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지드전원교향곡 제목의 느낌으론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을 연상하게 되지만 실상은 어느 목사의 도덕적인 위선과 자기기만을 폭로하는 내용이다. 지드의 전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많이 읽히는 작품이라는데 그의 자전적 요소를 담고 있기도 하다.



1916년 이래, 앙드레 지드는 집안과 절친한 목사의 아들이자 삼십 년 연하인 당시 16세 소년과 동성애를 시작하는데 1918년 지드의 아내 마들렌은 둘의 관계를 알게 되고, 분노와 충격으로 그가 보낸 모든 편지를 태워 버렸다고 한다. 지드는 이 사실을 알고 며칠 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이중적인 성생활을 하면서도 아내의 사랑과 존경을 믿고 싶었던 자신의 자기기만적 환상이 무참히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전원교향곡」은 바로 이 시기인 1918년 상반기에 집필됐다고 한다. 내용을 전혀 모른 채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한동안은 작중 화자인 목사의 순수한 신앙을 믿게 된다. 보호자 없는,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가르치고 돌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씩 머리를 갸우뚱 거리게 된다. 자신을 속이고, 아내의 슬픔을 무시하며, 이후 소녀를 사랑하게 되는 아들의 마음 역시 교묘히 짓밟는, 더없이 천진한 듯 자신의 신앙과 사랑을 묘사하고 합리화 시키지만 목사의 가증스러운 기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는 늘 성경의 말씀을 인용해 자신의 사랑을 포장하고 스스로를 속인다.



아름다운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는 것, 주인공이 목사라는 것만으로 처음엔 그의 순수한 신앙심과 사랑을 의심하지 않게 되는데 이 소설이 뛰어난 점은 주인공의 이중성을 완전히 드러내지도, 완벽히 숨기지도 않는 적절한 교묘함에 있는 것 같다. 적나라하지 않는 적나라함이 그의 기만을 오히려 크게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화자인 목사는 늘 자신을 선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그래서 더 가증스럽게 느껴지니 말이다.



평론가들에 의하면 목사가 인용하는 성경 구절은 성경의 문맥과는 동떨어진 상태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선별적인 인용, 또는 누락시킨 것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소설적 측면에서 보면 그 역시 작가적 역량으로 보인다. 원래의 의미를 축소하거나 변형시켜 목사의 욕망이나 진실을 교묘히 은폐하는 역기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드의 소설에는 유난히 성경 구절이 많이 인용된다. 하지만 그 역시 「좁은 문」의 알리사나 「전원교향곡」의 목사처럼 성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자기합리화를 위해 선별적으로 인용하거나 핵심 구절은 고의적으로 누락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모른다 하더라도 「좁은 문」을 읽을 때 알리사를 진정한 신앙인이라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알리사에게 신앙은 일종의 고결한 도피처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제롬의 사랑은 알리사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단 그의 머릿속에서 아름답게 승화시킨 사랑 자체에 대한 사랑인 것 같았다. 알리사는 그런 제롬의 사랑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사랑을 받기 위해 자신을 계속해서 드높은 경지에 올려놓아야만 했다. 하지만 알리사는 행복할 수 없었고, 그럼에도 제롬의 사랑을 포기할 수 없어 의지할 수 있는 성경 구절 뒤로 숨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런 모든 것들엔 그들이 자라온 환경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한다.



앙드레 지드는 「좁은 문」의 제롬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가 열두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론 어머니의 과잉보호 아래 엄격한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두 살 위인 외사촌 누이 마들렌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는 「좁은 문」의 알리사를 떠올리게 한다. 지드는 친구들로부터 목사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열광적인 구도자였지만 다양한 경험을 한 이후엔 동시대인들을 부르주아 사회의 도덕적, 종교적 구속으로부터 해방하고, 열정적인 삶을 계시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게 된다. 그런 이유로 그는 보수주의자들과 카톨릭계 작가들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엔 정치, 사회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가졌고 프랑스의 비인간적인 식민 정책과 제국주의를 비판했다. 그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여성 해방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기도 하는데 이런 이유들로 그는 '현대의 양심'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렇게 무신론적 휴머니즘의 선도자였지만 그럼에도 복음서와 그리스도에 대해 여전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삶과 작품 성격을 규정짓는 결정적 요소 하나가 바로 '성경'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드는 성경을 소설이나 시를 읽듯 읽었다고 한다. 마치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그는 「좁은 문」의 알리사처럼 인간 스스로 각고의 노력으로 자아를 완성하면 신성과 구원에 도달한다고 믿었단다. 기독교회의 정통 교리와는 별개로 스스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했지만 이를 모태로 한 그만의 문학세계는 여러모로 골똘히 생각해보게 만드는 풍부한 깊이가 있다. 내용이나 인물에 대한 호감을 떠나 한 소설에서 열 개쯤의 감상이 떠올려질 만큼 이런저런 상념들이 자라나기 때문이다.



특히 인물마다 개인의 히스토리를 생각해보게 되는 특징적인 인간성을 적나라하게 묘사해서 보여준다. 그래 봐야 인물 간의 대화나 일기, 편지 등을 통한 묘사가 전부지만 문장을 길게 할애하지 않는데도 어떤 특정한 인간성이 그려지니 말이다. 한 사람의 적나라함을 통해 나의 내면 역시 다시 바라보게 된다. 이러쿵저러쿵 가르치려 들지 않지만 멈칫하며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도 문학이 살아남는 이유는 사람들이란 늘 여전하기 때문인 것도 같다.



자기완성의 도구이자, 앙드레 지드가 선택한 또 다른 구원의 길은 바로 글쓰기 또는 완벽한 예술 작품의 창조에 있었다고 한다. 그가 얻은 구원은 무엇이었을지 모르지만, 문학적 구원과 자기완성은 지드의 작품을 읽는 사람들로 인해 여전히 진행 중인 게 아닐까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5-09-03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지 오래되었지만 그 예리하게 벼른 감각을 잊을래야 잊을수는 없죠.

물고기자리 2015-09-03 20:58   좋아요 1 | URL
공감합니다^^ 편안하게 이어가는 글인데도 그 깊이가 남달라서 읽는 걸 멈출 수가 없더라고요. 앙드레 지드의 다른 작품들도 궁금해져서 장바구니가 가득 찼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