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 문

                                                  권 혁웅

 

오래 전 사람의 소식이 궁금하다면

어느 집 좁은 처마 아래서 비를 그어보라, 파문

부재와 부재 사이에서 당신 발목 아래 피어나는

작은 동그라미를 바라보라

당신이 걸어온 동그란 행복 안에서

당신은 늘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 젖었을 것인데

그 사람은 당신과 늘 반대편 세상이 젖었을 것인데

 

 

이제 빗살이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어떤 간격을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하다면

어느 집 처마 아래 서 보라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촘촘히 꽂히는

저 부재에 주파수를 맞춰 보라

그러면 당신은 오래된 라디오처럼 잡음이 많은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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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헤어지고 - 고흥준

 


어느 골목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네. 은새잎 냄새가 코를 찔렀는데 그때가 유월이었는지, 칠월이었는지, 하루종일 비가 왔는지, 비가 오다 잠시 그쳤던 저녁이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네. 내가 기억하는 건, 당신의 창가에서 흘러나오던 작은 라디오 소리. 초승달이 낡은 지붕 위로 살금살금 걷던 소리.





때로는 어느 골목이었는지 모두 기억할 수 있네. 당신이 잠시 걸음을 멈춰 처음으로 나를 돌아본 길이었는데 그날은 고양이들이 낮은 담장에 나란히 앉아 낯선 이를 구경하던 밤, 아직 밤이기엔 너무 일러 낮잠을 실컷 잔 늙은 호박잎들이 옹종옹종 수군거리던 저녁이었네. 그때 사랑은 참 다정도 하여 반짝거리는 심장을 내게 주었지.



그 밤을 지나는 동안 젊었던 몸뚱이는 참으로 쉬이 늙어 흐느끼던 울음으로도 추억은 남질 않았네. 고양이들의 밤도, 호박잎들의 밤도, 은새잎 가벼이 지던 밤도, 당신이 안녕하며 뛰어갔던 골목에는 무엇 하나 남질 않았네. 그 길에 이리 늙은 몸만 홀로 남아 옛 소리를 듣던 귀는 자꾸 닫혀가고, 당신의 이름 석 자를 담벼락에 쓰다가 주저앉았던 그 골목에, 스물 몇이었던 세월만 고스란히 남았네.

 

 

* 체셔님이 올려놓은 시인데 너무 좋아서 여기다 베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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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22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하셨어요. :)
저도 너무너무너무 좋아하는 시랍니다.
시인이 시작활동을 계속 하심 좋으련만....

책향기 2007-08-22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베껴왔을 뿐인데 뭐 그런 칭찬까지...^^; 근데 이 시 옮겨오고 나니 서재가 이상해졌어요. <시 읊조리기> 클릭하면 왜 "그녀와 헤어지고"만 뜨는걸까요? 저번에 올린 "주저흔"은 안 보여요. 근데 체셔님 댓글 클릭하면 "주저흔"이 뜨거든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비로그인 2007-08-23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말고 좋은게 또 있었단 말입니까?
 

              주저흔(躊躇痕)

                                             김 경주

 

몇 세기 전 지층이 발견되었다

그는 지층에 묻혀 있던 짐승의 울음소리를 조심히 벗겨 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발굴한 화석의 연대기를 물었고 다투어서 생몰연대를 찾았다

그는 다시 몇 세기 전 돌 속으로 스민 빗방울을 조금씩 긁어내면서 자꾸만 캄캄한 동굴 속에서 자신이 흐느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굴 밖에선 횃불이 마구 날아들었고 눈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간을 오래 가진 돌들은 역한 냄새를 풍기는 법인데 그것은 돌 속으로

들어간 몇 세기 전 바람과 빛덩이들이 곤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썩지 못하고 땅을 뒤집어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일 시간에 귀속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전이를 일으키기도 한다

화석의 내부에서 빗방울과 햇빛과 바람을 다 빼내면 이 화석은 죽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연구결과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바람은 죽으려 한 적이 있다>

어머니와 나는 같은 피를 나누어 가졌다기 보단 어쩐지 똑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 올해 미당 문학상 후보중 최연소인 김경주 시인의 작품이다. "주저흔(Hesitation Marks. 자살하기 직전 머뭇거린 흔적)"이란 이미지에서 언뜻 얼마전 읽은 소설의 주인공 주홍이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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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18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저흔... 아름다운 글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

책향기 2007-08-18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교주께서 방문해 주시다니.. 영광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