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비한 결속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5월
평점 :
이야기에 몰두하게 하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작가의 내면으로 빠져들게 하는 소설이 있다. 한 사람의 정신 속 세계가 궁금해지는 순간들.., 파스칼 키냐르의 「신비한 결속」이 내겐 그랬다. 키냐르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호흡이 점점 고요해지며 내가 어딘가로 스며드는 것 같다. 나라는 존재감이 점점 옅어지는 듯싶다가 주변으로 서서히 흩어지는 느낌, 명상을 하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파도가 되고, 바위가 되고, 길이 되며, 바람이 되고, 나무가 되며, 새가 되는 것 같다. 계속해서 이동하고, 멈추어 지그시 바라보고, 무한히 자유로워지는 느낌이다.
" '여기로 가야지. 저기로 가야지. 여기서 생각 좀 해보자. 저기서 생각 좀 해보자. 이곳의 아름다움을 좀 누려야 해. 저곳의 아름다움도 좀 누려야 해.' 이 모든 아름다움은 생생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아름다운 모든 것은 살아 있으므로. 그녀는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살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추억이다. 우리는 누구나 아름다웠던 것의 살아 있는 추억이다. 삶은 이 세계를 만들어낸 시간의 가장 감동적인 추억이다.' " (p191)
어떤 '곳'엘 가면 본능적으로 이곳은 나에게 좋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유를 설명할 순 없지만 몸과 마음이 바로 여기라고 이야기해주는 장소 말이다. 나라는 존재의 근원이 마치 그 장소와 탯줄로 연결된 것만 같은 곳이다. 그런 곳에선 저절로 침묵하게 되고, 기척을 지워 조용히 조용히 그곳의 풍경으로 스며들게 된다. 내가 무한히 작아지고, 동시에 커지는 느낌이다. 더 높이, 더 깊이.., 아주 짧은 순간일 뿐일지라도 한 번 부풀어 올랐던 마음의 경계는 그 느낌을 쉽게 잊지 못하게 된다.
키냐르의 글도 그런 풍경과 닮았다. 알 듯, 모를 듯한 내용을 만나도 피로감이 느껴지질 않는다. 잠깐 멈칫 바라보다가도 이내 다시금 걷고, 또 걷는 사색의 과정과 비슷하다. 주인공 클레르를 따라 걷고, 또 걷다 보면 몸과 마음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 같다. 나에게도 잠깐의 희열을 주는 장소가 아닌, 항구적으로 '결속' 관계를 이룰 수 있는 '곳'을 열망하게 된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아파트 숲과, 잘 포장된 아스팔트가 눈에 들어온다. 나무도 꽃도 너무 반듯하게 다듬어져 있다. 나에게 맞는 곳엘 가려면 어쩔 수 없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콘크리트와 '결속'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만큼 무던한 성향은 못되니 말이다. 하지만 키냐르의 글은 그런 장소를 대신해준다.
"엄마는 날 사랑하지 않았어. " (p161)
키냐르의 주인공에겐 어떤 '결핍'이 존재한다. 그것도 근원적인 결핍이다. 살아가면서 잃은 것이 아닌, 이미 잃으면서 시작된 삶이다. 그 결핍은 키냐르 자신의 것과 비슷한 듯싶다. 바로 모정의 결핍,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데서 오는 오랜 결핍이다. 키냐르는 어느 강연에서 "어머니는 나를 거의 사랑하지 않았다. "라고 고백했다 한다. 실제로 두 차례에 걸쳐 자폐증을 앓았던 키냐르에겐 그런 정서가 확연히 느껴진다. 그의 글에선 결핍을 채워 온전한 존재로 나아가기 위한 여정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솔직하고, 간결하고, 진지하다.
"불안은 오랜 동반자다.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친구는 아닐지라도 좋은 조언자이다. 조여오는 목구멍은 고통스럽고 가혹하지만 시간이 분배하는 패들을 기막히게 읽어내는 요정이다. " (p34)
어머니와 연결되지 못한 채 성장한 자아는 뿌리내릴 곳을 찾지 못해 불안하다. 하지만 어느새 삶의 동반자가 된 불안은 내면의 등대가 되어주기도 한다. 스스로가 자신의 기원이 되기 위해 가야 할 곳으로, 사람들의 곁으로 찾아가게 만든다. 이 소설엔 사랑보다 더 깊은 '결속'들이 존재한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장소가 그 주인공이다. 키냐르 못지않게 늘 어떤 '곳'에 대한 근원을 알 수 없는 열망을 지닌 채 살아가는 내겐 그의 글도 일종의 '곳'이 된다. 그곳엔 살아오며 느꼈던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있지만 그 어느 것도 해를 끼치거나 조여오지 않는다. 기쁨도 슬픔도 초월한 내면의 장소에 다다른 느낌이다. 이야기의 힘이란 그런 역할을 해준다. 작가 자신에게도, 독자에게도 말이다.
"여전히 두려웠지만, 더 이상 두려움이 두렵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의지가 되었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었고, 추위를 사랑하고, 억수 같은 비가 내려도 외출을 즐기고, 낮게 뜬 구름을 사랑하고, 체념을 사랑하고, 고독을 사랑하고, 불면을 가상하게 여기며, 밤을 좋아하고, 한밤중의 정처 없는 보행을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다. 일단 세계가 광대무변한 존재로, 마구 쳐들어오는 불가해한 존재로, 완전히 초연한 존재로 별안간 바뀌게 되면, 우리 앞에 펼쳐지는 해변은 얼마나 놀라운가! 그때 세계는 출생과도 흡사해진다. " (p117)
'라클라르테'는 파스칼 키냐르가 이 소설에 만들어 넣은 가공의 항구도시다. 바다에서 수직으로 솟아 있는 작은 도시, 절벽에 붙어 있는 마을, 절벽 위의 황야, 개암나무숲에 가려진 소박한 집, 아주 작은 골짜기의 틈새로 이어진 내포, 이러한 곳들이 주인공 클레르를 결속시켜 주는 '곳'이다. 마치 조난당한 것처럼 뿌리내리지 못하고 살던 클레르는 이곳에서 항구적이며 믿음을 주는 관계에 속하게 된다. 마치 자신이 기원 내의 시초인 양, 근원적인 평화를 얻는다. 키냐르는 노장사상에 관심이 많아 1996년 장자의 고향을 여행했는데, 이후의 작품들에 그 경험을 꾸준히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이 소설 역시 언뜻 사랑 이야기인 듯싶지만 철학에 가까운 내용이라 사색하듯 읽어야 했다.
두 어번을 반복해 읽다 보니 이보다 먼저 읽었던 키냐르의 「빌라 아말리아」가 떠올랐다. 그래서 두 달만에 그 책을 다시 펼쳐 읽었다. 두 소설 모두 '곳'에 대한 결속을 주제로 하고 있어서 비슷한 길을 다른 정경으로 걷는 느낌이었다. 나는 사실 '빌라 아말리아'의 안 이덴에 더 가깝다. '신비한 결속'의 클레르는 안 이덴의 완성형인 것 같은데, 어느 순간 클레르는 도약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키냐르 역시 "클레르가 무척 부럽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쓴 작품 중에 가장 애착을 느끼는 소설이라는 그의 언급이 없었더라도,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저자인 키냐르가 주인공 클레르에게 상당한 애정을 지니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어떻게 보면 클레르를 통해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 같기도 했다.
"걷기는 '곳' 안에서 무엇의 길을 트고, 시간 안에서 무엇을 구멍 낸다. " (p219)
"그녀라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아마도 우리가 '존재한다'고 부르는 것이 그런 것이리라. 나중에 그녀는 자신을 괴롭히는 것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점차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p220)
많은 작가들이 그렇겠지만, 소설을 쓰는 것이 키냐르에겐 치유 그 자체인 듯싶다. 글을 읽는 동안 이 소설은 저자 자신을 위한 것일 거란 생각이 그저 이유 없이 들었다. 자신이 닿고자 하는 곳에 클레르를 가게 함으로, 그의 은밀한 내적 소망을 이룬 듯 보였으니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침묵이 좋아진다.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넓고, 깊고, 가슴 저미는' 침묵에 휩싸일 때, 나의 내면이 가장 활력적이란 걸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동안 담고 있다 보면 저절로 빠져나가야 할 것들이 빠져나가고, 나에게 필요한 것들만 수면 위로 떠오르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좀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침묵이 필요할 때, 파스칼 키냐르의 글은 꽤 좋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최소한의 인물과, 대화랄 게 거의 없는 내면의 묘사, 축약과 도약이 있기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