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
위작 논란으로 유명세를 떨쳤던 화가 천경자. 딱 이만큼만 알고 있었다. 내용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아~ 그랬구나.. 하는 정도? 이번 희곡 형식의 <천경자>를 통해서 그녀의 삶과 그녀의 예술혼이 얼마나 반짝이고 아름다웠는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뭔가 아름답기만 한 삶을 살았을 것 같은 예술가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던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자.
꿈, 사랑, 모정 이 세 가지 요소에 의해 살아왔다는 천경자는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박 의관'으로 불리던 외할아버지는 밤마다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천자문도 외할아버지에게 배웠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즐겨 그렸던 천경자는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고 유학의 꿈을 키우던 그녀는 돌연 혼사 문제를 들이미는 아버지의 뜻을 꺾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4년간의 동경 유학 생활, '조부'로 조선미술전람회 선전 입선, 정이 가지 않는 남자와의 결혼 그리고 이혼, 동생의 죽음, 6·25 전쟁 당시 가정 있는 인연, 출산 등 왜 이리 평탄치 않은 만남만 있었던 건지 너무 안타까웠던 천경자 화가의 과거였다. 그 당시 남자들이 무뚝뚝하고 잔정이 없기로 유명했지만 해도 너무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무너져 내릴 법도 한 지난날이었지만 천경자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녀는 아프리카로 떠났고 6개월간 9개국을 돌며 스케치 여행을 했다. 그 후로 전시회도 계속했고 인도와 중남미, 아마존 등으로 5개월간의 스케치 여행, 미국, 영국 등으로 스케치 여행을 다녀왔다.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일제강점기, 전쟁도 겪은.. 그녀가 성장했던 당시 상황이 녹녹치 않았음에도 자신을 성장시켰던 천경자. 위작 논란에 휩싸였을 때 심정이 어땠을까.. 이 사건으로 인해 딸이 있는 미국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삶을 마감했다고 하는데 절필까지 하며 떠나갈 때 기분이 어땠을지 감히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현실이란 슬퍼도, 제아무리 한 맺힌 일이 있어도 그걸 삼켜 넘기고 웃고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럴 때 한이란 것이 생겨요. 이게 인생으로서의 매력이지요. 이런 매력 속에서 죽을 때가 되면 아무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웃고 죽는 것이 현대의 한이지요."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서울시에 기증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지 않았을까. 그녀가 불태웠던 예술혼이 얼마나 뜨겁게 활활 타올랐는지 눈앞에 그려진 것 같은 책 <천경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