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너를 찾아서
케리 론스데일 지음, 박산호 옮김 / 책세상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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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각 이상으로 내용이 잔혹해서 당황스러웠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버린다면 어떨까. 에이미는 결혼식으로 앞두고 약혼자를 잃었다. 바다에서 발견된 약혼자의 시신은 상태가 좋지 않아 마지막 인사를 할 수도 없었고, 그의 가족은 잔인하게도 두사람이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날 그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룬다. 충격적인 상황 앞에서 수상한 여자가 다가와 '당신의 약혼자는 살아있다'고 한다. 모두가 그의 죽음을 인정하라고 위로하고 조언해주는 상황에서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최근에 개봉한 '서치'라는 영화를 봤는데 그와 비슷한 느낌을 좀 받았다. 서치를 재밌게 봤다면 이 책도 흥미롭게 읽지 않을까 싶다.

 

 이미 제목에서부터 '사라진 너를 찾'는다고 했기에, 약혼자의 죽음과 그가 살아있다는 증언?들에 에이미가 왜 빨리 약혼자를 찾아나서지 않는 것일까 흐름이 좀 느리다고 생각했다. 한국식 전개라면 내 눈으로 봐야겠다며 시신도 확인하고, 빠르면 약혼자 제임스의 상자가 몇 개 없어졌을 때부터 뒷조사를 시작하거나 늦어도 반년 안에는 찾아나섰을텐데. 제임스의 형인 토머스가 거액의 유산을 건네줬을때 자금 삼아서 마지막 목격지로 추적을 나섰을 것이다. 숨은 비밀을 파헤치는 스실러물로 변했겠지만 아마 그런 식으로 내용이 전개됐어도 재밌었을 거다. 하지만 나라마다 행동과 생각 방식이 다르니까, 이 책은 에이미가 상실을 어떻게 극복해나가는지 천천히 보여준다. 어쩌면 그 느린 전개가 이 이야기의 핵심이 된다.

 

 한동안 영화든 책이든 결국은 끝이 좋게 마무리되는 것들만 골라보았다. 아예 가볍고 밝은 하이틴 영화 목록을 늘여놓고 줄줄이 본 적도 있다. 가볍게 말했지만 안그래도 현실이 우울한데 굳이 다른 매체로도 우울한 내용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사라진 너를 찾아서'를 읽으면서도 전형적이지만 에이미가 오랜 연인이자 친구인 약혼자 제임스를 무사히 되찾아오고 다시 사랑하며 사는 결말이 오길 기대하며 읽었다. 느린 전개 속에서 에이미의 삶이 흘러가고 이언이 그녀에게 다가가고 점점 사랑에 빠지는 것을 지켜보며 그런 결말이 오지 않을까봐 마음을 졸였다. 순간에는, 결국은 순간일 수밖에 없는 그 현재에선 최선의 선택들로 결말이 났지만 개인적으로는 마지막까지 고통스러운 흐름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책 안의 핵심적인 내용이 나오게 된다.

해리성 정체성 장애를 앓던 어머니를 가진 이언과 해리성 둔주 혹은 기억상실을 앓고 있는 약혼자를 둔 에이미의 만남은 지나치게 극적이었다. 너무나 같은 결핍을 가진 사람이 서로를 만나 한쌍이 된다니. 게다가 해리성 둔주로 만들어진? 나타난? 또 다른 자아를 인정해버린다니. 그럴 수 있을까. 그저 괴로운 사건으로부터 갈라져 내려온 또 하나의 인격인데도. 카를로스라는 인물이 가진 19개월의 삶으로 제임스의 20여년을 대체할 권리를 주는 것이 옳을까. 주변인들이 그를 그렇게 놔둘 수 있었다는 것이 새삼 선뜩하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한 사람의 삶을 방치해버리다니. 에이미는 카를로스가 된 제임스에게 의지대로 살 수 없는 삶을 강요하지 않겠다며 관계를 정리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했고, 심지어 아이까지 둘이나 두고 있다는 현실에 질렸던 게 가장 컸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자신에게 새로이 다가온 다른 인연을 만나도 괜찮다는 면죄부 또한 주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의심했다.

 

 사랑이란 것이 뭘까.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었던 이후로 -사랑이 너무나 취약하고 형편없는 지속성을 가졌음에도- 그것이 다이아몬드처럼 영원한 것이라 세뇌되었던 기억 때문에, 이에 지나친 환상과 무결함을 추구해왔던 것 같다. 현실이 그렇지 않을수록 더욱 이상적인 것에 매달리듯이. 때문에 에이미의 경우에도 사랑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폭력적이어서 읽으며 더욱 공감했었다. 그리고 그만큼 괴로웠다. 그녀가 오랫동안 사랑한 제임스를 과거로 묻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건 이언같은 사람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이언이 없었더라면 그녀의 선택이 어땠을지 궁금해졌다. 그래도 그녀는 사라진 약혼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혼자 자신의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 점이 가장 아쉽게 남을 것 같다. 이언이라는 기댈 곳, 도피처가 없는 에이미의 행보가 미지수로 남아서. 어쩌면 속편이 그 아쉬움을 메워줄지 모르겠다. 속편은 없지만 이 책의 마지막이 다음을 예고하듯이 끝을 맺는다. 이 점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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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크맨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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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주의하게 책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다. 초크맨의 인상은 조금 이상하게도, 지금 배가 고파서일지 모르겠지만- 땅콩버터를 발라 살짝 겉을 구워낸 토스트를 먹는 것 같다. 알러지만 없다면 누구나 알고 좋아할 것 같은 기호성. 크게 베어먹듯 덥석덥석 단숨에 읽어나갈 것 같은 몰입도.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친숙한 느낌. 파운드를 쓰는 영국 배경인데도, 미국의 정키함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오후에 집어든 책을 저녁까지 읽는 도중에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샤워를 했다. 차가운 물에 머리속이 조금 시원해졌을때 문득 떠올린 생각이 '스티븐 킹의 느낌이 나는데'였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얽힌 사건의 장막이 조금씩 벗겨지는 것과, 마을의 구성원들을 훑듯이 소개해오는 점이 특히 그랬다. 혼자 그런 생각을 하다 거실로 돌아와 탁자에 놓아둔 책을 보니 띠지에 스티븐 킹의 강력한 추천을 받았단 말이 적혀있었다. 그래서 그랬구나 싶었다. 이제 막 초크맨으로 첫 책을 내놓은 작가가- 누구라도 당연하겠지만, 그동안 어떤 작품들을 봐왔을지 짐작이 되었다. 이것도 예단이 되려나. 어쨌든, 초크맨은 꽤 괜찮다. 피넛버터 샌드위치 싫어하는 사람 별로 없듯이.

 

 하얀 분필로 그려진 그림, 백색증의 외지인, 연달아 일어나는 잔인한 사건들을 두고 '초크맨'이라는 살인마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에디 먼스터, 뚱뚱이 개브, 메탈 미키, 호포 그리고 니키. 다섯 친구들이 어린시절 겪었던 사건이 30년 뒤에 서서히 밝혀지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흰 분필로 그려진 표식을 따라가다 보면 토막난 소녀의 몸이 차례로 발견된다. 소녀를 죽이고 흰 분필로 절단된 신체 위치를 표시한 사람은 누구일까. 다섯 아이들이 각각 가지고 있는 분필은 색이 있었다. 그걸 이용해 누군가 아이들을 불러내고 숨겨진 시체를 찾게 만들었다. 언뜻 불가사의한 존재같기도 한 초크맨의 정체를 분필로 사인을 주고 받는 놀이를 알려준 핼로런 선생이 아닐까 쉽게 의심하게 만든다. 그는 흰 분필로 그린 그림처럼 온몸이 하얀 백색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겨우 그런 요소들로 그를 의심할 수 있을까. 게다가 우리가 따르는 에디의 시선이 그에게 변함없는 신뢰를 보낸다. 그일까 아닐까.

 

 장르소설은 그만의 색이 있고 또 그것을 좋아하는 독자층이 있다. 고전이라 불리는 타고난 이야기꾼들의 작품들을 좀 읽다보면 어쩔 수 없이 독자의 눈치도 빨라진다. 작가가 뿌려놓는 간단한 밑밥을 물지 않도록 주의하며 책장을 넘긴다. 작가가 읽은만큼, 혹은 고민하는 만큼 안에 숨겨진 악의와 거짓을 뚫어보려 노력한다. 독자는 끊임없이 주어지는 정보를 의심하고, 인물을 재며 읽어내다가 결국엔 전혀 예상할 수 없이 교묘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 내면의 어두운 욕망과 맞닿은 동기로 벌어졌을때 감탄하며 책을 덮는다. 그럼에 있어서 초크맨은 다소 헐거운 연결고리가 눈에 띈다. 특히 메탈 미키가 연관된 사건에서 설명이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에디가 그랬듯, 메탈 미키에 대해서 작가도 그를 좋아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소설을 아우르는 재미라는 요소가 전체적인 만족감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단단히 지탱한다.

 

 주말의 하루쯤은 전기세도 아낄 겸 텀블러와 책을 들고 대형 커피숍 구석진 자리에 틀어박혀 한나절을 보낼만한 책이다. 평소에 장편을 읽지 않았더라도 어렵지 않게 읽어낼만한 밀도다. 간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며 책을 읽었는데, 가끔은 이런 시간도 필요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영화 '그것 It'을 재밌게 봤거나, 평소 추리, 스릴러, 스티븐 킹의 작품 등을 좋아했다면 즐겁게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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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로니아공화국
김대현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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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하기로는 장편을 읽은 게 오랜만이었다. 사실 한동안 뭔가를 읽지 않았다. 한동안이라고 해도 한달이나 이주 정도 되려나. 날이 점점 더워져서,는 핑계이고 스마트폰 중독 때문이다. 급기야 최근들어서 말하다 단어가 도통 떠오르질 않아 "그게 뭐였더라?"만 댓번 하고마는 일이 생겼다. 이러다 영영 장편은 못 읽게 되는거 아닌가 싶은 불안에 잠길 때 '나의 아로니아 공화국'을 만났다. 의식적으로 피해왔던 장편에 400쪽 정도 되는 분량이 두려웠다. 스마트폰만 주구장창 보다가 뇌가 망가져버리면 어떻게 된다던데 어떻게 된다더라? 스마트폰 하다가 본 내용이라 많은 정보를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요지의 내용의 글이었는데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맙소사. 내가 만약 아로니아 공화국에 한자리 차지한다면 스마트폰 사용 제한을 강력하게 주장하겠다. 이거 정말 심각한 문제네.

 

 어쨌든 나의 중독 고백은 이쯤하고, '나의 아로니아 공화국'으로 돌아가본다. 우선 다행이도 꽤 짧은 시간에 완독할 수 있었다. 읽는 중간에 일상이 끼어들어 공간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한번 잡으면 백여쪽의 분량은 훅 읽을 수 있을 재미가 충분했다. 처음에 유명한 사람들이 써놓은 추천사를 보고 이게 뭔 내용이래 재미없을 것 같아 싶었다. 원래대로라면 스포일러 밟을까봐 그냥 넘겼겠지만, 이 마음조차 조금이라도 분량을 줄여 읽으려는 수작인가 싶어 '어머, 이것도 스마트폰 중 증세 아니야?'하고 마음속 경각심을 떠올려 읽기로 했다. 굳이 읽고 시작한 것 치고는 읽기 전에 별 도움 안되는데 읽고 난 다음에 다시 보니 좀 낫다. 발상이 좀 엉뚱해서 과정을 보고 난 뒤에야 확실한 느낌이 오게 된 것이다.

 

 장편 못 버틸까봐 염려했던 중독자의 걱정을 씻어준 것은 고마운데, 사실 어딘지 모르게 꿈꿈하다. 이 꿈꿈함은 첫째로 재밌게 느꼈던 문체에서 온다. 얼마 전에 읽었던 성석제의 단편집에서 봤던 혹은 박민규, 김중혁의 소설들을 떠올리게 한다. 읽으면서 아는데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이 문체는 상황과 인물들을 세세하면서도 집요하게 설명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지명, 사건, 인물들과 허구를 넘나들며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실제감을 준다. 사건이 이어지며 어디까지나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고 내용이 전개된다. 이래저래 썼지만 사실 뭔가 병맛을 느끼게 하는 재미가 있다. 이게 가장 깔끔한 설명이 되리라. 그리고 이러한 특징이 재밌긴 하지만 또 이런 스타일인가, 싶은 생각도 들게 한다. 물론 내용에 깊이 빠져들기 전인 초반에 했던 생각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림 일대를 삥뜯고 다니던 김강현의 미약한 시작을 낄낄 거리다 끝내 아로니아 공화국의 대통령 로아 킴이 된 건국신화를 따라가다 보면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그럴싸하게 믿게 되는 거다. 

 

 다른 하나의 꿈꿈함은 젠더적 문제인데 좀 긴가민가 하다. 한번 더 읽어야 정체가 밝혀질 것 같다. 워낙 예민한 문제니 말을 아끼고 싶은 이유도 있다. 330쪽에 있는 아로니아 시민 선발 조건이 슬슬 떠오른다. 장마철이니 꿈꿈함은 어쩔 수 없지 하고 그런 것들은 차치하고 보면 이 소설은 꽤 재밌다. 나름 왜 써야 했는가에 대한 의식도 담겨있고, 읽고 난 다음까지 확실히 "재밌게 읽으셨다면 다들 좋아요 한번씩 눌러주세요" 하고 광고하는 것처럼 '한일공동개발구역 JDZ' 상기시켜주는 마무리까지 한다. 시키는대로 좀 찾아봤는데 "제발 관심 좀 가져주세요" 라는 말과 함께 안그래도 더운 여름 열불나는 상황이 줄줄이 딸려나와 분노하게 됐다. (왜 일본이 싫고 한국 정부가 무능한가)의 전형적인 예시가 아닐까. 게다가 '7광구'라는 영화는 또 뭔지...말을 줄입니다... 

 

 책 한 권 재밌게 읽어놓고 뒤늦게 찾아오는 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다, 작가의 인품에 새삼 놀랐다. 이 얼마나 평화적인 '한일공동개발구역 JDZ'에 대한 관심 유발과 문제 제기인가. 인터넷을 도배하는 워리어가 되지 않고 어디까지나 유머와 희망을 잃지 않는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읽히다니. 여기, 저기를 향한 답답한 마음을 욕지거리로 승화하여 표출하지도 않고. 다만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는다면 좋겠다. 내가 그랬다고 해서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한일공동개발구역 JDZ'에 대한 문제에 정말 무지했고 무관심했다가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흥하게 된다면 더 많은 관심이 모여 방안을 촉구할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을까. '나의 아로니아 공화국'을 통해 뜻밖에 문학이 가진 기능과 힘을 엿봤다. 괜찮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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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그 옆 사람
이남희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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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문 위에 여자의 얼굴 하나가 보였다. 잔뜩 일그러져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입가가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나는 손을 내밀어 그 입가를 가만히 쓸어주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내 잘못은 아니었어.' 유리문 속의 그녀가 웅얼거렸다. '그래도 아빠는 싫었겠지. 공주님이 망가졌다고 느꼈겠지.' 내가 좋도록 변명해주었다. '그래도 그래선 안 됐잖아. 아빤데. 나한테 그래선 안 되었던 거야.' -  p.198 거미집 "

 

 작가에 대한 소개를 잘 못 읽으며 시작했다. 부산 출생으로 1986년에 등단했다는 작가의 이력을 1986년에 태어났다는 것으로 알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겠지만, 어쩐지 젊은 작가의 글을 읽고 싶다고 생각해 부러 고른 책이었다. 86년에 태어났더라도 이제 더는 젊은 작가가 아니지만 86년에 등단했다니. 그래서 처음 표제작인 "친구와 그 옆 사람"을 읽을 때 '이게 뭔가' 싶었다. 80에서 90년대 정도에 나왔을 법한 글들에서 자주 보이는 문체를 마주하고 당혹스러웠다. 그때서야 작가 소개를 다시 찾아보곤 잘 못 봤구나 깨달았다. 더 읽을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사실 '존나'나 '졸라'를 졸나'라고 쓰는 그 문체가 주는 괴상하고 야릇한 맛을 싫어하지는 않는지라 죽 읽어버렸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우습게도 새내기 적에 '형'이라는 호칭을 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뒤로 계속 쓴 것은 아니지만 입학을 하고 몇 달은 공식적으로 서로를 '선배'와 '형'으로 불렀다. 왜 '형'이라고 불러주는지 이래저래한 설명을 듣긴 했지만 다 까먹고 후배라고 해서 무조건 하대하지 않고 게다가 '형'이라고 불러준다는 것이 좋아서 그러려니 했던 기억이 난다. 서로서로 '형, 형' 했지만 한편으로는 얘가 나랑 사귈만한지 아닌지 열심히 재고 따졌던 속내들도. "친구와 그 옆 사람"도 '형'하고 부르지만 결국 쟤랑 잘지 말지 결혼할지 이혼할지 어쩔지에 대한 속내가 가득했다.  

 

 이어지는 "남자와 여자"나 "세 번째 여자" 까지는 "내 이름은 김삼순" 시절 즈음의 노처녀 상 정도 되려는 여자의 이야기다. 독신이거나 이혼녀인 더 이상 젊지 않은 여자가 새로운 남자를 알게 되고 그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려 노력한다. 혼자도 괜찮은 척 해보지만 삶은 궁핍해지고, 남자를 잡고 싶고, 급기야 재혼하려 결심하기도 하는 여자들. 은정과 정애는 마흔정도 되었으려나, 혼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그녀들의 이야기가 어쩐지 궁상맞고 초라하다. 마음먹고 썸타던 남자집에 쳐들어갔는데 '우정이나 쌓을래요?' 하는 말을 듣고 뒤통수를 맞은듯 얼타야하는 심정처럼.

 

 그려낼 수 있는 세계가 여기까지인가 싶어서 그만 읽을까 고민하는 때에 변화가 느껴졌다. "거미집"부터는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다. 그 전까지의 단편들이 시기와 때를 이야기했다면 삶과 문제를 던지기 시작한다. 어린시절 아빠의 공주님으로 색색의 젤리가 든 제과점 팥빙수를 먹던 여자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내쳐지게 된 상처와 결핍이 히스테릭하게 전개된다. 아빠는 그러면 안됐어야 했다는 독백의 씁쓸함을 혀끝에 굴려보기도 전에 "난 실은 칼칼한 여자를 좋아해" 하며 매달려오는 중늙은이의 '거저 먹지 않는' 슈가대디 제안에선 우스워지기까지 한다.

 

 가정폭력에 대한 문제를 담고 있는 "어두운 층계 위" 나 "빛의 제국" 으로 들어가면 확실히 문체까지 다르다. 폭력에 대한 결말도 앞과 뒤의 단편에서 차이가 난다. 밖에 드러나서 좋을 것 없다던지 밖에서는 호인이지만 집에 오면 폭군이 되는 가장과 같은 전형적인 형태에서, 주위 사람들의 신고로 아동학대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어 가는 '형식이 엄마'의 모습은 달라진 시대 분위기도 보여준다. 어디선가는 뉘앙스만 풍기던 동성애에 관한 내용도 단편 "낯선 이들의 집"에서는 확연해진다.

 

 장기간에 걸쳐 엮어낸 소설집인지 처음 시작부터 뒤로 이어질수록 문체가 달라지는 모습이 눈에 띄도록 두드러졌다. 그래서 읽기를 잘했구나 싶었다. 처음엔 그저 예스러운 문체가 재밌어서 가볍게 읽었는데, 뒤로 갈수록 단편의 중심이 더 영글어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작가 자신의 변화가 글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하나로 묶인 소설집 안에서 작가의 변화를 이토록 눈에 띄게 느끼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다음 단편으로 넘어갈수록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궁금해졌다. 이 책을 읽는다면 그 점에도 함께 주목해본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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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이름은
조남주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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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 이름은" 안의 내용들은 읽기에 좋다. 긴 호흡의 글에 점점 기력도 딸리고 집중력도 떨어지는 140자 시대에 - 아, 요즘은 280자라나? - 맞춰 한 다섯장 정도의 분량이면 하나의 꼭지가 끝난다. 군더더기 없이 짧은 대부분의 내용들이 뉴스에서 봤던 굵직한 사건들도 포함하고 있어 익숙한 배경지식도 제공한다. 소설집을 채운 거의 30개 가까이 되는 '그녀'들의 이야기는 마치 대형 기획사 아이돌 뽑아내듯 "이 중에 네 삶 비출만한 내용은 하나 있겠지" 하며 꾸려낸 보편다양(?!)한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요즘은 여성의 ㅇ만 느껴져도 반사적인 거부감이 드는 사람들도 있고, 그냥 사는게 이런 건 줄 알았는데 '빨간약 먹고 진실을 봤다'는 사람들도 있어서 이 여성에 관한 책이 누구에게든 편하게 읽힐만한 내용은 아닐거란 생각이 든다.  

 

 아마 책을 읽었다고 하면 별 관심없이 그랬구나 할 사람도 있고, 나도 읽었다고 눈을 빛낼 사람도 있고, 표정이 굳어 얼버무릴 사람도 있고, 호기심과 경멸을 섞어 너도 ㅁㄱ이야 물을 사람도 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댓글로 욕을 쏟아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염려스러워 밖에서는 굳이 이 책을 읽지 않았다. 책 안의 대부분 내용은 공감하면서도 그것을 이유로 난데없는 악의의 대상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마치 금서를 읽은 것 같다. 그렇게 좋아하던 여자 아이돌이 책표지를 찍어 SNS에 올렸다는 이유로 굳즈를 불태우는데, 아무 상관도 없던 나같은 사람이 어쩌다 눈에 걸리면 한마디 던지기는 얼마나 더 쉬울까 하고. 이런 '멀리 나간' 생각도 웃기지만 중년의 연예인들이 업소에서 자신의 평이 얼마나 좋은지 매너를 자랑하던 티비 프로그램의 한 장면을 떠올리면 그 말은 또 그렇게 쉬운지 그것도 우습다.  

 

 4만명이 넘는 여성이 여성 스스로를 위하여 거리로 나서게까지 된 지금, 되돌아보니 몰카가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문제제기되고 분노할만한 일이었던가 생경하다. 그동안 얼마나 많았는데. 포털에 길거리를 검색하면 길에서 몰래 촬영한 여성의 신체 이미지가 뜨고, 연관으로 미니스커트라는 말이 따라붙는데도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나. 더 말하자면 "그녀 이름은" 안에 담긴 내용 정도의 고단하고 모욕적이고 불안한 삶의 경험들은 날 것으로 말하자면 더 많고 더 더럽다. 몰래 찍힌 리벤지 포르노가 공개되어 기자회견을 열어 사죄하던 사람도 있었다. 그때 우리-대중-는 무엇에 대한 사과를 받았을까. 그 영상은 무슨 이름으로 불리며 퍼져나갔었나. 그럼에도 고작 이 책 한 권의 내용에 공감했다고 표하는 것만으로도 프레임이 씌워진다.

 

 저자 조남주의 이력을 훑으며, 새로 나왔다는 "그녀 이름은" 이라는 제목의 소설집을 읽으며 여러 생각이 오갔다. 거의 마지막 책장을 넘기면서 불쑥하고 '대체 왜 자꾸 이런 글들을 쓰는거야!' 라는 짜증스런 답답함이 올라왔다. 그간의 행보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불만을 표하고, 심지어 분노하고, 결국엔 뭐라더라 비슷한 제목의 책을 내려고 함으로 반박하기까지 했다. 시달리기도 시달렸을텐데 왜 멈추지 않는 것일까. 이 계속되는 행보에도 또 어디에 이렇게 마르지 않는 소재와 공감이 달려나올까. 누구는 비겁하기 때문에 카페나 지하철에서 책 한 권 읽는데도 별 생각을 다 하는데도. 시달리면서, 욕먹고, 조롱당하고, 지치면서도 목소리를 내기 주저하지 않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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