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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포트 - 여름 고비에서 겨울 시베리아까지
김경주 지음, 전소연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김 경주. 내가 김 경주라는 시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그가 미당문학상 최연소 후보라는 신문기사를 접하면서였다. 그때 같이 읽은 그의 시 "주저흔"이 너무 인상적이었던데다 젊은 나이에 카피라이터, 고교 교사, 방송작가, 영화제작자등을 두루두루 거친 그의 직업 이력도 범상치 않게 다가왔기 때문에 "김 경주"라는 이름 석 자를 좀 더 관심 있게 바라본 것 같다.
어떤 이는 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걱정스러울 정도로 재능이 많은 시인이다."
그의 글은 느낌이 풍부하면서도 예민하다.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고, 그 사물이 원래부터 지니고 있었으나 보통사람들이 발견해내지는 못하는 요소들을 끌어내어 언어로 표현하는 재능이 너무나 탁월하다. 그는 이 세상을,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시간들을 온 감각을 다 해 느끼며 사는 듯 하다.
그런 그가 여행 산문집을 내 놓았다.
패스포트.
시인의 감각이 물씬 묻어나는 단어가 아닌 단도직입적인 제목이 의외였고, 400여쪽이 넘는 꽤 두꺼운 분량도 의외였고, 그의 글과 조화를 이루는 여러 장의 사진들도 의외였다. 프롤로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번 생과 외교를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어쩐지 그게 여행이었던 것만도 같고 시였던 것만도 같고, 혹은 사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유목의 땅인 고비에선 걷거나 지프를 탔고 유형의 땅인 시베리아에선 기차를 타거나 걸었다. 고비에서 나는 인간이 지상을 유목하는것이 아니라 삶이 저 스스로 바람 속으로 떠나는 유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유형이란 지상으로 내려와 인간의 시간을 견디는 빛의 시차라는 걸, 빛이 눈에 뒤덮인 나무처럼 얼어버린 시베리아에서 느낄 수 있었다.
왜 그는 이동식 천막 게르와 함께 유목민들이 떠도는 모래의 땅 고비와 정치범과 소수민족들이 강제로 쫓겨나 살아야했던 동토 시베리아를 여행지로 선택한 것일까? 그는 고비사막 여행기에는 유목, 시베리아 여행기에는 유형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두 단어 모두 안락함과는 거리가 먼, 고단한 여정의 느낌을 풍기고 있다. 시인은 고행을 통해 삶의 에테르를 찾고자 했던 것인가?
우리는 그의 여행기에서 그가 어떤 호텔에서 묵었는지, 어떤 유적을 돌아보았는지,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에 대한 정보는 얻을 수 없다. 그의 여행기에서 우리는 그의 눈으로 바라본 고비와 시베리아의 이미지와 그의 사유만 따라갈 수 있을 뿐이다. 그는 고비사막의 먼지에서 시차를 발견하고, 사진은 빛과 렌즈가 나누는 춤이라 생각하고, 세숫대야에서 간절한 사랑을 상상한다. 그리고 시베리아의 기차에선 만남과 이별을, 유배지의 어떤 방에선 그 옛날 데카브리스트들과 그 부인들의 열렬하고도 처절한 사랑을 떠올린다.
패스포트를 읽으며 나는 시인이 고비와 시베리아를 여행했지만 동시에 그의 삶을 여행했고, 사막의 먼지만큼, 바이칼의 호수 깊이만큼 겹겹이 쌓여온 시간을 여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글에 나타나는 바람, 먼지, 시차, 빛의 이미지가 이 여행을 어찌보면 몽환적이고 감각적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얼음속에 가두어 둔 불꽃처럼 끊임없이 계속되는 삶이라는 여행에 대한 절절한 고뇌와 열정, 그리고 아련하게 내비치는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그 이미지 속에 숨어있다는 걸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