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목소리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4
버넌 리 지음, 김선형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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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목소리』

휴머니스트 세계문학이 시즌별, 테마별로 만나볼 수 있는 새로운 시도에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그동안 남성 중심의 고전이 주를 이뤘던 건 사실이죠. 어렵고, 감히 범접하기 힘들어 보이던 두께, 읽어도 뭔 소린지 잘 모르겠던 시절.. 자연스럽게 고전에서 손을 땠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인이 되고, 아이가 성장해 가는 요즘 드디어 다시 고전을 읽기 시작했지만 사실 예전보다 조금 나아졌다 뿐이지 여전히 고전 읽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4개월마다 다섯 작품씩 발표되는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즌 1은 '여성과 공포'라는 테마입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단행본이 무려 네 권이다 포함되어 있는데 그중 한 권이 바로 버넌 리의 <사악한 목소리>입니다. 유령 연인, 끈질긴 사랑 - 스피리디온 트렙타의 일기 중에서, 사악한 목소리, 부록 마법의 숲까지 네 편의 단편을 모아 놓은 단편집이에요.

버넌 리의 작품 속 공포는 이성적이고 정상적이었던 관습이 무력화된다는 예감과 인식에서 온다고 해요. '유령 연인'은 켄트의 소지주 오크 씨 부부의 저택에 머물며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오크 씨의 대저택으로 들어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화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는 듯한 옷을 입고, 매 순간 다른 세계에 가 있는 듯한 오크 부인 앨리스 오크는 찰스 1세 시기에 그려진 초상화 속 주인공 앨리스 오크와 흡사한 모습이었는데요. 그 당시 앨리스 오크의 내연남 러브록을 살해한 남편을 앨리스가 도왔다고 합니다. 그 잔산이 현재로 이어지는 걸까요? 현재의 앨리스는 과거의 앨리스에서 집착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과거 그녀가 사랑했던 러브록, 앨리스의 온 마음이 향한 상대, 아내를 향한 집착이 점점 커지는 윌리엄 오크. 도대체 오크의 대저택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끈질긴 사랑'은 기록 보관소에서 300년 전, 전 스티밀리아노 공작부인이자 우르바니아의 공작 귀달폰소 2세의 아내였던 메데아 다 카르피를 사랑하게 된 역사가의 일기입니다. 약혼했던 남자가 메데아 때문에 파혼까지 할 정도로 절세미인이었다고 소개되는 메데아. 스물일곱이 못 되는 나이에 다섯 명의 연인을 참혹한 파국으로 몰아넣고 결국 처형당했다고 합니다. 그런 메데아를 사랑하게 된 역사가의 눈앞에 나타는 그녀!! 그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표제작인 '사악한 목소리'는 바그너를 추종해 북유럽 남성 신화를 오페라로 작곡하려는 젊은 작곡가의 이야기입니다. '차피리노'라 불리던 이의 초상화를 보고 그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다. "멍청하고 사악한 목소리의 노예, 인간의 지성이 창조한 게 아니라 육신이 잉태한 악기의 연주자"라는 차피리노가 부른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세 번째 노래는 얼마나 강력한 힘이 있었던 걸까요?

버넌 리의 작품 속 공포는 자극적이고 악랄하지 않았습니다. 서서히 파고드는 일상 속에서의 공포감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정상에 드리운 서늘한 그림자가 문득 오싹하게 변모하는 순간들, '두려운 낯섦'이라 표현했는데요. 익숙했던 것에서 오는 공포감이야말로 최고조의 오싹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란 걸 작품 속에서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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