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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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이 없으면 서랍 같은 걸 엄청 많이 사야 될 거야. 원래는 음악 속에 추억을 넣고 다니니까. 오늘 우리가 이곳에 온 추억도 새로 산 서랍 속에 넣고는 겉에 '작은 별'이라고 쓴 테이프를 붙여놓아야 할걸. 아마 번거롭겠지. 근데 그럴 필요까진 없어. 우리에겐 바다가 있으니까. 바다는 아주 큰 서랍이야. 우린 먼 훗날 바다 앞 모래사장에 걸터앉아서 오늘을 떠올릴 수 있어. p.52 "

 

 본업을 너무나 잘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찬혁의 소설이 궁금했다. 종종 듣는 좋아하는 노래도 있고, 남매 뮤지션이라는 끈끈한 관계성 때문에 악동뮤지션에도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소설을 썼다는 신간 소식을 들었을 때 세상에 이런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감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가 음악과 가사로 보여줬던 세계를 소설로 보여준다면, 나는 또 어떤 느낌을 받을까 궁금했다. '물 만난 물고기'를 읽기 전에는 그가 악동뮤지션의 이찬혁이기 때문에 내용이 궁금했다면, 책을 읽는 동안은 그를 악동뮤지션의 이찬혁과 분리시켜야 하는 것일지 고민했다.

 

 소설 속 해야는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해야에게 빠지는 선이의 모습을 보면 볼 수록 나도 해야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자신에게 있어 너무나 큰 존재로 받아들이는 선이를 불안정하고 미숙하게 느끼게 만들었다. " 그녀를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못했으면 난 이 마지막 여행 이후로 음악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 음악가보다 환경미화원이 더 멋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야는 나의 음악에서 결핍된 자리를 정확히 채워주고 있었다. 그녀가 나의 음악이었다. 그녀의 말고 생각은 나를 번뜩이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그녀였다. p.115 "

 

 " 그녀의 책에는 결말이 있을 것이고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가장 마지막 챕터가 나올 것이다. 내가 그녀의 책 가장 마지막까지 등장하는 조연이라면 난 주저 없이 가장 멋진 결말을 그녀에게 선물할 것이라 다짐했었다. p.161 " 언뜻 로맨틱하기도 하고, 멋진 것 같은데, 이를 두고 낭만적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이 순수하고 열정적인 표현이 어색했다. 오히려 그녀가 나의 책-인생-에 등장하는 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선이의 생각이 자기파괴적이라 느껴질만큼. 하지만 저자를 떠올렸을때 어쩌면 그는 그럴수 있을 것이라는 이해를 하게 된다. 그가 가진 젊음과 그가 보여준 젊음만큼의 순수같은 것들에선 저런 낭만이 가능할 것이라고.

 

 자유롭고 부드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소설을 읽으면서 어쩐지 안전벨트를 푸는 해야의 행동(38)에 주춤하게 된다. 요즘은 티비 프로그램에서도 사람들이 차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이 나오면 전좌석 인원이 모두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있다. 미착용한 모습을 발견하면 시청자 게시판 같은 곳에 이를 지적하는 글이 올라오는 것이다. 이런 사소한? 엄격한? 규정에 대한 지적과 수정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분위기가 강하기 때문일까, 소설을 읽으면서도 마치 실제처럼 '저러면 안되는데'하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다. 두 사람이 드라이브를 하는, 그러면서 자유로움을 느끼는 장면인데도 나는 티비를 보듯이, 출연자와 제작진들이 지켜야 할 사회의 규범을 연상한 것이다.

 

 빨간불에 횡단보도를 건너기로 한 일, 처음엔 꽤 그럴싸한 이벤트라고 생각했던 죄수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일조차 만약 그들이 입은 죄수복이 진짜의 그것과 비슷하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염려했다. 속으로 자꾸 브레이크를 거는 동안 소설의 내용은 더욱 자유로워졌다. 선과 해야의 만남이 애매한 착각같았다면 선의 여행이, 해야의 존재가, 그들의 이별이,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어떨때는 의미를 알 수 없어졌다. 소설의 사소한 장면들을 끌어와 현실에 끼워맞추려는 시도들이 내 기준점을 잃지 않으려는 의식적인 노력같았다. 이는 내가 소설 속에 푹 빠져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호기심이 가긴 했지만 마음에 드는 소설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그가 창작해 낸 곡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리고 내면에 맑은 장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은 만족스러웠다. 음악을 들으며 '어떻게 이럴 수 있지'하고 생각했던 걸 '이런 사람이라 그랬구나'하고 멋대로지만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어쩐지 알몸이나 키스라는 단어가 나와도 외설적인 뉘앙스가 전혀 연상되지 않는 글이었다. 얼룩말들이 옷을 걸치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포옹으로 기쁨을 나누는 것처럼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형태와 감정의 교류로 보였다. 이쯤되니 만약 그가 죽음과 거짓으로 점철된 스릴러나 추리소설 같은 것을 썼다면 혹은 인간 밑바닥의 추악한 본성에 대한 글을 썼다면 덜 잔인하게, 자연스럽게 보였을까 궁금해졌다.

 

 읽는 동안 내가 멀어진 곳에 서서 글을 쓰고 노래를 부르는 작가의 존재가 의식되었다. 유명인이 냈다는 특징은 그 책을 찾아 읽게 만드는 궁금증을 자아냈지만 결국 그 안의 '나'를 자꾸만 '그'로 바라보게 만드는 점도 있었다. 어느 작가의 글을 보더라도 '나'를 두고 작가 자신의 모습을 계속해서 의식하고 덧그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물 만난 물고기'를 읽는 동안은, 어쩌면 책을 읽을 때 카페에서 그의 신곡이 나왔기 때문에 더 그랬을지 모르지만 새 앨범의 모티브가 된 소설이었단 문구와 함께 자꾸만 작가가 아닌 악동뮤지션의 이찬혁이 떠올랐다. 지금은 '물 만난 물고기'를 읽으면서 조금 아쉬움을 느껴졌지만 앞으로 그가 더 다양한 분위기의 글을 지금처럼 순수하게 계속해서 쓴다면 어떨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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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
닐 셔스터먼.재러드 셔스터먼 지음, 이민희 옮김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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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출한 김에 커피숍에서 책을 좀 읽어보려 자리를 잡았다. 한낮은 아직도 햇빛이 뜨겁기에 챙겨다니는 1리터 텀블러 가득 벤티 사이즈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얼음 추가로 주문했다. 책이 어떤 내용인지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 컵에 남은 얼음을 분리대에 쏟아버리는 일이 어쩐지 두려웠다. 이걸 버려도 되나? 혹시 지금 버린 이 얼음이 아쉬워질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카페를 나서며 1리터 가까이 되는 음료를 방금 마시고 난 뒤인데도 입술이 바짝 마른 것 같아 신경쓰였다. 건조해진 날씨 탓에 진짜 말라있긴 했지만 이 건조함이 어쩐지 불편이 아닌 위협으로 느껴진다. 나는 양이다. " 눈앞의 일원을 그대로 따라가는 습성, 어쩌다 조금이라도 길을 잃으면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치명적인 상태에 이르는 성향. p.72 " '드라이'는 양에게 충분히 " 무자비한 현실을 일깨 " 운다.

 

 표지의 '워터좀비'라는 단어 때문에 장르를 오해했었다. 알 수 없는 좀비 바이러스가 퍼져 물을 마시지 못하면 좀비가 되는 그런 내용일거라고 생각했다. 진짜 좀비가 나오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물 때문에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들을 비유적으로 워터좀비라고 표현한 것이었다. 목마름에 예민한 편이 아니어서, 혹은 물부족이라는 문제를 현실적으로 겪어본 적이 없어서 수분이 부족하고 목이 말라 사람이 쓰러진다는 것에 잘 공감하지 못하며 읽었다. 위기 대응 메뉴얼 같은 것을 미리 읽어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변기를 내릴 물이 없어서 겪는 더러움이나, 씻을 수 없는 상황 같은 건 저절로 끔찍해졌다. 구호물품으로 기저귀가 포함되는 장면(334)에서 나도 모르게 누군가 생리 중이었다면, 하고 떠올렸다. 극단적으로 수분이 부족해지면 생리도 멈추려나, 어쨌건 씻어야 할 텐데, 하고.

 

 하지만 재난 상황에서는 그런 사소한 문제는 등장하지 않는다. 상처가 생겨서 감염의 위기(149)를 겪거나, 심각한 전염병(219)이 돌아야 한다. 폭도가 되어버린 사람들(130/203) 혹 매춘(268)이나 강간(142/396)같은 상황은 등장할 수도 있겠다. 이런 굵직한 문제들이 함께 등장하면서 '드라이'는 훨씬 흥미진진하고 재밌어진다. 텔레비전에서 아무리 물부족을 경고해도 정말 물이 전혀 공급되지 않는 날이 올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물이 나오지 않아도 습관처럼 수도꼭지를 돌리는 사람들의 모습에 자신이 이입된다. 자연스럽게 나라면 어떨까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지난번에 주문해뒀던 생수는 몇 개 남아있었지, 물티슈로 샤워를 대신하면 될까. 집에 먹을만한게 얼마나 있었더라, 밖으로 나면 위험할테니 집 안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미국인들은 총이 흔하니 극단적일 때는 총 한 방으로 끝낼 수 있겠구나. 이런 현실적인 고민을 비현실적으로 해봤다.

 

 전에는 '워터월드'라는 영화를 좋아했었다. 오래된 영환데 온난화로 빙하가 다 녹아 지구상에 땅이 사라진 미래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배 위에서 생활하게 되고 가장 귀한 화폐는 흙이다. 영화에서 인류는 아가미와 물갈퀴가 달리도록 진화된다. 혹은 반대로 '매드맥스'처럼 사막화 될지도 모르겠다. 바닷물이 넘쳐나건, 온세계가 사막화되어 사라지건 마실 수 있는 물이 중요해지는 건 비슷했다. 전에는 물과 관련된 재난이라고 하면 '워터월드'만 생각났었는데 '드라이'를 읽으면서 '매드맥스'가 함께 떠올랐다. 어느 쪽이 앞으로의 미래와 더 가까울까.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런 불안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지금처럼 풍요롭게 행복하게 잘 지내는 미래를 갖게 될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전에는 이런 재난 영화들이 그저 막연히 재밌다고 생각했는데, 해수면이 진짜로 높아지고 있는 현실이 오니 문득 우리가 그린 디스토피아적 미래가 전부 다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

 

 아보카도가 식재료로 대유행하면서 칠레, 멕시코 등지의 아보카도 재배지역이 물보족 현상을 겪고 있다는 기사를 몇번이나 봤다. 그 뒤로 아보카도를 먹지 않았지만 여전히 아보카도는 재배지역 땅 속의 물을 빨아들이고 있을 것이다. 모 샌드위치 프랜차이즈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보카도를 곁들인 신메뉴를 내지 않았던가. 어차피 수입국인 우리나라와 그 쪽의 물부족같은 문제는 큰 상관없는 먼 나라 이야기니까. 이런 식으로 보고도 지나쳐가는 위험 신호들이 얼마나 많을까. 북극곰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그롤리라는 혼종이 생기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때로는 나 한 사람이 해서 뭘 변화시킬 수 있겠어 하며 지나친 실천들을 떠올려본다. 원인이자 결과인 인간에 대한 인류애가 사라지고 혐오감이 남는다. 나도 인류에 속하기 때문에 그마저도 금방 잊겠지만.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드라이'의 매력은 깔끔한 마무리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요즘 재난물들은 극한 상황에서 피어나는 사랑보다는 연대에 더 초점을 맞추나보다. 관계성이 최근에 재밌게 봤던 영화 '엑시트'를 떠올리게 한다. 엑시트에서 조정석이 윤아를 과거에 짝사랑했던 역으로 나오는데, '드라이'에서도 켈턴은 옆집소녀 얼리사를 짝사랑한다. 때문에 찌질하게 군 적도 있지만, 이들에게 닥친 위기 상황을 통해 좀 더 믿을만한 사람이 되는 성장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끝이 반드시 헐리웃 영화처럼 간신히 목숨을 구한 두 사람의 진한 키스 장면으로 페이드 아웃되지 않는다. 그 뒤에도 삶은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신뢰가 쌓인 관계를 신중히 발전시키도록 마무리하고 끝난다. 그래서 그 점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원래 재난물을 좋아해서 '드라이'를 아주 읽어보고 싶었고, 또 즐겁게 읽었다. 살아남기 시리즈는 어쩐 일인지 늘 매력적이다. 아이들 도서 중에서도 '000에서 살아남기' 시리즈가 폭발적 인기를 얻었었는데, 이런 류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는 건 나이가 상관없는 듯하다. 생존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는 뭔가가 있어서일까 싶다. 재난물을 좋아한다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고 싶다면, 그레타 툰베리의 행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 아보카도를 안 먹기로 결심했다면 '드라이'도 읽어본다면 좋겠다. 당신이 궁금해할 미래 물부족 재난에 대한 모든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캘리포니아 주의 상황에 대한 모의실험 정도는 만족스럽게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읽고 남은 요점은, 갈증을 느끼지 않도록 수시로 물을 잘 마시도록 하세요. 그리고 물을 아껴씁니다. 우리 환경을 보호합시다. 계몽적인 독서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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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박하는 여자들
대니엘 래저린 지음, 김지현 옮김 / 미디어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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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읽을 책들 더미 위에 '반박하는 여자들'이 맨 위로 올려지던날 지나가던 사람이 흘끗 보고 한마디 했다. "반박하는 여자들?" 예상이 가는가? 말꼬리가 미묘히 올라가있었다. 반사적으로 가슴이 선뜩했다. 맨 위에 올려두지 말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짐짓 "왜요?" 하고 물으니 "책 제목이 뭐 그래?" 하고는 가버렸다. 책 제목이나 표지에 페미니즘 관련된 내용이 있으면 가끔 읽을 순서가 되어도 맨 위에 올려놓지 말까 하는 고민을 하곤 했다. 페미니즘에 따라붙는 혐오와 공격성이 옮아붙을까 싶었던 것이다. 평소에 놓여진 책들을 슬쩍 훑는 일들이 없진 않았지만, 제목만으로도 말끝이 올라간 한마디를 들었다. 여자들이 왜 반박을 해서는.

 

 책은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다. 건조하다. 책의 제목을 보고 무서운 페미니즘 전사들이 잔뜩 흥분한채로 고양된 감정을 드러내며 피해의식에 가득한 얘기를 쏘아낼 것이라 생각했을 사람들에게 유감이다. 평범한 소설들로 채워진 소설집일뿐이다.

 

 " 장 뤼크는 미국인은 아니다. 아마도 유부남인 듯하고 나이는 나보다 확실히 많다. 내 평생 처음으로 혼자서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난 다음 날, 그는 내게 커피를 사주고는 지금쯤 고향에서 샘이 바람피우고 있을 거라고 우긴다. 그는 내가 어리고 순진하며 내 미래는 그가 말하는 진실 그대로 될 거라고 주장한다. 나는 그와 네 시간을 같이 보내고 나서야 내가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그냥 일어나서 나가버리면 된다는 걸 깨닫는다. p.134 "

 

 이 책의 재밌는 점은 이런 순간이다. 어디서 마주쳤던 것 같은 사람과 상황들에 있다. 내가 지금보다 더 어리고 예의발랐을때 나에게도 자신이 옳고 삶은 이런 것이라며 개똥철학을 늘어놓으려 드는 꼰대들과의 대면이 있었다. 그때 나는 어땠었나, 너무 많은 시간을 예의차리며 그 앞에 앉아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일어나서 나가버리면 된다는' 깨달음이 더 빨리 왔었다면 좋았을텐데.

 

 다른 단편들보다 '풍경 27'이 마음에 들었다. '반박'도 실제인지 아닌지 불분명하게 보인다는 점이 괜찮았지만 틴에이저의 시선이라 좀 거칠었다. 하지만 '풍경 27'은 금방이라도 무슨 사건이 생길 것 같은 위태로움이 잘 느껴지는 분위기도 좋았고, 리차드 기어가 나온 '언페이스풀'이라는 영화가 떠오르는 내용도 흥미진진했다. '언페이스풀'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하지 않을까 싶고, 혹시 안봤다면 그냥 '언페이스풀'을 보면 될 것 같다. 어쨌거나 그 영화는 재밌으니까. 개인적으로 재밌게 봤던 영화라 '풍경 27'을 읽으며 '언페이스풀'이 연상되는게 좋았다. 생각보다 짧게 마무리되어서 아쉬웠지만 읽는동안 그래서, 그 다음은? 하고 궁금해하는 마음으로 읽었던 것 같다. 

 

 " 그때는 웨슬리를 임신한 지 5개월째였는데, 그 사실을 쉽사리 잊어버렸다. 모든 일의 주도권은 그녀의 몸에게 넘어가 있었다. 그녀가 아기를 원하는지, 아기를 잘 돌볼 것인지, 사랑할 것인지 하는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아기는 그녀의 안에서 자라다가 태어날 테고, 그 과정에서 둘 중 하나는 - 특히 그녀가 - 죽을지도 모르며, 그녀 몸의 모든 것이 아기를 살리기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살리고 치유하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이다. 그래야 다시 임신할 수 있을 테니까. p.315 "

 

 임신이 여자의 몸을 기능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 임신과 출산을 숭고한 것으로 만들어주지만 너무나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케빈에 대하여'를 보면서 느꼈던 불쾌함은 일의 주도권이 그녀의 몸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문제들이 사실은 중요하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들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모성은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필연/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게 더 맞겠다. 임신, 출산, 육아를 거치며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을 만났다. 모성이 너무나 위대해서 모성으로 그것들을 모두 이겨낼 수 있는게 당연하지 않다.

 

  어느정도 강렬한 내용이 들어있지 않을까 준비하며 읽었는데 생각보다 묘하다. 제목이 도전적으로 보여지는 것에 비해 내용은 그림자로 비추는 어른한 형태로 윤곽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다. 좀 아쉽기도 하고, 이런 방식의 접근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동안 읽어왔던 여성들을 주제로한 글들에 비하면, 좀 순한맛이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한국적인 소재가 담긴 내용이 더 매운맛에 익숙한 탓도 있겠다. 심심하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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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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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즐거운 일들을 하나씩 잃어 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말이다. p.8 "

 

 '딸에 대하여'를 읽으려고 전부터 생각을 해왔지만 이제서야 읽었다. 책을 읽을 것이라는 계획이 늘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내용을 전혀 모르는 채로 있었다. 제목만 보고 엄마와 딸에 대한 내용이겠거니 했다. 무심결에 오래 전 영화 '마요네즈'나 전도연이 나온 '인어공주' 같은 영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때문에 사실 좀 더 보편적인 모녀관계에 대한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뜻밖의 내용이 있었다. 동성애에 대한 내용인가, 하고 주춤하다가 보편적이라는게 뭐지' 그린과 엄마가 나누는 대화가 결국은 모녀 사이의 보편이나 다름없는 것들 아닌가 생각했다. 다툼이나 친근함의 정도만 좀 다를 뿐 엄마와 딸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존재이면서 자신의 인력 안에서 상대방을 끝내 밀어내지 못하는 연관성이다.

 

 한참을 읽지 못했던 책을 반드시 읽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문득 엄마에 대한 생각을 자주하게 되면서다. 딱히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쩍 엄마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은 누구일까, 궁금해졌다. 내가 나이를 먹으면 엄마가 그만큼 늙는다. 철없이 엄마, 엄마하고 쓰지만 실제로는 불혹에 가깝게 생각할 때가 되니 이제는 도리어 부모가 물가에 내놓은 애마냥 염려스러울 일이 많아졌다. 늙어가는 부모를 대신해 이런저런 물건을 주문하고, 볼일을 접수하고, 정보를 알아보다보면 내 시간을 쪼개 마음을 들이다가도 무심히 부모의 애정과 보살핌을 받는 다른 친동기간들을 떠올리게 된다. 필요하다 하셨던 물건을 이제껏 없이 지내시게 말고 진작 사드리지 그랬어, 하는 불만이 불현듯 여직 시샘으로 번지는 탓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금반지 끼우고 싶은 손가락은 따로있다'는 우스갯말이 한동안 자주 입에 오르내렸다. 이제 노년으로 들어서는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로 오를 일도 잦고, 부모가 된 사람들과 이야기 할 일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종종 농담처럼 입에 올린 말이고 머리로 이해하는 말이지만, 때때로 "엄마에게 나는 어떤 손가락이야" 묻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물을 수 없을 것 같은 말이라 생각되면서 물으면 안 될 것 같은 질문을 마음속에 뭉쳐 이리저리 쓸어보는 나날들이었다. 그래서 내가 딸이니까 '딸에 대하여'를 읽어보면 이 질문이 조금은 흐려지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엄마에게 딸이 무엇인지, '너같은 딸 낳아보'라는 엄마의 말을 잘도 피해간 딸이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며.

 

 기대는 엄마와 딸이라기보단, 엄마와 자식에 대한 내용이었다. 내가 낳아 세상을 보이고 가르치고 기른 자식이 크면서 점점 하나의 완벽한 인간이 되어 엄마 앞에 섰을때. 엄마는 한때 자신이 가꾸고 정리하며 속속들이 알았던-혹은 그랬으리라 착각했던- 이 익숙하면서 낯선 우주를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어떤 것은 못 본 척하고, 어떤 것은 물고늘어지고, 어떤 것은 포기하고, 어떤 것은 헤집는다. 하지만 자식은 마치 저혼자 커버린 것처럼 묵묵한 타인의 얼굴을 하고 이렇게 존재하는 나라는 우주를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이라 말한다. 문득 내가 엄마에게 숨겼던 것들, 전부 설명하지 않고 넘어간 것들, 그리고 나의 결정만으로 선택한 것들을 떠올린다. 엄마에게도 때로 숨이 막힐 듯한 부서짐의 시간이 있었을까. 내 딸이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낯선 얼굴을 하고 있냐고 묻고싶을 때가 있었을까.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을 엄마에게 하지 않듯이 엄마도 나에게 내 딸의 얼굴을 한, 너무도 다른 생각과 말을 가진 이 여자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어쩌면 갱년기와 함께 그런 시간들을 흘려보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 안에서 엄마는 그린을 다그친다. 남들처럼 살고 나서지말라고. 너를 너무 많이 교육시켰는가보다 후회도 한다. 그린은 엄마를 향해 대꾸한다. 나를 가르치고 키운 것이 다름 아닌 엄마라고. 해고된 강사들을 위해 시위를 하는 그린을 속상해하면서도 권과장에게 속엣말을 다 쏟아낸 것도 자신이다. 남들은 다 보아넘기는 것을 끝내 마음쓰고, 억지를 부려서라도 젠을 시설에서 빼내어 집으로 들인 것도 자신이다. 그린이라는 우주 안에서 빛나고 있는 별들은 분명 그녀에게서부터 왔다.

 

 엄마와 그린이라는 두 우주가 만나 언성을 높였다가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했다가 결국 이해하지 못하고 시나브로 스며들기도 하는 과정을 보며 '컨택트(arrival:2016)'를 떠올렸다. 영화에서 주인공 루이스는 갑자기 지구에 등장한 외계 비행체-셸과 소통하기 위한 임무를 얻는다. 영화는 현재와 미래를 교묘히 교차하며 전개되는데, 셸에서 만난 외계 생명체들과 반목하지 않기 위해서 루이스는 반드시 그들의 언어를 해석하고 우리의 뜻을 전달해야만 한다. 영화에서 "그들의 언어를 배우면 그들의 방식으로 시간을 인식하게 됩니다. 미래를 보게 되요. 하지만 그들의 시간은 한쪽 방향으로 가지 않아요." 란 말이 나오는데 루이스가 셸과 소통하는 것이, 엄마와 그린이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주인공 루이스에게도 딸 한나가 있었다. 그 막을 수 없는 존재가.

 

 젠을 보며 품는 딸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아직 젊은 딸이 몰라주는 것이 답답했을 것이다. 딸이 여자 연인을 데려와서 같이 사는 일이 남들 눈에 뭐 어떻냐고, 대학 교수라는 타이틀이 사실 이리저리 보따리 옮겨 다니는 시간강사라는 것은 또 뭐 어떻냐고 생각하다 엄마가 하는 고민이 지극히 현실적임을 불쑥 깨닫는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날 그린에게 큰 문제가 생겼다면 그의 보호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엄마 뿐인 현실이나 젊을 적 아무리 대단한 일을 했던 사람이라도 연고없이 혼자 늙어버리고 난 후에는 자기 자신조차도 스스로 어찌하지 못하고 만다는 처참함이 있었다. 나이를 더 먹었다는 뜻일까, 자꾸만 그런 모퉁이들이 더 눈에 밟혔다. 어쩌면 나같은 사람도 이제 점점 굳어서 뭔가를 '막고 있'는지 모른다.

 

 가볍게 읽었는데 생각보다 이리저리 길어졌다. 책을 읽으면 내 안에 뭉쳐둔 것을 조금 풀어낼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읽는 동안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고, 이 나름 여러 생각을 할 수 있는 끝맛이 남아서 좋았다. 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는지 이해되었다. 그동안 읽어야지, 생각해왔던 책 중 하나를 읽었으니 책 한 권 만큼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른 책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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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씽 인 더 워터
캐서린 스테드먼 지음, 전행선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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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로 갈수록 매력적인 책이었다. 이 책이 정말 재밌어질까 의문을 가지며 읽었다. 제법 두꺼운데 어느 정도 분량이 지나갈 때까지만 해도 물에 뭐가 있다는건가 싶었다. 재밌게도 물에 뭔가 있다고 하면 상어를 떠올리지 않나 싶은데 바로 그 뭔가를 발견하기 직전에 상어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 진짜 상어인가 싶어졌었다. 그리고 그 뒤에 상어같은건 뭐 별로 중요하지 않아졌다. 로또에 아직 당첨되지 못한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원할만한 것이 그 안에 있었다.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되고 난 뒤로는 처음에 느꼈던 딱딱함과 끊어짐도 점점 호흡을 빠르게 만드는 효과를 준다. 그 전까지는 종종 문장이 너무 짧다고 생각했는데, 긴 것보다 나을 때가 많았다.

 

 사람들은 무엇을 좋아할까 골똘히 생각해봤다. 내가 답을 내기는 어려운 주제였지만 '썸씽 인 더 워터'를 읽고나니 좀 생각해보게 된다. 지어낸 이야기 속에서 정의, 옳은 것을 좋아할까 아니면 주인공의 승리를 좋아할까. 에린의 행동들이 딱히 좋은 건 아니었기 때문에 궁금해졌다. 에린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에린을 응원하게 된 것일까 아니면 에린이 한 행동이 어떻든 주인공이라 인식한 사람의 행동에 이입하고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된 것일까 모르겠지만 확실히 나는 에린이 마음에 들었고, 그녀를 응원하며 책을 읽었다. 어쩌면 나쁜 것도 좋아하고, 주인공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정의와는 상관없이.

 

 솔직히 좀 얕잡아 본 것도 있다. 배우 출신의 작가의 데뷔작이라니, 뭐 얼마나 대단할까 싶은 생각이 있었다. 처음에는 확실히 좀 그런 면이 있었다. 두서없는 것 같은 짧은 문장들이 이리저리 오가면서 전개될 때. 그런데 확실히 사건이 두각을 드러내고 난 뒤부터는 점점 재밌어졌다. 일반적인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 생겼는데, 그걸 아슬아슬하게 극복해가는 과정이 좀 비현실적이지만 그래도 꽤 멋있었다. 자연스럽게 나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그렇게까지는 머리가 안 돌아갈 것 같다. 씨씨티비 기록을 지우고 뭐 이런 일들을 생각도 못하고 그저 망했다 러시아 마피아라니 나는 죽었구나 하고 말 것이다.

 

 주변 인물들이 매력적으로 나오는데 이리저리 얽혀서 끝까지 이어지는게 좋았다. 다만 카로의 등장이 뜸해진 건 아쉬웠다. 에린의 삶이 급격하게 변하게 된 것이 이유긴 하지만 처음 마크와 만나게 된 계기나 마크의 실직에 대해 상담할때도 중요하게 나올 것 같았던 매력적인 인물이어서 책을 다 읽고 나서 에린과 같이 한숨돌리고, 문득 카로에 대한 언급이 후반부에 없었음이 떠올랐었다. 어쩌면 그게 에린이 이제 선을 넘어서 선 저편에 있는 사람들과 더 가까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확실히 에디나 알렉사 같이 그녀가 인터뷰했던 사람들이 그녀의 주위에 더 가깝게 있게 됐으니.

 

 가장 크게 자리잡은 것은 수영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할 줄 아는 유일한 수영, 그것도 간신히 떠 있는 수준일 뿐이지만 배영으로는 물 속에 있는 뭔가를 발견해 낼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스쿠버 다이빙은 수영이랑 상관 없을지도 모르지만 뭘 좀 알아야 확률이 더 높아질 것이 아닌가. 최소한 전 주의 로또 당첨번호를 확인해서 이번주에 찍지 않는 성의 정도일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번 여름 휴가지로 찾은 곳에서 의문의 가방을 발견했다면, 그런데 그 안에 엄청난 금액의 돈과 보석 등이 들어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썸씽 인 더 워터'를 읽고 휴가를 떠나는 기차, 차, 비행기 등 안에서 상상해본다면 여행의 즐거움을 극대화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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