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은 알베르 카뮈의 「결혼, 여름」, 장 그르니에의 「섬」과 함께 프랑스 3대 미문(美文)으로 불린다고 한다. 난 사실 아름다운 문장을 좋아하는 성향은 아니다. 결과로서 아름다워진 문장은 좋지만 그 자체를 추구하는 문장을 읽는 건 단맛 나는 케이크를 혼자서 전부 먹어치운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저자 스스로 도취되어 있는 문장보단 글을 읽는 내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이 좋다. 슬픈 노래일수록 담담하게 불러야 그 노랫말에 깊이 공감하게 되듯이 말이다.

 

 

 

하지만 어느 곳에 시선을 두어도 온통 아름다운 것들로 충만한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담담함이 익숙지 않은 정서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감각이 먼저 깨어나는 곳에서, 화려한 향기로 유혹당하는 곳에서, 모든 색소들이 제각각 선명하게 빛을 발하는 곳에서 어떻게 건조한 글을 쓸 수 있을는지 말이다. 사방이 아름답게 일렁이는 곳에서 매일 눈을 뜨게 된다면 오히려 또 다른 세계로, 생각 속으로 도피하고 싶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곳을 꿈꾼다. 아름다운 생각이 아닌 아름다움 그 자체를 도피처로 삼고 싶다. 아름다움을 읽기보단 느끼고 싶다. 아름다운 것을 사색하기보단 그 감각에 취하고 싶다. 선 그어진 많은 것들로부터 해방되고 싶어진다. 조금씩 나아가는 듯싶다가도 어느새 다시 경계 안으로 되돌아와 있는 것 같은 나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다.

 

 

 

"비틀거릴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이론의 난간에 꼭 매달린다. 이론은 이론이고 이론에서 벗어나는 것은 또 벗어나는 것이다. (비논리도 참을 수 없는 것이지만 과도한 논리는 나를 지치게 한다.) 이치를 따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이 옳다고 하는 대로 가만 놓아두는 사람들이 있다. (만약 내 심장이 고동치는 것이 잘못이라고 내 이성이 주장한다 해도 나는 내 심장이 옳다고 손을 들어준다.) (...) 이론의 결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의식한다. " (p220)

 

 

 

"진정한 웅변은 웅변을 포기한다. 개인은 자기를 망각할 때 비로소 자기를 긍정한다. 자기 생각에 빠진 자는 자신의 방해물이 된다. 미인이 자기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때보다 더 내가 아름다움에 감탄해 본 적은 없다. 가장 감동적인 선(線)은 가장 체념한 상태의 선이다.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신이 되는 것은 스스로 신성을 포기함으로써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속에서 자기를 버림으로써 신은 창조된다. " (p224)

 

 

 

"그들의 지혜? ..... 아! 그들의 지혜라면 대단한 것인 양 떠들어대지 않는 게 좋다. 그것은 만사를 경계하고 위험을 피한 채 최소한으로 사는 것이니 말이다. 그들의 충고에는 항상 굳어지고 괴어 있는 그 어떤 것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귀찮은 잔소리를 늘어놓아 자녀들을 오히려 바보로 만드는 어떤 가정의 어머니들과 비슷한 데가 있다. " (p276)

 

 

 

"아무리 형편없는 종교라 할지라도 나름대로의 순교자들이 있었으며 하나같이 열광적인 신념들을 불러일으켰다.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은 죽고,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인다. 알려는 욕망은 의혹에서 생겨난다. 믿는 것을 그치고 앎을 얻도록 하라. 사람은 증거가 없을 때에만 강요하려 드는 것이다. 자기를 과신하지 말라. 강요당하지 말라. " (p287)

 

 

 

"너무 오랫동안 똑같은 식물들을 기르다 보면 토지가 지력을 잃고 중독되어 새로운 세대는 처음 세대와 똑같은 장소에서 자양분을 얻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대의 조상들이 먹고 소화한 것을 다시 먹으려 들지 말라. 아비의 그늘 밑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 퇴화와 위축밖에는 기대할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는 듯이 플라타너스나 단풍나무의 날개 달린 씨앗들이 날아가는 것을 보라. " (p291)

 

 

 

"그리스 우화를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아킬레스어머니의 손가락이 닿았던 기억 때문에 살이 여리어진 그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공격에도 끄떡없는 불사신이라는 사실을 그것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 (p292)

 

 

 

"그대의 발길이 가는 그곳으로, 그대의 희망이 부르는 대로 전진하라. 과거의 그 어떤 사랑에도 매이지 말라. 미래를 향하여 몸을 던져라. 더 이상 시를 꿈의 영토 속으로 옮겨놓지 말라. 현실 속에서 시를 읽어내어라. 시가 아직 현실 속에 있지 않거든 그 속에 시를 심어라. " (p293)

 

 

 

이 책의 202쪽 까지는 1897년에 출간된 <지상의 양식>이고 이후부턴 1935년에 출간된 <새로운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쩌다 보니 옮겨 적은 글들은 모두 <새로운 양식>에서 발췌한 것들이 되었다. <지상의 양식>은 보다 더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장들이지만 그에 도취되지도, 거부감이 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꼼꼼하고 친절한 각주들이 도움이 됨과 동시에 읽는 것에 방해가 되었을 뿐, 소설을 먼저 접하고 난 후에 이어 읽은 산문은 지드를 이해할 수 있는 연장선이 되었다. 그가 지향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접하게 될수록 그 반대편에서 무겁게 서성이던 지드의 그림자가 무엇이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나 자신에게 지쳐있거나 스스로가 지겹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느새 나는 다시 그 프레임 안에 갇혀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니 말이다. 나의 능동적인 선택이 아닌, 수동적으로 주입된 생각들과 타협하거나 그것을 부인하는 과정이 결국 내가 살고 있는 삶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선택한 것들은 쉽게 힘을 잃는 반면에 나에게 주입된 생각들은 아무리 밀어내고 거부해도 쉽게 떠나질 않는다. 감정은 다른 것을 좇더라도 생각이 가리키는 방향이 너무도 선명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의 것이 아닌 것은 버리고 싶어지지만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은 다양하지 않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 같다. 낯선 이야기 속으로 잠시 도피하거나 나와 비슷한 정서를 가진 글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나보다 먼저 겪었고, 더 많이 고민했던 분들의 글을 읽으며 위안과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지상의 양식」 1927년판에 붙이는 서문에 의하면 그는 이미 이 글을 쓰던 때의 자신을 이내 떠나버렸다고 말한다. 그가 바랐던 그대로 어느 상태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의 요구에 의해 변화하며 살아갔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본문 말미에는 "내 책은 던져버려라. 이것은 인생과 대면하는 데서 있을 수 있는 수많은 자세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해라. "고 적혀있다. 모든 책은 그 당시 누군가의 일기이자 바람이고, 또 다른 이의 추억이자 희망인 것 같다.

 

 

 

내가 읽은 책들 역시 당시의 나를 떠올리게 해주는 일기와 같다. 감상에 다 끄적이지 못 했던 좀 더 묵직한 이야기들도 책과 함께 흘러간다. 지드는 추억에 연연하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추억을 저버리지 못한다. 지난 일기도 가끔씩 들여다본다. 그래야만 지금의 나를 알 것 같기 때문이다. 도약할 수 없는 정신을 가졌다면 조금씩 걸으면서라도 삶의 모든 면면을 관찰해가며 길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늘 아름다운 도피처를, 낯선 공간을 꿈꾸지만 정작 그런 곳은 내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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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6 1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16 1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5-09-16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 4대 미문으로 해서 에밀 시오랑 추가요/ 절판되어서 도서관에서 이리저리 빌려읽으며 번역이 형편없다는 와중에도 저는 저절로 필사를 하게 되더라는.... 최근 새번역 책들을 그래서 다시 샀죠. 우울할 때 읽으면 압생트입니다!

물고기자리 2015-09-16 23:03   좋아요 1 | URL
필사를 하게 될 정도라면 꼭 읽어보고 싶어요. 검색해서 장바구니에 담으려고요~ 가을이라 그런지 수직으로 파고드는 느낌의 책들이 끌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