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가 살인 사건의 재구성] 서평단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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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가 살인사건의 재구성
라우로 마르티네스 지음, 김기협 옮김 / 푸른역사 / 2008년 4월
평점 :
생각보다 만만한 책은 아니었다. 제목에 들어간 "살인사건"이란 말만 보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추리 소설이려니 지레짐작했던것은 큰 오산이었던 것이다. 얼마전에 읽었던 시오노 나나미의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을 통해 그 시대 이탈리아에서 급박하게 돌아갔던 정치 상황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것이 책을 읽어내는데 조금 도움이 되었다. 작년 이탈리아 여행중 피렌체에 들렀을때 가이드가 시뇨리아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는 설명을 해 줄때는 그저 그런가보다 흘려 들었었는데 이렇게 그 피의 역사를 책으로 읽고 나니 그 느낌이 새삼 다르게 다가온다.
로렌초 데 메디치! 1449년에 태어나 20세의 나이로 가문의 수장이자 피렌체 공화국의 지배자 자리를 물려받은 그는 1492년 사망할 때까지 뛰어난 정치와 외교수완을 발휘했고,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했을뿐만 아니라 그 자신 시인으로서의 감성까지 간직했던 피렌체 르네상스의 중심이었던 인물이다. 이탈리아를 통일시키려는 야망을 가졌던 체사레 보르자보다는 딱 한 세대 앞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이다. 둘 다 젊은 나이에 한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올랐으며 뛰어난 지략가이자 두둑한 배짱을 가진 남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로렌초는 교황의 반대편에 서서 그의 입지를 확고히 했고, 체사레는 교황의 세력을 등에 업은 채 그의 야망을 펼쳤다가 교황의 선종과 함께 몰락의 길을 걸었다는것이 차이점이라 할 수 있겠다. <우아한 냉혹>이라는 수식어는 오히려 로렌초 메디치에게 더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나 같은 경우는 책을 읽다 보니 초반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먼저 헷갈리고 시간 순서대로 서술되어 있지 않은 사건들이 어떻게 연관된것인가가 헷갈려 진도가 잘 안 나갔다. 하지만 책의 초반부에 크게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그리고 작게는 개인과 가문의 이익과 명예가 어떻게 얼키고 설켜 "4월의 음모"가 꾸며졌는지 집중해서 넘기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책장이 수월하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동생 줄리아노가 파치가의 음모로 희생되자 로렌초는 바로 복수를 시작하고, 교황과의 전쟁까지 불사한다. 파치가의 재산을 몰수하고 심지어 파치가의 여인에게 혼인 금지령까지 내린다. 이 복수의 과정에서 그는 점점 전제군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저 피렌체 공화정의 한 시민일 뿐인 그에게 이런 힘을 준 것은 과연 무엇일까? 대대로 불려온 가문의 재력, 동생을 죽이고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했던 파치 가문과 교황에 대한 복수심, 지도자의 위치에 걸맞는 그의 민첩한 두뇌와 사교성, 정치적 수완, 그리고 대담성과 예술적 재능까지 모든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그를 "위대한 로렌초"로 불리게끔 만들었던것 같다.
특히 인상적이었던것은 정치적으로는 피를 부르는 복수와 전쟁도 불사하는 그들이 예술과 학문에 쏟아부었던 열정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또한 그들이 축적했던 엄청난 재력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기도 하다. 또, 로렌초와 그 당시 유력 가문들은 좀 더 높은 지위를 확보하고자 할 때나 경쟁관계의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혼맥을 적절히 이용했는데, 심지어 교황까지 자식들을 두고 혼사에 고심을 거듭했으니 예나 지금이나 결혼이 정치 경제와 결합하면 매우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사람이 처한 시간과 장소를 감안하여 살핀다면 도덕성이란 단순명쾌하기만 할 수 없는 것이다.>(p362)라고 말한다. 그 시대 교회의 부와 권력을 조카들에게 주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교황에게 도덕성이란 단순명쾌하지 못한 정도를 넘어서 혼탁함 그 자체였다. 자신과 가족, 그리고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암살, 공금횡령, 화폐위조, 정략결혼까지 서슴지 않았던 로렌초 메디치뿐만 아니라 다른 귀족에게도 아마 마찬가지였겠지만....
가장 엽기적이었던 내용은 죄인을 처벌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시민들에게 훈시 효과를 거두기 위해 죄인을 죽일 때는 특히 잔인한 방법을 동원했다는데, 하늘 아래 부러울 것 없는 가문의 사람들도 피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 그 땐 이미 사람이 아니라 짐승보다 못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할 각오를 해야만 한다. 읽다보면 중세에 태어나지 않은것만도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책의 장점으로는 뭐니뭐니해도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그 당시의 상황을 추적해나간 작가의 노력을 꼽을 수 있다. 메디치가 살인 사건이라는 하나의 모티브를 중심으로 교황과 메디치가문의 갈등, 그들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과 주변국들의 권력 싸움이 마치 촘촘한 그물망을 짜놓은 듯 세세하게 그려진다. 적지않게 실려있는 그림들은 보티첼리등 거장의 작품들이라 이를 감상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책을 둘러싸고 있는 겉표지 안쪽에는 메디치가와 교황, 그리고 파치가의 가계도가 그려져 있으니 책을 읽다 헷갈리는 인물이 나오면 참조할 것!^^
하지만 책을 읽다 아쉬운 점도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었다. 소설이 아닌 이런 책을 읽을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각 분야의 전문가가 먼저 번역을 하고 나면 국문학 전공을 한 번역가가 문장을 우리말 어순에 맞춰서 좀 더 감칠맛나게 손질을 한 번 더 해주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이 책도 예외는 아니어서 군데군데 영어를 그대로 직역해서 어색한 표현이 많았고 번역한 본인도 헷갈렸는지 문장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도 있었다.
예를 들어 p20 "8, 9천 가량의 인구를 가진 포를리는 흑사병의 여파 속에도 그 다섯 배의 인구를 가진 활기찬 피렌체와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라는 문장에도 영어식 표현이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는 <인구를 가졌다>고 표현하진 않는다. 그리고 피렌체를 설명하는 말이 <그 다섯 배의 인구를 가진> <활기찬>처럼 두 번 연이어 나오는것도 영어식 어순을 그대로 번역한 것 같다. "포를리에는 8, 9천 가량의 인구가 있었다. 피렌체의 인구는 그 다섯배였는데, 흑사병의 여파 속에서도 활기찬 피렌체는 포를리와 전혀 다른 곳이었다."라고 어순만 우리말에 맞게 바꿔줘도 읽기가 훨씬 편안하지 않았을까 싶다. 책을 읽는 내내 이렇게 영어 어순에 충실한(?) 번역이 너무나 많았는데, 내용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보게 하는 효과도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읽으면서 재미를 떨어뜨리는건 어쩔 수 없었다. 출판사에서 조금만 더 세세하게 신경썼다면 훨씬 훌륭한 책이 될 수 있었을텐데, 이런 소홀한 번역때문에 방대한 집필을 한 저자의 노력이 빛바래는것 같아 안타까왔다.
두 번째로 아쉬운 점은 책에 실린 그림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그려진 훌륭한 그림들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점은 너무 좋았지만 그림이 흑백인데다 몇몇 그림은 인쇄도 너무 진하고 어둡게 된 것들이 있어 책의 품격을 떨어뜨렸다. 이왕이면 칼라로 실었다면 책의 내용도 훨씬 더 생동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다가 오탈자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또한 사소한 부분이긴 하지만 적지 않은 책값에 비해 너무 성의가 없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p81 추첨함를(추첨함을)
p86 4,00명(4,000명)
p104 그후원의(그 후원의)
p167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아니었지만(들어가지는 않았지만)
p175 사르노 사태에 관해 멋대로 이야기하려는 사람들은 "이 정권이 자유로운 공화제가 아니라 독재적 군주제의 성격이라는 쪽으로 이야기를 몰고감으로써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공화제의 자유를 되찾을 것을 제창한다. 내가 보기에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주어에 대한 서술어가 빠졌다. 문장이 너무 길어 잊어버린듯...^^
p 181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하며 뛰어난 평판을 누리던 그를 (자기네 주군들의 첩자 역할을 하는) 외국 대사들을 접대하는 일도 잦았다. <그>와 <대사>중에 <그>가 주어일 듯 싶다.
p 231 가혹한 짓을한(가혹한 짓을 한) 폭발적인힘이(폭발적인 힘이)
p239 혀를 잘리는(혀가 잘리는 또는 혀를 자르는) 울려나왔음을(울려 나왔음을)
p258 백작이 즉각 살비아티 대주교와 프란체스코 데 파치는 그와 반대로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로렌초는 "(피렌체에서) 사랑보다 미움을 많이 받고 있으며, 그들이 (메디치 형제가) 쓰러지기만 한다면 피렌체 사람들은 (감사의 뜻으로) 만세를 부를 것이라고 했다." <로렌초는>이 "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p347 좋은 뜻이든 모든 것을 나쁜 뜻이든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모든 것을)
p385 탄생는 과정 (탄생의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