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손보미의 단편 '이전의 여자, 이후의 여자'(악스트 2020년 7/8월호 발표, '사라지는 건 여자들 뿐이거든요' 수록)로부터 옮긴다. 

배롱나무 꽃 By Meneerke bloem - 자작, CC BY-SA 3.0, 위키미디어커먼즈



배롱나무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41XXXXX00021


그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은 녹지 않고 저택 주위의 모든 것들을 꽁꽁 얼리는 데 일조했다. 저택의 벽면은 마치 얼음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금이 가서 무너지지 않을까?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은 산짐승들이 호기롭게 근처까지 내려왔다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다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버렸다. 겨울이 끝날 무렵이 되자, 얼음이 녹아서 포치와 창틀에 물방울이 맺혔다가 땅으로 뚝뚝 떨어졌다. 분수대에 쌓여 있던 눈이 녹아서 물로 변했다. 땅 위에 물이 질척질척거렸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영구하게 생명력을 잃은 것처럼 보이던 노란 잔디들에도 녹색빛이 돌기 시작했다. 저택 근처에 있는 숲, 전나무들도 뾰족한 가지에서 연두색 잎을 토해냈다. 어디선가 나비들이 날아와서 분수대 주변을 빙빙 돌다가 날아가버렸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저택의 뒤편에 우두커니 서 있던 배롱나무에서 진분홍색 꽃이 피어났고, 전나무숲은 온통 초록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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