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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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의 장편소설 <홀>은 제목 그대로 인생의 구멍에 빠져버린 남자 이야기다.

첫 장면에서 독자는 전신 불구가 되어 병실에 누워 있는 주인공 오기를 마주하게 된다.

오기는 눈만 깜박일 뿐 말조차 하지 못한다.

그 시점에 소설이 재미있을까-라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이 옴짝달싹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가.

하지만 인생의 이전 시점들을 더듬어가면서 아내와 장모와 그의 속물적 인생에 관심을 갖게 된다.

약간의 스릴러 요소도 있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사십대가 지나면서 인생은 점점 시멘트처럼 굳어가는 것을 느낀다.

변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고정된다.

지금 내가 가지고 누리는 모든 것은 그 전에 내가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대한 답이다.

그러니 가끔은 극적인 변화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밖에서 온 것이든, 안에서 온 것이든.

 

<서쪽 숲으로>를 흥미롭게 읽었는데, 어딘가에 갇혀버린 인간에 대한 스토리라는 점에서

두 작품은 유사하다.


표지가 반양장으로 유연하게 휘어진다. 겉모양도 참 잘 만든 책이다.  

 

어떻게 삶은 한순간에 뒤바뀔까. 완전히 무너지고 사라져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까.
그럴 작정으로 하고 있던 인생을 오기는 남몰래 돕고 있었던 걸까.
28p

자괴를 이겨내기 위해 언젠가 아내가 읽어준 허연의 시를 종종 떠올렸다. 사십대란 모든 죄가 잘 어울리는 나이라는 구절이 담긴 시였다.
그 구절을 생각하면 다소 마음이 놓였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대체로 그럴 시기라는 것에 안도했다.
오기가 생각하기에 죄와 잘 어울린다는 것만큼 사십대를 제대로 정의 내리는 것은 없었다.
사십대야말로 죄를 지을 조건을 갖추는 시기였다. 그 조건이란 두 가지였다. 너무 많이 가졌거나 가진 게 아예 없거나.
힘을 악용하는 경우라면 속물일 테고 분노 때문이라면 잉여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십대는 이전까지의 삶의 결과를 보여주는 시기였다.
또한 이후의 삶을 가늠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영영 속물로 살지, 잉여로 남을지.
78p

오기가 생각하기에 아내의 불행은 그것이었다. 늘 누군가처럼 되고 싶어 한다는 것.
언제나 그것을 중도에 포기해버린다는 것.
8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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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6-06-10 14: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옴짝달싹 못하고 눈만 깜박이는 남자라고 하니까 변신의 그레고르가 떠오르네요. 음. 사십대가 코 앞에 닥쳤는데 남은 인생 시멘트처럼 굳지 않게 저도 한 번 읽고 고민 좀 해 봐야겠어요.

베쯔 2016-06-10 15:54   좋아요 0 | URL
네. 제가 주인공 같은 극적 상황에 처하는 건 두렵지만요. 책속에서 그 방법을 알려주진 않지만 생각하게는 해주는 것 같아요.