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는 달리 소소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는 산문집이다. 책을 읽고, 쓰고, 여행하는 이야기랄까, 꽤 진지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어딘가 모르게 소박한 일기를 읽는 것 같았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 위화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어서 어떤 스토리가 없는 짧은 글을 쓰는 데는 그의 장점이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았다. 반면 또 다른 산문집인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선 풍부한 이야기와 함께 그의 삶과 성찰들이 펼쳐지니 말이다.

 

 

 

여행에 관한 산문으로 예를 들자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엔 스스로가 섬세한 관찰 렌즈가 되어 어떤 결론이나 생각이 아닌 독자를 위해 주변 모든 것들을 스케치하듯 묘사해준다. 나로선 가장 선호하는 유형의 글인데, 자신의 생각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도 이런저런 묘사들을 통해 오히려 저자의 생각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다른 사람들은 관심 갖지 않을만한 사소한 것들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인데, 예민한 수신기와 같은 하루키의 시선은 내가 궁금해하는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포착해줄 때가 많다. 그래서 하루키의 여행기를 읽다 보면 떠나고 싶다는 생각보단 계속해서 읽고 싶단 생각이 든다. '좀 더 이야기해주세요..' 이런 기분으로 말이다.

 

 

 

또 다른 유형의 예로는 번역가 김화영의 경우인데, 그의 여행기에선 장소에 대한 여행이라기보단 생각 속으로의 또 다른 여행을 하는 느낌이다. 특유의 유려한 문체로 자신이 사랑하는 문학을 장소에 녹여내는데, 가끔은 저자 스스로 도취되어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런 생각에서 저런 생각으로 펼치고 나열하는 방식이어서 그 독특함과 아득함에 매료되기도, 또 그 때문에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위화의 경우엔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간다. 주변을 포착하는 렌즈보단 직접적인 자신의 경험을 통해 서술하는 방식이어서, 이야기가 풍부할 땐 마치 그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몰입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짤막한 글을 쓸 땐 그저 평범한 누군가의 일기를 읽는 것 같다. 중후반부로 갈수록 그런 느낌의 글들이 많아졌는데, 위화를 알아가는 즐거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비슷비슷한 내용을 연이어 읽다 보니 지나친 소박함에 아쉬움이 생기기도 했다. '뭐지?' 싶은 마음에 먼저 출간되었던 위화의 산문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읽었다.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는 이 책은 보다 힘 있고, 충실했다. 하지만 또 '뭐지?' 싶어졌다. 두 책을 연달아 읽다 보니 더 쉽게 눈에 들어왔는데 내용 중 겹치는 부분들이 꽤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위화가 말하는 그 '거대한 차이' 역시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서 언급한 내용이었다. 어쩐지 속은 것 같다는 느낌에 책날개를 읽어 보니 어느 정도는 그럴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검열로 인해 중국에서 출간할 수 없었고,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는 중국에서도 출간한 내용으로 두 책의 내용이 일정 부분 반복될 수밖에 없었을 거란 걸 말이다. 그럼에도 나처럼 연이어 읽은 독자들에겐 뭔가 허무한 부분이 있는데 한 권씩 따로 읽었으면 저마다 나름으로 좋았을 테지만 연달아 읽다 보니 재방송을 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차라리 치료법을 찾는 사람이라 하겠다. 나는 한 사람의 환자이기 때문이다. " (p13)

 

 

 

그럼에도 위화의 산문을 읽으며 느꼈던 건 그는 소박한 독자이자, 타고난 이야기꾼이며, 시대를 통찰하는 예리한 시선을 지닌 작가라는 것이다. 한편으론 그 자신이 급변하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으로 살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중국 문혁 시기에 성장했고, 이후 급격한 사회, 경제적 변화를 겪은 세대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투쟁과 폭력들을 목도했고, 수많은 사형 장면을 목격했으며, 의사이신 부모님과 함께 병원의 숙소에서 살았던 위화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경험하며 자랐다. 그가 늘 불면에 시달리는 이유는 숙소 가까이에 있던 영안실에서 들려오는 갖은 곡소리들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하는데 수없이 많은 곡소리, 갖가지 곡소리를 다 들었고, 한밤의 곡소리는 저마다 그를 불러 깨웠다는 것이다.

 

 

 

"밤의 곡소리는 공허했다. 이는 내 유년 잠자리의 친구가 되어 내가 생의 변경에 누워 죽음의 잠꼬대를 듣게끔 했다. 삶의 뜨거움 속에서 죽음의 서늘함을 찾았지만 죽음의 서늘함은 다시 더 많은 뜨거움을 발산하기 마련이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삶과 죽음이다. " (p82)

 

 

 

도처에서 죽음을 목격하고, 죽음을 회피하지 않음으로 오히려 삶을 말하는 작가들이 많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위화는 유년 시절의 경험이 한 사람 일생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여겨왔다. 세상의 처음 모습이 그때 우리 인상에 들어오고, 우리가 크고 나서하는 모든 일들은 그저 그 유년 시절에 지녔던 기본 모습의 부분적인 수정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의 생각을 하는 편인데, 내가 무엇을 수정해야 할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나를 좀 더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말하자면 내가 가진 프레임의 모양과 크기를 알아야만 다른 곳을 보려는 노력도 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저 밖을 바라보는 시선만을 가지곤 늘 제자리로 돌아오는 공허함 뿐이지만 나의 모양과 크기를 알면 내가 보는 세상이 왜 동그란지, 네모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깨우쳐 주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문학이라는 생각이다.

 

 

 

"나는 글만 쓰면 집으로 돌아간다. " (p83)

 

 

 

위화의 창작은 그를 심리적 암시이자, 상상의 귀착점인 그곳으로 인도하고, 독자인 나는 글을 읽으며 나 자신을 바라본다. 나의 이야기가 부족하던 어린 시절엔 알 수 없는 공허함을 수많은 이야기들이 채워주었고, 세월이 흘러 나의 이야기가 풍성해졌을 땐 타인의 이야기로 나의 이야기를 다시 읽었다. 나와 내가 너무 멀었거나, 너무 가까워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문학을 통해 더욱 풍부한 이야기로 읽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나의 발견이 없었을 땐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인에 대한 발견도 없었던 것 같다. 나를 읽게 되면 타인을 좀 더 이해하게 되고 스스로의 치료법을 찾게 된다. 아니, 찾는 과정 자체가 치료라고 생각한다.

 

 

 

"지나간 삶은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지만 지나간 독서는 세월이 지나면 더욱 새롭다. 20여 년 동안 위대한 작품들을 읽을 때면 늘 다른 시대, 다른 국가, 다른 언어의 작가들에게서 나 자신의 감성을 읽었고, 심지어 나 자신의 삶도 읽었다. 문학에 어떤 신비한 힘이 진정으로 존재한다면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생각한다. " (p112)

 

 

 

위대한 작가는 다들 자기만의 독특한 자세로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의 길을 가고, 그런 뒤 인류 공통의 주제로 모인다고 말한다. 문학의 존재는 서로를 낯설게 함이 아니라 잘 알게 하기 위한 것이며, 최종적으로 독자는 끝없이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위화의 독서 경험은 나의 경험과도 비슷하다. 어떤 작가의 정거장을 거치든 문학의 신비함이란 나의 자화상을 찾게 됨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힘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어쨌든 살아가게 만들어 준다. 삶의 본질을 깨닫게 됨으로, 비교적 단단하게 말이다. 개인적으로 책에 관한 책, 독서에 관한 책엔 관심이 없는 편이다. 책이란 어떤 방법론, 기술로 읽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읽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간절함이 생길 땐 간절함으로, 담담할 땐 담담하게 읽으며,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삶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작가가 독자로서의 경험을 말하거나 자신의 삶을 말하는 책엔 관심이 간다. 그 고독한 시간을 견디면서도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의 내면이란 어떤 것일지 늘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책을 어떤 느낌으로 읽었으며, 어떤 작가의 글을 좋아하는지도 알고 싶다. 그래서 작가로서 자신의 책에 대해 말하는 것보단 독서 경험을 말해주는 것이 더 좋다. 글을 쓰는 과정이나 어떤 시기에, 어떤 필요에 의해 글을 썼는지에 대해서 말해주는 건 고맙지만 자신의 책을 스스로 해설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출간된 책은 그 글을 읽은 독자의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로서 억울하거나 답답한 때는 있겠지만 그래도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한해선 과묵한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내 스승이라고 할 수 있을 사람은 내 생각에는 오직 윌리엄 포크너뿐이다. " (p95)

 

 

 

이 책을 통해 위화의 독서 경험을 다소나마 알 수 있었는데 윌리엄 포크너를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에게 절묘한 한 수를 배웠기 때문이다. 바로 심리묘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인데 포크너를 통해 진정한 심리묘사에, 실은 심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도스토옙스키와 스탕달을 읽을 때에도, 두 사람은 심리 묘사의 대가이지만 심리묘사 차원의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다고 한다. 이언 매큐언을 읽은 후유증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매큐언의 단편 소설은 '예리한 칼날' 같고, 읽는 과정은 '칼날을 만지는 과정'과도 같다고 말한다. 그밖에 잘 알려진 작가들, 또는 내가 접해보지 못 했던 작가들에 대해서도 조금씩 언급하고 있다.

 

 

 

"「형제」의 서사 언어를 두고 일부 비평은, 당신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우선 단숨에 잘 읽힌다고 말하고, 이어서 언어가 간결하지 않다고 말한다. 여기서 해명하겠다. 간결하지 않은 언어가 어떻게 단숨에 읽힐 수 있는가? 이것은 언어의 역할에 대한 이해의 차이라고 본다. " (p228)

 

 

 

그리고 이 책의 부록엔 위화가 스스로 말하는 자신의 작품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는 「형제」의 출간으로 자신의 창작 인생에서 가장 거센 조롱을 당했다고 말한다. 사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직접 설명하는 걸 좋아하지 않기에 썩 달갑진 않았었다. 하지만 재차 읽다 보니 부조리한 세상을 주시하며, '왜 작가의 상상력은 현실 앞에서 늘 창백하고 무력한가'를 고민하는 위화 자신에게 필요한 과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란 신기한 게 인간관계와 비슷해서, 처음엔 조금 짜증스럽게 읽혔던 부분도 재차 읽을 땐 이해하는 시선이 생기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내가 정말 좋았던 책은 감상도 짧게 남기는 편인데, 아무래도 책의 내용에 저항하는 부분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어딘가 만족스럽지 않았던 책은 그 이유를 생각해보느라 좀 더 읽어보게 되고, 감상 역시 비교적 세세하게 쓰게 된다. 어쩌면 이런 과정 역시 내가 하는 독서의 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좀 더 바라보게 된달까, 나의 관점이 아닌 저자의 관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고, 그래서 읽다가 정이 들어 별점이 높아질 때가 있다. 사실 이 책도 마찬가지여서 처음엔 빠르게 별 세 개를 눌러 두었었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와 중복되는 부분들이 꽤 있고, 위화에 대한 관심도와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굳이 몰라도 될 것 같은 일기 같은 글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중에서 한 권만 읽는 경우와, 좀 더 가볍게 읽고 싶은 독자들에겐 나름으로 좋은 책일 수도 있기에 별 네 개로 변경했다. 뭘 이렇게까지 고민하나 싶기도 하지만, 아마도 그동안 읽었던 위화의 소설이 좋았던 게 이유가 아닐까..

 

 

 

"인간 세상의 두려움은 갖가지 치가 떨리게 하는 폭행만이 아니라 운명의 가차 없는 냉혹함에서도 비롯된다. 운명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 (p139)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오늘을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특히 전혀 모르는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이는 다른 사람의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자신의 삶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 " (p233)

 

 

 

"내가 쓴 것은 우리의 삶이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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