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린저의 단편소설을 읽는 건 어떤 이들의 마음의 방으로 느닷없는 초대를 받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끔은 내 주변을 '음소거' 시키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샐린저의 소설에 그런 매력이 있다. 담담한 풍미를 지녀 안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 술을 몇 모금 넘긴 후의 느낌처럼 적당히 이완된 마음으로 집중하게 된다. 뭐가 뭔진 잘 모르겠지만, 굳이 알려고 하기보단 그저 듣고 싶어서, 좀 더 이야기해보라고 조르게 되는 기분 같은 거 말이다.



일상의 소음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들에게 집중한다. 읽던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도 지루하질 않지만 그렇다고 읽은 내용을 다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 이야기들엔 전과 후가 없기 때문이다. 설명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고 불현듯 시작해서 불현듯 끝나버리는 이야기들이다. 상황을 전혀 모른 채 그들의 특정 시간과 만나게 되고, 나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저 그 이야길 듣고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이 다른 삶 속에서 문득 그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같고, 「프래니와 주이」의 남매들 역시 주인공이나 배경이 되어 소리 없이 등장했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 버린다. 마치 내가 알고 있던 누구, 또는 누구의 누구를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 걸린 흑백사진 속에서 발견하곤 아릿한 그리움에 빠져드는 것 같다. 좀 더 알고 싶었지만 서로 다른 시공간이라는 차원 앞에서 속절없이 이별하게 된 기분이다.



그런 그들에게서 외로움과 두려움, 슬픔, 상실감을 느낀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지만 그들의 내면은 그에 맞서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여 뜻 모를 연민에 휩싸이게 된다. 단편소설의 장점은 느닷없는 시작과 느닷없는 끝에 있는 것 같다. 짧음 속에 충분한 기승전결이 있는 단편도 있지만 오직 전개만 있는 단편은 당황스러운 가운데 묘한 매력이 있다.



「아홉 가지 이야기」 중 특별히 더 기억에 남았던 것은 <웃는 남자>, <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 <테디>였다. 그리고 샐린저의 문학적 매력이 돋보였던 소설은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이었다. 평온한 듯 불안하고, 담담한 듯 슬픈 여운이 오랫동안 남았다. 주인공 시모어는 「프래니와 주이」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았음에도 존재감이 확실했던 일곱 남매의 맏이다. 또 다른 홀든이 연상되기도 했던 시모어를 좀 더 알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미련 같은 건 두지 말라는 듯 소설은 끝이 났다.



살다 보면 전과 후를 설명할 순 없지만 고요한 가운데 삶을 전환시키는 어떤 순간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선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란 생각은 오류라고 말한다. - ˝소리 없는 우아함. 이 아름다운 무음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고 말이다. 경험을 할 당시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삶, 그의 한 부분은 짧은 단편소설과 같지 않을까 싶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 같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결정적 순간이 바로 지금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이완과 집중이 필요해진다. 그리고 소리 없이 다가올 전환의 순간엔 다음 이야길 선택해야만 한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극적인 순간엔 늘 곁에 책이 있었다. 읽든 안 읽든 가까이 있어야 안심이 됐다. 아마도 주변의 여러 목소리들은 꺼둔 채 나의 소리를 집중해서 듣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 책이란 이완과 집중, 선택을 위해 숨처럼 필요한 존재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책들은 특별했고, J. D. 샐린저의 단편 역시 그렇게 지나갔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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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9-08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에스메를 위하여>가 좋았어요. 오랜만에 이 소설이 읽고 싶어지는군요. ^^

물고기자리 2015-09-08 21:22   좋아요 0 | URL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과 더불어 제일 맘에 들었던 소설이에요^^ 주인공과 대화하는 소녀도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홀든에게도 그랬듯이 삶의 전환이나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주는 소녀가 등장하는 것이 샐린저 문학의 매력적인 요소인 것 같아요. <바나나피시>의 시모어에게도 노란색 비키니를 입은 어린 소녀가 등장하고, 그 소녀와 이야길 나누는 부분이 유난히 기억에 남거든요 ㅎ

지금행복하자 2015-09-08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밖에 보지 않았는데~
읽어보고 싶게 하는데요~~

물고기자리 2015-09-09 00:29   좋아요 0 | URL
인물의 심상을 문학적인 우아함이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표현하는 작가들과는 달리 샐린저의 문장은 등장인물의 예민한 의식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적나라함이 매력인 것 같아요. 닦고 칠하고 조여진 문장도 아니고, 직유나 은유도 거의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묘사하거든요^^

샐린저는 개개인의 사람들에 대한 예리한 시선이 있어요. 부분부분을 흘려보내지 않고 예민하게 표현해서 전체보단 순간을, 큰 길보단 골목길을 먼저 보게 만드는 작가라고 생각해요. 세밀한 재료들을 보여주고 큰 그림은 알아서 그려보라는 거겠지요. 아무래도 정서적으로 예민할수록 샐린저의 문장에 이끌리는 것 같은데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작가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런 예민함이 좋더라고요 ㅎ 홀든을 좋아하셨으면 재밌으실 것 같아요^^

지금행복하자 2015-09-10 09:39   좋아요 0 | URL
샐린저의 다른 작품도 읽어봐야겠어요. 사실 호밀밭의 파수꾼도 아주 오래전에 읽어놔서요~~
읽을 책은 많은데.. 에궁.. 그래도 자꾸 늘어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