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 정원의 붉은 열매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평점 :
<푸르른 틈새>라는 책은 한때 눈에 띄었는데 스쳐 지나만 갔던 것 같다. 그리고 처음 만난 권여선 작가의 단편집이 바로 <내 정원의 붉은 열매>다. 읽어내려가면서 심지가 단단하달까, 강단 있다는 느낌도 들었고 지적으로 사고한다는 느낌도 동시에 들었다. 그리고 이 작가가 참 좋아졌다.
총 7편의 단편 가운데 '빈 찻잔 놓기', '사랑을 믿다', 'K가의 사람들'이 가장 좋았다.
빈 찻잔 놓기 : 마치 홍상수 영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 시나리오 쓰는 여자가 영화판을 맴돌며, 여자선배와 한 남자, 한 어린 여자 사이에서 불현듯 사람의 진심에 대해 그리고 인생의 진실에 대해 깨닫게 된다.
사랑을 믿다 : 혼자 갈 수 있는 단골술집(그런 건 모든 애주가의 꿈일 것)에서 남자는 여자를 추억하고, 여자와 엇갈린 인연들을 재구성한다. 말 그대로 추억은 가장 맛있는 안주가 아닐까. 왠지 아련한 느낌을 주는 작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 운동권이 있었고 공부 모임이 있었던 1980~90년대의 대학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 맞아, 꼭 그런 선배가 있었지. 좁은 골목과 허름한 자취방들, 밤늦도록 벌어지는 초라한 술자리와 남녀 간의 감정 싸움이 있었지.
당신은 손에 잡힐 듯 : 퇴직한 남자의 담담한 일상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죽집의 아침 풍경이 눈에 선하다.
K가의 사람들 : 건조한 관객처럼 한 가족의 권력관계 들여다보기. 꽤 흥미로웠다.
웬 아이가 보았네 : 예술인마을에 나타난 여류시인. 그녀는 동네에 여러가지 풍파를 일으키고 사라진다. 소녀의 시선으로 바라본 엄마와 여류시인의 비교에 쿡쿡 웃음이 났다.
그대 안의 불우 : 게이머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데, 좀 실험적인 느낌이 드는 작품. 문장이 관념적이고 이야기가 갑자기 급정거하듯이 끝나버리는 게 아쉽다.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해보지 않고는 못 썼을 것 같은 리얼함이 있다.
단편을 잘 쓰는 작가는 드물다. 단편은 모종의 긴장감을 조성해야 하는데 그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권여선의 이 소설집만 놓고 보면 그녀는 거의 최고에 가깝다.
![](http://blog.ala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start.gif) |
|
|
|
"그건 충분히 희망이 있다는 증거 아니겠어?"
"희망? 무슨 희망?"
"사는 데 애착이 있는 한 희망은 있는 거잖아. 나는 그 희망을 은근히 훼방놓는 시늉만 하면 됐고."
희망을 훼방놓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간단히 설명했다.
"그래야 거기 희망이 있다는 걸 알지. 뭔가 잔뜩 어질러놓아야 거기 공간이 있다는 걸 알 듯이." -55p
|
|
|
|
![](http://blog.alad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end.gi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