한다. 스노드롭꽃은 영국에서는 1월과 2월에 피고, 루마니아에서는 3월 초에 피기 시작한다.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가 열두 달로 나누어 계절을 표현한 피아노곡 시리즈 중 스노드롭은 4월을 상징하는 꽃이다. 덴마크에서는 ‘겨울 바보’로 불리고, 전통적으로 부활절이 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유혹하기 위해 스노드롭꽃을 넣은 비밀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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