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그 옆 사람
이남희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리문 위에 여자의 얼굴 하나가 보였다. 잔뜩 일그러져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입가가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나는 손을 내밀어 그 입가를 가만히 쓸어주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내 잘못은 아니었어.' 유리문 속의 그녀가 웅얼거렸다. '그래도 아빠는 싫었겠지. 공주님이 망가졌다고 느꼈겠지.' 내가 좋도록 변명해주었다. '그래도 그래선 안 됐잖아. 아빤데. 나한테 그래선 안 되었던 거야.' -  p.198 거미집 "

 

 작가에 대한 소개를 잘 못 읽으며 시작했다. 부산 출생으로 1986년에 등단했다는 작가의 이력을 1986년에 태어났다는 것으로 알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겠지만, 어쩐지 젊은 작가의 글을 읽고 싶다고 생각해 부러 고른 책이었다. 86년에 태어났더라도 이제 더는 젊은 작가가 아니지만 86년에 등단했다니. 그래서 처음 표제작인 "친구와 그 옆 사람"을 읽을 때 '이게 뭔가' 싶었다. 80에서 90년대 정도에 나왔을 법한 글들에서 자주 보이는 문체를 마주하고 당혹스러웠다. 그때서야 작가 소개를 다시 찾아보곤 잘 못 봤구나 깨달았다. 더 읽을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사실 '존나'나 '졸라'를 졸나'라고 쓰는 그 문체가 주는 괴상하고 야릇한 맛을 싫어하지는 않는지라 죽 읽어버렸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우습게도 새내기 적에 '형'이라는 호칭을 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뒤로 계속 쓴 것은 아니지만 입학을 하고 몇 달은 공식적으로 서로를 '선배'와 '형'으로 불렀다. 왜 '형'이라고 불러주는지 이래저래한 설명을 듣긴 했지만 다 까먹고 후배라고 해서 무조건 하대하지 않고 게다가 '형'이라고 불러준다는 것이 좋아서 그러려니 했던 기억이 난다. 서로서로 '형, 형' 했지만 한편으로는 얘가 나랑 사귈만한지 아닌지 열심히 재고 따졌던 속내들도. "친구와 그 옆 사람"도 '형'하고 부르지만 결국 쟤랑 잘지 말지 결혼할지 이혼할지 어쩔지에 대한 속내가 가득했다.  

 

 이어지는 "남자와 여자"나 "세 번째 여자" 까지는 "내 이름은 김삼순" 시절 즈음의 노처녀 상 정도 되려는 여자의 이야기다. 독신이거나 이혼녀인 더 이상 젊지 않은 여자가 새로운 남자를 알게 되고 그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려 노력한다. 혼자도 괜찮은 척 해보지만 삶은 궁핍해지고, 남자를 잡고 싶고, 급기야 재혼하려 결심하기도 하는 여자들. 은정과 정애는 마흔정도 되었으려나, 혼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그녀들의 이야기가 어쩐지 궁상맞고 초라하다. 마음먹고 썸타던 남자집에 쳐들어갔는데 '우정이나 쌓을래요?' 하는 말을 듣고 뒤통수를 맞은듯 얼타야하는 심정처럼.

 

 그려낼 수 있는 세계가 여기까지인가 싶어서 그만 읽을까 고민하는 때에 변화가 느껴졌다. "거미집"부터는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다. 그 전까지의 단편들이 시기와 때를 이야기했다면 삶과 문제를 던지기 시작한다. 어린시절 아빠의 공주님으로 색색의 젤리가 든 제과점 팥빙수를 먹던 여자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내쳐지게 된 상처와 결핍이 히스테릭하게 전개된다. 아빠는 그러면 안됐어야 했다는 독백의 씁쓸함을 혀끝에 굴려보기도 전에 "난 실은 칼칼한 여자를 좋아해" 하며 매달려오는 중늙은이의 '거저 먹지 않는' 슈가대디 제안에선 우스워지기까지 한다.

 

 가정폭력에 대한 문제를 담고 있는 "어두운 층계 위" 나 "빛의 제국" 으로 들어가면 확실히 문체까지 다르다. 폭력에 대한 결말도 앞과 뒤의 단편에서 차이가 난다. 밖에 드러나서 좋을 것 없다던지 밖에서는 호인이지만 집에 오면 폭군이 되는 가장과 같은 전형적인 형태에서, 주위 사람들의 신고로 아동학대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어 가는 '형식이 엄마'의 모습은 달라진 시대 분위기도 보여준다. 어디선가는 뉘앙스만 풍기던 동성애에 관한 내용도 단편 "낯선 이들의 집"에서는 확연해진다.

 

 장기간에 걸쳐 엮어낸 소설집인지 처음 시작부터 뒤로 이어질수록 문체가 달라지는 모습이 눈에 띄도록 두드러졌다. 그래서 읽기를 잘했구나 싶었다. 처음엔 그저 예스러운 문체가 재밌어서 가볍게 읽었는데, 뒤로 갈수록 단편의 중심이 더 영글어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작가 자신의 변화가 글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하나로 묶인 소설집 안에서 작가의 변화를 이토록 눈에 띄게 느끼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다음 단편으로 넘어갈수록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궁금해졌다. 이 책을 읽는다면 그 점에도 함께 주목해본다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